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 탈북자의 편지
2006.04.19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한민의 탈북자가 만나본 탈북자’ 순서입니다. 오늘은 북한 평안북도 신의주시에서 살다가 몇 년전에 남한으로 온 김경호(가명)씨가 고향인 남신의주에 살고 있는 친구 박모씨에게 보내는 편지를 전해 드립니다.
“잊지 못할 나의 친구야, 너와 헤어진 지도 5년이 됐다. 그동안 몸은 성한지? 자유아시아방송을 통해 북한에 편지가 전달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겨서 이렇게 너에게 편지를 보낸다. 난 여기 남한에 와서 넘쳐나는 자유에 목이 메일정도로 행복하건만 즐거운 그 순간마다 날 괴롭히는 고향사람들의 비참한 모습을 잊지 못하겠구나! 용천군 읍 주택건설에 사회동원 자주 다닌다는데 점심 변또(도시락)가 걱정될 너의 어머니모습도 보이는 것 같다. 내가 점심 변또를 못 가져올 땐 너의 변또를 나누어 먹군 했지? 생각나니?
언젠가 도로 작업대문에 사회노동 나갔다가 그날따라 너도 나도 점심 변또를 못 가져와서 식사시간에 둘이서 슬그머니 동뚝에 가서 신세한탄 하던 걸 말이야. 네가 그때 내게 이런 말을 했지.
저 앞에 중국은 기막히게 발전했는데 가서 본 사람들이 말하기를 중국은 개방이후 완전히 지상낙원이 됐다구 말이야. 중국 개들도 입가에 밥알을 묻히고 다닌다고 말했던 거 생각나지?
쪼룩거리는 배를 달래며 그때 너와 함께 땅을 파서 메를 캐어먹던 그날들이 삼삼하구나. 너의 어머니 다리자르신걸 보고 내가 떠났는데 그 후 건강은 어떠하신지? 장삿길에 나섰다가 차사고로 한쪽 다리를 잃으신 너의 어머니인데 아무리 생활이 쪼들려도 어머니 앞에 짜증내지 말고 마음 편하게 해드리길 바란다. 너야 원래 효성지극한 놈이니까 어련하겠지.
세상밖에 나와서 넓은 세상 둘러보니 참, 그동안 내가 북한이라는 손바닥만한 땅에 갇혀서 얼마나 무지한 돼지생활을 해왔는가를 통감한다.
우리집 자리에 누가 이사 왔는지 궁금하다. 남신의주에 씨리카트벽돌 아파트건설이 한창 진행중이였는데 지금은 완공?는지... 우리 같은 하층 백성들이 죽어도 그런 아파트 차례질순 없겠지만 그래도 무슨 기적이라도 생겨 너의 가족도 그 아파트에 배정되기를 하늘과 땅에 빌고 빈다. 제발 우리친구 세상에서 제일 마음씨가 착한 놈이 째지게 가난하고 병든 모친과 부양해야할 동생들이 3명이나 있는데 그놈에게 복이 차례지게 해줍사하고 빌고 싶다.
참, 네 동생들 이젠 컸겠구나? 막내가 이젠 19살쯤 됐을텐데 모두 무슨 일을 하는지 ? 군대나간 둘째는 아직 제대 안 됐는지? 영양실조로 한때 부대에서 난리 부렸댔지? 너의 엄마 슬퍼서 울고, 넌 집에 있던 염소 팔아서 보약사서 보내던거. 너는 그 땅에서 살면서 자신의 사는 모양이 당연하게 여겨지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세상밖에 나와서 넓은 세상 둘러보니 참, 그동안 내가 북한이라는 손바닥만한 땅에 갇혀서 얼마나 무지한 돼지생활을 해왔는가를 통감한다. 적어도 중국은 우리가 조선에서 생각하던 그런 못살고 거지가 바다처럼 넘쳐나는 그런 사회가 아니었어.
그 어느 농촌에 가도 꺼질 줄 모르는 화려한 불빛이 있고 신의주 압강호텔의 외화상점보다 더 질이 높은 상점이 중국의 농촌마을에도 차고 넘친다구. 내가 놀란 것은 물질적 풍요함뿐이 아니라 사람들 모두가 자유롭고 평등하게 살아가는 모습이었어.
특정한 일부 사람들만이 호텔이나 외화상점에 드나드는 조선 같은 나라는 세상에 없다구. 외화상점이 따로 없고 모든 상점의 물건이 전부 북한의 외화상점의 상품 그대로야. 처음엔 나도 너무 황홀하여 어리둥절 했었는데, 이젠 습관이 되서 나도 이런 부유한 사회의 일원으로 wmf거운 삶을 살고 있지.
친구야, 그런데 말이야. 더 희한한 건 신의주사람들은 그래도 조선에서 제일 상업성 있는 지역으로서 삶이 괜찮다고 하지만 모두가 강 건너의 단동의 야경에 홀려 밤이면 그쪽을 하염없이 바라보군 하는 게 사실 아닌가! 그렇게 멋있다는 중국 사람들두 말이야 남한에 가서 돈 벌거나 살아보는 것이 일생을 걸만한 소원이란다. 어느 정도인지 짐작이 가지?
난 부산에 집이 있거든. 한 달에 1번 정도 서울에 다니는데 부산에서 서울까지 거리가 신의주에서 개성까지 가는 거리와 같애. 너두 나와 함께 1997년 2월에 개성에 갔다온 일 있지?
쉬지 않고 달려서 1박2일이 되야 도착하지. 여기 남한엔 부산에서 서울가는 건 기차, 버스, 자가용차 등으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어. 여행증이나 통행증명서라는 건 전혀 없는 곳이야. 고속열차는 4시간 걸리고 버스난 자동차는 6시간이면 충분해. 남한의 어느 산골에도 도로수준은 북한의 안주-평양 고속도로 수준이야. 그보다 더 좋으면 좋을거야.
내가 놀란 것은 고속도로에 있는 수많은 휴게소들 보고 남한이 정말 발전된 사회임을 실감했어. 한국국민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하는 남한의 고속도 휴게소는 북한의 중앙당초대소 보다 더 훌륭하다고 나는 생각해. 사람차별이 없고 먹지 못해 비틀거리는 사람은 없다는 거야. 극소수의 노숙자들이 조금 눈에 띄지만 남한의 노숙자는 북한의 당 간부보다 더 정신적 즐거움이 크거든. 참, 채하시장이 북한에서 제일 큰 시장인데 요즘도 한국비디오나 한국화장품 몰래 팔고 사는 거 있겠지? 언젠가 너 하구 같이 민포동에 있는 화교네 집에 가서 한국화장품 보면서 남한의 발전상에 충격 받았던 거 생각나?
그때 보았던 화장품 여기 한국에 와서 보니 남한에선 일반노동자들이 손의 피부보호를 위해 바르는 핸드크림 이라는 화장품 중에 급이 낮은 종류였어. 그때 너무 멋져보이던 남한 운동화를 만져보며 부러워했던 그 흰색 운동화 생각나지? 여기 남한에서 보니까 여기선 농사일하시는 나이 드신 분들이나 작업용으로 신고 다니더군.
친구야, 지금이 4월 중순이니 네 생각이 더 난다. 보릿고개가 시작 됐겠는데 금년에 무사했으면 한다. 사방에서 죽어나가던 그때가 떠올라 생각하기도 싫어. 배급은 제대로 받는지? 아마 뻔 할 거라고 생각한다. 장군님을 믿고 살면 행복한 날이 온다고 하는 당선전이 새빨간 거짓임을 이젠 북한의 알만한 사람 다 아는데 너도 고지식하게 살지만 말라구. 남의 집 구멍탄 찍어주고 받는 얼마 안 되는 돈에만 매달리지 말고 가을에 싸게 팔리는 돼지새끼를 사서 겨울 내내 길러서 3~7월에 주변 농촌이나 기업소들에서 체육행사 같은 거 할 때 가을 몫으로 팔라구.
가을 몫으로 팔면 본 매매 가격의 3배거든. 말하자면 직거래는 생돼지 70kg짜리를 3~7월이 아닌 시기에 팔면 3배의 알곡값을 받지만 3월~7월에 팔면 가을에 값을 받기로 하고 먼저 돼지를 주는 건데 받을 땐 4배로 받는 거라구. 일명 가을몫 돼지라고 하지.
사료가 문제 될 수 있는데 용천 앞바다 썰물 때 나가면 검추풀이 많아. 그걸 베어다가 해산물 찌꺼기와 강냉이 가루, 식당찌꺼기 좀 섞어서 끓여서 3마리만 해봐. 그러면 밑천이 생긴다. 그땐 작은 장사를 시작하면 돼. 네 동생들과 함께 하면 될 거야. 믿을 건 자신과 가족이지 절대 장군님이나 당비서가 아니란 걸 이젠 알았지!
난 내가 중국으로 탈출할 때 나의 어머니와 두 동생 모두를 데리고 온 것이 얼마나 잘 된 일인가를 날이 갈수록 알게 된다. 지금 어머니는 80이 되셨지만 북한에서 보다 더 젊어지시는 것 같애. 북한에선 2년동안 외출도 못하셨는데 남한에 와선 하고 싶은 여행 다 하신다구. 동생들은 지금 연세대학교, 막내는 외국어대학교에 다녀. 난 중소기업회사에 다니며 나 자신과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하지. 지금의 내 생활이 만족해. 기회 되면 자주 편지할께. 부디 몸 성히 잘 있어라.
2006년 4월 13일 대한민국 부산에서 너의 친구로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