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67주년 특집] 한나 김의 ‘참전용사’ 세계여행 ①

워싱턴-김진국 kimj@rfa.org
2017.06.24
london_medal_hanna_b 영국군인 최고 명예인 빅토리아 십자훈장을 받은 윌리엄 스피크먼 한국전 참전군협회 회장과 한나 김.
사진-한나 김 제공

“총상 20번 수술.. 전사자 기념패 제작에 전재산”

(인트로) 자유와 평화를 위해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이들을 찾아 그들의 육성을 직접 담아내고 한반도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전투가 더 이상 ‘잊혀진 전쟁’으로 기억되지 않기 위해서 지난 1월부터 5월까지 지구 두 바퀴 거리를 이동한 전 미국연방의회 한인보좌관의 방문행적이 화제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은 한국전쟁 발발 67주년을 맞아 한나 김씨가 전세계를 돌며 만난 유엔참전용사 할아버지들의 전쟁에 대한 기억과 오늘의 이야기를 이틀에 걸쳐 전해드립니다. 한나 김씨와 함께 한국전 참전군인 할아버지들의 이야기를 전해드릴 저는 김진국입니다.

(김진국) 한나 김은 한국전 참전용사이자 한국전 참전용사 인정법안을 통과시키고 미주 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했던 대표적인 친한파 정치인이던 전직 연방 하원의원 찰스 랭글이 항상 자랑하던 수석보좌관이었습니다. 고령이었던 찰스 랭글 의원이 지난해 정계를 떠나면서 의회 생활을 접게된 한나 김씨는 오랜동안 계획했던 꿈을 실현하기로 합니다. 세계 각국의 한국전 참전용사를 찾아 떠나는거죠. 여행을 떠나기 직전의 김 씨의 각오입니다.

(한나 김)  우리 젊은 세대가 한반도에 다시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2세도, 저희 부모님 세대도 제 여정을 지켜보시면서 안전하게 잘 돌아올 수 있게 기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원하면 다른 의원 보좌관으로 갈수 있는데, 왜 지금 가느냐 이런 말들 많이 하시는데, 지금이 아니면 참전 용사들이 이제 평균 90세가 되세요.

CTV에서 방송으로 소개한 한국전 참전용사를 인터뷰하는 모습.
CTV에서 방송으로 소개한 한국전 참전용사를 인터뷰하는 모습.
사진-한나 김 제공

<< 1  캐나다 - 25개국 여행의 첫 도착지  (1/ 19 – 1/ 22)>>

(김진국) 2017년1월 19일부터 5월 말까지 4개월 동안 한국전 참전국을 다니며 참전용사들을 찾고 만나 한반도 평화 통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겠다는 한나 씨의 첫번째 방문국은 캐나다였습니다.

(한나 김) 캐나다에 도착한 다음 날인 1월 20일 ‘캐나다의 꽃동네’로 유명한 온타리오주 브램턴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공원(Wall of Remembrance)에서 캐나다 참전 용사들을 처음 만났습니다. 열 분도 넘는 캐나다 참전군인들이 참석해 점심을 함께 먹으며 한국전쟁 당시의 기억을 나누었습니다.

(김진국) 영하의 날씨에 아흔 살 고령의 참전군인 할아버지들과 약 예순 살 어린 미국에서 온 한인 여성의 만남은 캐나다 언론의 주목을 받기도 했습니다.

(한나 김) 캐나다 최대 방송국인 CTV에서 나와 참전 용사들의 만남을 취재해서 그날 밤 주요 뉴스로 방송했습니다. 토론토 참전용사 회장님은 다른 지역의 한국전 참전용사가 TV 뉴스를 보고 연락해 왔다면서 나의 캐나다 방문이 예전 전우들이 오랜만에 다시 연락하고 안부를 전하는 계기가 됐다면서 흐뭇해하시기도 했습니다.

(김진국) 캐나다는 한국전쟁에 2만 5천 687명을 파병해 전사자 312명 부상자 1천212명이었으며 아직까지 생사를 확인하지 못한 실종자가 1명이며 포로로 옥고를 겪은 사람이 32명이라고 합니다.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대통령궁에서 열린 공식 환영행사.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 대통령궁에서 열린 공식 환영행사.
사진-한나 김 제공

<< 2 콜롬비아 – 해군을 파병한 남미 유일 참전국 (1/ 23 – 1/29)>>

(한나 김) 두번째 방문국인 콜롬비아는 가장 다시 방문하고 싶은 나라에 첫 손꼽힐 만큼 인상 깊었습니다. 마약과 범죄의 이미지가 강한 콜롬비아여서 걱정이 앞섰지만 참전군인 할아버지나 도움을 주신 분들, 그리고 콜롬비아의 한인들 모두 친철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편안한 여행을 했습니다.

(김진국) 남미 유일의 한국전 참전국인 콜롬비아는 한국전에 해군을 파병한 대표적인 나라입니다. 해군 파병의 의미를 기리기 위해서 한국 정부에서는 거북선 모형을 제작해서 콜롬비아 정부에 기증했습니다. 콜롬비아는 모두 5천 100명을 한국에 보냈고 이중 28명이 포로로 붙잡혔고 부상자가 448명이었으며 163명이 끝내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전사했습니다.

(한나 김) 콜롬비아에서 만난 참전용사 중 82세 바가스 할아버지가 가장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바가스 할아버지는 16세 때 한국전쟁에 참전해서 온 몸에 총상을 입었고 20년 동안 20번의 대수술을 해야했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생 모으신 돈으로 보고타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에 한국전쟁에서 사망한 콜롬비아 군인의 이름이 새겨진 기념패를 거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평생 모은 돈을 기부했지만 하나님께서 다른 축복을 많이 내려주셨다. 오늘도 하나님의 축복을 경험했다. 너를 나에게 보내주셨으니까” 라고 말씀하셨어요.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의 거북선 조형물.
콜롬비아 카르타헤나의 거북선 조형물.
사진-한나 김 제공

<< 3 영국 - 미국 다음으로 많은 파병국 (1/30 – 2/5)>>

(한나 김)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10시간 여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곳은 세번째 방문국인 영국 런던이었습니다.  영국군의 한국전 참전군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윌리엄 스피크먼 참전군협회 회장을 만났습니다. 스피크먼 회장은 영국군인의 최고 명예인 빅토리아 십자훈장(Victoria Cross-미국 Medal of Honor에 해당)을 받은 한국군 참전군 네 명 중 유일하게 살아계신 분입니다.

(김진국) 영국은 한국전쟁에 참전한 나라 중 미국 다음으로 가장 많은 군인들을 파견했습니다. 10만 여명의 영국군이 한국의 자유를 위해 전장에 투입됐고 그 중 1천78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천 명의 전쟁 포로 중 82명은 아직도 집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나 김) 스피크먼 할아버지는 1951년 11월 4일 새벽 임진강 지역의 ‘317고지’ 전투를 평생 잊지 못한다고 하셨습니다. 중국 인민군의 기습공격에 고지를 방어하던 영국군의 수많은 병사가 목숨을 잃거나 부상당했습니다. 이등병이었던 스피크먼 할아버지는 목숨을 걸고 끝없이 밀려오는 인민군을 향해 수류탄 공격으로 시간을 벌었고 그 덕분에 스코틀랜드 수비대는 후방으로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스피크먼 할아버지는 이날 전투로 다리를 크게 다쳐서 아직도 휠체어에 의지해 생활하고 계십니다.

<< 4 스웨덴, 의료지원국으로 가장 빨리 참전(2/11 -2/14)>>

(한나 김) 스웨덴 즉 스웨리예는 미국을 제외하고 아직까지 유일하게 한반도에 ‘군대를 주둔’하고 있는 나라입니다. 한반도의 정전협정 준수 여부를 감시하기 위해 구성된 중립국감시위원단의 업무를 수행하기 위해 스웨덴 군인 5명이  판문점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김진국) 스웨덴은 한국전쟁 당시 ‘의료적인 지원’을 해준 국가입니다. 한국전쟁에 의료지원으로 참전했던 나라는 스웨덴을 비롯해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즉 인디아 그리고 이탈리아 등 총 5개국입니다.  스웨덴은 의료지원국 중 가장 빠른 시기인 1950년 9월 23일 총 160여 명의 의료요원들을 파견하여 9월 28일 부산에서 야전 병원을 열어 전쟁 이후 1957년까지 유엔 연합군 뿐만 아니라 민간인, 북한과 중공군 포로까지 치료했다고 합니다.

(한나 김) 스웨덴에서 첫 번째로 만난 한국전 참전군인은 103세 로라 이마뉴엘 할머니였습니다. 한국전쟁에 참전할 때 로라 할머니의 나이는 35세였습니다. 대학원을 이미 졸업한 대위 계급의 ‘노처녀’셨죠. 부산에서 근무한 1년 동안 야전병원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이 ‘노처녀 대위’를 특별히 좋아했다고 추억하셨습니다. 한국을 떠날 때 환자들이 돈을 모아서 진주목걸이까지 선물할 정도였다. 할머니는 목걸이를 아직도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다면서 직접 보여주시기도 했습니다. 할머니는 스웨덴 의사와 간호사들이 야전병상의 유엔 연합군 환자들 돌보면서 시간이 날때마다 부산 시내의 피난민들이 사는 지역을 방문해서 민간인 환자들을 치료해줬다고 했습니다.

<< 5노르웨이, 한국 국립의료원의 뿌리인 노르메시의 나라  (2/15 -2/19)>>

(한나 김) 오슬로에 도착한 다음 날인 2월 16일 노르웨이의 참전용사를 전쟁박물관에서 만났습니다.   노르웨이참전군협회 부회장인 알비드(Arvid) 할아버지와 핀(Finn) 할아버지였습니다. (김진국)  노르웨이는 한국전쟁에 624명을 파병했는데 100명의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나머지는 의료인을 보호하는 군인들이었다.

(한나 김) 오슬로에 있는 전쟁기념관은 노르웨이가 참전한 해외전쟁과 관련한 기록을 전시하는 박물관이어서 한국전만 전시하진 않았지만 가장 큰 공간을 차지하며 당시의 생생한 모습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많은 자료들이 있었습니다.야전군부대의 진한 녹색침대와 그 당시 치료를 위해 사용했던 의료 기계들이 다양하게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한국전쟁의 생생한 현장을 재현하며 전쟁의 교훈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점에 부럽고 놀라웠습니다. 핀 할아버지는 첫 유엔 사무총장이 노르웨이 출신이었는데 한국전쟁이 그때 일어났기 때문에 노르웨이 사람들에게 한국전쟁이 많이 알려졌고 노르웨이 총장을 돕기 위해 많은 노르웨이 사람들이 한국전 참전에 자원했던 면도 있었다고 설명하셨습니다.

<< 6. 덴마크- 999일 동안 병원선을 보냈던 ‘파파상’의 나라(2/19 -2/23) >>

(한나 김) 덴마크에서는 한국전쟁 참전용사를 한 분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오히려 오랜 시간 함께 보내며 상세한 당시 증언을 들을 수 있어서 특별했습니다. 스벤 야트 덴마크 한국전 참전군인협회 회장은 유머와 위트가 넘치셔서 인터뷰하는 내내 웃음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스벤 할아버지는   ‘한국에 있는 아들’ 이야기를 해 주셨는데요,  1953년 열차에 치여 다리를 크게 다친 15세 소년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침 그 옆을 지나던 덴마크인이 유틀란디아 호로 데려와서 자신의 피를 수혈해 가며 결국 소년에게 새 삶을 선물했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김주완이라는 이름의 소년(지금은 80이 되어가는 어르신이지만)은 자신의 목숨을 살린 덴마크 간호사를 ‘파파상’이라 불렀다고 합니다.

(김진국) 덴마크가 한국에 보낸 유틀란디아 병원선은 1951년 1월 23일 한국으로 출항했으며 연합군 부상자의 귀환과 의약품 조달 등을 위해 한국과 덴마크를 왕복하며 3차례에 걸쳐 의료지원 파견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전쟁 초기 부산항에 머물다 1952년 가을부터 인천항으로 옮겨 지원 활동을 했는데 999일 동안630명의 덴마크 의료진들이 근무했다고 합니다.

(한나 김) 유틀란디아 호는 비록 참전한 병원선이었지만 ‘사랑의 유람선’ 못지 않은 커플들을 만들었다고 하네요. 1등 항해사였던 스벤 할아버지는 한국으로 함께 갔던 간호사와 결혼했습니다. 유틀란디아 병원선에서 탄생한 커플이 16쌍이나 된다고 합니다. 단 한 커플도 이혼하지 않고 가깝게 지내며 즐거운 교류를 이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1부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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