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의 편지: 사촌동생에게 보내는 편지


2006.09.13

남한에 정착한 탈북 언론인 한민(가명)씨가 역시 남한에 정착한 탈북자들을 만나 이들의 애환을 들어보는 ‘탈북자의 편지’ 순서입니다. 오늘은 서울에서 사는 탈북자 정모씨가 북한 함흥시에 살고 있는 사촌동생에게 보내는 편지입니다.

그동안 잘 있었니? 난 2004년에 남한으로 와서 지금 자유롭게 살고 있는 너의 사촌형이다. 얼마 전 중국에 여행 갔다가 기림성에 살고 계시는 친척에게서 너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작년에 친척방문으로 중국에 와서 한 달간 체류하다가 돌아갔다는데 지금 너의 심정이 이해된다. 북한사람이 중국에 한번 왔다 가면 누구든지 머리가 복잡해 지지. 말이 없어지고 고민에 빠지고 허탈감과 배신감이 들어 뭐가 뭔지 혼란스러워 할 너를 그려본다. 네가 보고 들은 그대로가 현실이다.

최근 뉴스를 보니 우리 고향에 수해로 피해가 크다고 하던데 나도 걱정이 많이 된다. 식구들을 너 혼자서 먹여 살린다니 장하다. 형으로서 도와줄 길을 모색하고 있다.

네가 중국친척들에게 많은 질문을 하고 갔다고 안다. 네가 그렇게 의문되고 모순을 겪는 북한의 모든 현상은 지극히 당연한거라 생각한다. 그러니 너무 큰 범위로 생각을 깊이 하지 말어라. 일반 주민이 국가나 정책적인 문제에 신경쓰면 다치기 쉬운 게 그 땅이다.

그러니 좋은 세상 올 때까지 너와 가족의 생계에만 최선을 다하면 되는 거라고 생각한다. 네가 알고 싶다고 종이에 적어놓고 간 질문들을 모두 봤어.

6.25전쟁에 대하여, 북조선이 국제적으로 정말 강성대국으로 찬사를 받고 있는가? 등 50여 가지가 되던데 한 장의 편지로는 충분한 답을 해 줄 수가 없구나.

북조선을 탈출하여 남한으로 온 사람들이 8천명을 넘었다는 말을 듣고 너는 그런 말은 남한의 거짓 선전이라고 했다는데 형으로서 동생에게 정확히 답해 주겠다. 그 숫자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정말로 남한에 왔고 그들 속에는 너를 잘 아는 사람들도 몇 명 있단다. 누구라고는 지금 알려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현실을 보고 판단하면 되는 거다.

1980년대 초부터 2차 7개년 계획을 요란하게 세우고 < 사회주의 10대전망목표>를 10년 동안에 돌파하면 지구상에서 최고의 부유한나라가 된다고 눈만 뜨면 선전했고 또 그렇게 알고 죽도록 일했었지. 그로부터 26년이 지난 오늘 결과를 봐라. 자기 고향을 기꺼이 버리고 죽을 수도 있는 먼 길을 수천 명의 사람들이 택했다. 그들이 < 배신자>인지 < 각성된 사람들>인지는 각자 수준 껏 판단하자. 전장에서 장수를 외면하고 병사들이 대규모로 이탈하는 것이 병사의 잘못이라 생각되는가? 더 까다로운 설명은 필요 없을 거라 본다.

지금 부한 사람들이 너처럼 혼란스러워 한다고 안다. 북한에서 500명 종업원을 관리하는 큰 공장의 간부가 얼마 전에 중국친척방문차 왔다가 돌아갈 때 친척들에게 요구하여 중고텔레비와 녹화기, 냉장고를 구해가면서 평생소원이 한순간에 풀렸다면서 너무 기뻐하는 걸 본 중국친척들이 < 불쌍해서 못 봐주겠더라>고 하더라.

집안에 환자가 있다니 너의 어깨가 무겁겠다. < 자유가 없으면 차라리 죽자!>라는 말을 누가 내놓은 줄 아니? 1920년대 말에 고 김일성이 외치던 구호였다. 조선예술영화 < 조선의 별>에도 나온다. 이렇게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우리가 태어난 땅이야.

그리고 네가 부탁한 수동식 녹화기는 구하기가 정말 어렵다. 지금은 완전자동이여서 20년 전의 제품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난감하다. 네가 굳이 수동녹화기를 요구하는걸 보니 비디오청취단속이 심한 것 같구나.

내가 단속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하나 알려줄게. 자동녹화기라도 가능해. 반드시 용량에 맞는 배터리를 녹화기 주위에 항상 대기 해 놓고 보다가 갑자기 예고 없이 절전되면서 단속반이 처들어 오면 배터리에 녹화기 전원을 연결하여 테입이나 디스크를 뽑을 수 있다. 그 방법이 제일 좋다.

형도 90년대에 오랫동안 그렇게 보았는데 수차례 급습 받았어도 한 번도 들킨 적 없다. 배터리는 흥남24볼트면 좋고.

그것이 비싸면 통신결속소들에서 사용하는 알카리 배터리도 된다. 두 가지 모두 구하기 어려우면 교환기용 6볼트4개 묶으면 된다. 그건 시장에 많이 나와 있고 값도 괜찮다.

현실에 맞게 네가 잘 선택하되 조심해라. 몸 성히 살아서 좋은날 다시 만나자.

2006년8월16일. 남한에서 형으로 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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