아버지 김순남의 음악과 인생 (남한 인기 성우 김세원)


200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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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장명화 jangm@rfa.org

남과 북을 오갔던 조선의 천재음악가 김순남. 그의 유일한 딸 김세원씨가 지난 6일 자유아시방송에 소개된 뒤, 서울과 워싱턴에서 김순남의 음악을 애호하는 애청자들의 뜨거운 반응이 자유아시아방송에 접수됐습니다. 오늘은 김순남에 대해 더 듣고 싶어하는 그들의 아쉬움을 담아서 알려지지 않았던 김순남의 자취를 그의 딸 김세원씨를 통해 들어봅니다.

(김세원) 중요한 것은 아버지가 최초의 피아노협주곡을 썼어요. 아버지의 곡을 알아본 사람이 우리나라 군정때, 해방되고 그때 영사로, 문화영사로 오셨던 헤이모위츠라는 분이 계셨어요.

그 분이 줄리아드 음대 피아노과 출신이에요. 그분이 아버지의 악보를 알아본 거예요. 그래서 그분의 악보를 미국의 현대작곡가에게 보내자고 그랬어요. 그리고 보스턴에 탱글우드의 지휘자에게도 보내고 그때 오라고 그랬는데...

김순남이 작곡한 ‘해방의 노래’ 듣겠습니다. 해방의 감격과 기쁨이 극적으로 표현돼 해방직후 많이 불려진 곡입니다.

(가곡-해방의 노래)

해방 후 좌익과 우익의 대립 속에서 남로당원이었고 민전위원 조선음악가동맹 작곡부장이던 김순남에게 ‘체포령’이 내려집니다. 김순남은 체포령 속에서 해방둥이 딸을 그리며 영혼에서 샘솟는 부성애를 4곡의 자장가에 쏟아 부었습니다.

다음에 들으실 ‘자장가’에서 ‘새봄이 돌아오면 아버지도 온단다’라고 썼지만, 영원히 지키지 못할 약속이 되고 맙니다.

(가곡- 자장가)

김순남의 이름과 작품은 그의 월북 때문에 남한에서 지워졌습니다. 하지만, 1988년 세상이 다시 평가했습니다. 40여년을 아버지 이름을 한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김세원씨. 김세원씨는 그 뒤 마치 아버지가 살아있을때 붙었던 바람이라도 잡아보려듯 헤매고 다닙니다.

(김세원) 헤이모위츠씨가 네바다 르노에서 음악대학 교수예요. 그분이 아버지를 잘 아신다고 해서, 르노를 찾아갔었어요. 그분이 나왔는데, 조그만 공항에서 저를 툭 치면서 마치 백년지기를 만난 것 같이, 그분의 입장에서는 자기랑 가까웠던 한국 친구의 딸이라니까 얼마나 감회가 깊겠어요?

대단하겠죠. 그러면서 네가 깜짝 놀랄 일이 있다고 공항에서 말씀하셨어요. 그분이 아버지의 육필악보를 갖고 계신 거예요. 4-50년 된 것을 그 양반이 내가 온다니까 집안을 다 뒤져서 찾아낸 거예요. 그래서 내가 그걸 보니까 아버지를 만난 것 같더라고요.

‘조선에서 가장 위대한 작곡가’이자 ‘진정한 창조적 천재’로 평가받았던 김순남. 김순남의 유일한 혈육 김세원은 뒤늦게 아버지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준비한 선물과도 같은 아버지의 작품들을 하나하나 찾아냅니다.

(김세원) 다니면서 워싱턴 국회도서관이 있죠, 거기 가서도 아버지 작품을 찾았어요. 악보를요. 바이올린곡, 합창곡도 있었고. 또 보스턴 옌칭도서관에서 아버지 수필을 찾았고, 그렇게 찾았다니까요.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피아노 협주곡, 미완성이예요. 이북 가서 완성시키신 것 같아요. 일악장하고 이악장 첫 소절까지만 작곡을 하셨는데...

김순남은 평소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상과 음악을, 민족과 음악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우리의 음악은 생활의 현실을 진실하게 파악하는 데서 출발한다. 민족과 음악은 하나이다.”

마지막곡은 평북 정주 출생인 김소월의 시에 김순남이 작곡한 ‘산유화’입니다.

음악-산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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