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 바로 청취자 여러분이 살고 계신 북한입니다. 내부 문서를 통해 오늘이 북한을 만나보는 [문서로 보는 북한] 진행에 안창규입니다. 오늘도 김지은 기자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지은 기자 : 안녕하세요. 오늘은 2025년 3월 조선로동당 출판사 발행 학습 제강 중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 현상을 철저히 짓뭉개버리자’를 다뤄보겠습니다.
진행자 : 제목을 보니 자식들의 이름을 짓는 문제를 놓고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를 비판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마 이 지구상에 개인의 이름을 갖고 주체성, 민족성 고수 등 정치적 고려를 강조하며 ‘이렇게 해라’, ‘이거는 하지 마라’ 하는 국가는 북한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김지은 기자 : 저도 유일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서는 2025년 3월에 조선노동당출판사가 발행하여 전국에 배포한 전 주민대상 학습강사용 제강입니다.
이달에는 ‘대중의 정신력을 총발동하기 위한 사상 사업에 힘을 넣어 당 제8차 대회 결정 관철의 마지막 해 투쟁 과업을 빛나게 완수하자’는 김정은의 명언 해설에 이어 ‘항상 더 높은 방향으로 지향해나가는 것이 혁명과 건설이다’의 위대성 교양 자료를 비롯, 신념교양자료, 제8기 제11차 전원회의 결정 관철에로 전체 인민을 힘 있게 불러일으키기 위한 구호와 표어를 내놓았습니다.
또 어김없이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적 현상을 철저히 짓뭉개 버리자’ 교양 자료가 포함됐는데 이 부분에서 ‘자식들의 이름을 망탕 지어 부르는 현상을 철저히 없애자’는 내용을 다루고 있습니다.
‘당의 사랑과 은덕을 후손에 전하는 의지를 담아’, ‘당을 끝까지 받들어나갈 소망이 드러나게 지을 것
제강에는 ‘예로부터 우리 인민은 자식이 태어나면 이름을 뜻이 있으면서도 소박하게, 고상하면서도 무게 있게, 부르기 쉬우면서도 듣기 좋게 짓는 것을 풍습으로 여겨왔지만 일부 가정에서 정치적 고려가 없는 이름을 지어주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그러면서 ‘적들이 썩어빠진 부르죠아사상문화를 침투시키기 위해 악랄한 책동’을 하는 중이니 이름 하나도 ‘당의 사랑과 은덕을 후손에 전하는 의지를 담아’, ‘당을 끝까지 받들어나갈 소망이 비끼게(드러나게) 지을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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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 ‘당의 사랑과 은덕을 전하는 의지를 담은 이름’, ‘당을 끝까지 받들어갈 소망이 비끼는 이름’이 어떤 건지 뻔합니다. 저도 당장 몇 가지 이름이 떠오르는데 당국이 지으라는 이름은 김일성 시기부터 시작해 현재까지 거의 비슷한 이름인 것 같습니다.
김지은 기자 : 북한은 한 정권이 80년 넘게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항상 드는 생각이지만 이름을 포함해 많은 부분에서, 80년 동안 내내 비사회주의 투쟁, 반사회주의 투쟁은 쉬지 않고 계속되고 있지만 이 현상이 한 번도 없어지지 않았다는 게 참으로 아이러니합니다. 투쟁도 80년 했는데 안 됐으면 투쟁 자체가 의미가 없든지, 투쟁을 위한 투쟁을 하고 있든지, 둘 중 하나가 아니겠습니까?
문서에서는 이름 짓는 행위 자체에 큰 의미를 부여합니다.
아이의 ‘이름을 짓는 것은 한 가정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혁명과 건설에서 주체성과 민족성을 철저히 고수하는가 못하는가 나아가서 우리의 사상과 문화를 지키는가, 지키지 못하는가 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했습니다.
이런 주민들의 기본적인 행위조차 ‘혁명’과 ‘사상’을 덧칠해 당국의 입맛에 맞게 통제하려 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제가 만약 이 학습 제강을 듣는 북한 주민의 입장이라면 당에서 지적한 ‘혁명과 건설에서의 주체성’이 밥을 먹여주나 돈을 주나 하는 생각이 들 것 같습니다. 차라리 당이 일일이 간섭하지 않는다면 지금보다 더 잘살 것이라고, 저와 같은 생각하는 주민들이 한두 명이 아닐 겁니다.
문건에서는 당의 사랑과 은덕을 전하려는 의지를 담아 아이들의 이름을 ‘충성’ ‘충실’ ‘충복’으로 지으라고 요구합니다. 또 ‘은덕’, ‘은혜’, ‘행복’, ‘효성’이라는 좋은 이름도 제시합니다. 안 기자, 진짜 북한에서 흔한 이름이죠?
그 많은 충성이, 충직이, 은혜, 행복이, 은정이 중 다수가 북한을 탈출하여 현재 남한에서 잘 살고 있습니다. 이름처럼 당의 사랑과 은덕이 있었다면 그들이 사생결단하여 북한을 탈출했겠는가 되묻고 싶습니다.
진행자 : 사실 저의 집안에도 당국이 원하는, 방금 김 기자가 언급한 이름을 지어준 사례가 있죠. 진짜 많았죠. 그런데 이 이름도 시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습니다.
고난의 행군 이전에는 당국이 수령과 당의 사랑과 은덕을 기리며 이에 충성하려는 열망이 담긴 이름을 지을 것을 독려했지만 고난의 행군 이후 김정일이 주창한 선군정치가 등장하면서 당국이 원하는 이름을 짓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집니다.
좀 더 직설적이면서도 강압적인 의미, 미국 등에 대한 분노가 담긴 이름들인데요. 어느 한 부모가 세 쌍둥이의 이름을 총, 폭, 탄이라고 지은 기억이 납니다. 세 자녀의 이름이 각각 김총, 김폭, 김탄으로 성을 빼고 연결하면 ‘총폭탄’이 되는데 당국이 이들을 언론에 수 차례 등장시키며 다른 주민도 그렇게 하도록 독려한 바 있습니다.
김지은 기자 : 보도가 어디 한두 번 됐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이름이 ‘김총’이 뭡니까. 김폭은 또 뭐고 김탄이라뇨. 이렇게 폭력적이고 괴상망측한 이름을 잘 지었다며 부모를 치켜세우고, 주민들이 따라 하라고 선전하는 것 자체가 정상적이라고 볼 순 없습니다.
또 총폭탄 뿐 아니라 결사옹위, 결사관철 외에 위성도 한때 추세였죠. 위성은 태양의 주위를 도는 위성을 가리킨 말로 김일성의 주위에 사상적으로 뭉쳤다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김정은이 직접 이름 지은 아이... 자라서 나쁜 ‘간부’로 악명
안 기자,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김정일이 대홍단에 가서 갓 무리 배치된 제대 군인의 집을 방문하여... 물론 계획적이지만요, 그 부부의 청을 받아서 이름을 지었다고 하죠. 아들을 낳으면 ‘대홍’이라고 짓고 딸을 낳으면 ‘홍단’이라고 지으라고. 그래서 그들 자녀들의 이름을 대홍이와 홍단이 되었습니다.
그렇게 ‘대홍’이라는 이름을 받은 아이는 나중에 커서 간부가 됐고 주민들을 혹독하게 밀어붙여 원성이 자자하다고 하죠.
진행자 : 맞습니다. 그 이름을 받은 사람이 간부가 됐다고 크게 보도되긴 했는데, 그 이름은 줬다고 충성을 다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김지은 기자 : 그 이름을 가진 것이 또 다른 권력이 됐을 수도 있죠.
이번 문건에서 당국은 부모가 자식의 이름을 아무런 각성도 없이 정치적으로 모호하게 짓지 말라고 합니다. 정치적 성향이 드러나게 확실하게 지으라는 것이죠.
특히 우리(북한)의 주적인 한국 괴뢰 것들을 동족으로 간주할 수 있는 이름을 절대로 짓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는데요. 사실상 당국이 이 문건에서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한국식 이름을 짓지 말라’이고 ‘사회적인 생활 양식’ 운운하고 있지만 남한식 이름 짓지 말라는 얘기를 하기 위해 이 문건이 작성됐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진행자 : 이러니 북한 주민들이 자녀의 이름을 지을 때 얼마나 신경이 쓰이겠습니까?
김지은 기자 : 그렇습니다. 반사회주의, 비사회주의도 고려해서 걸리지 않게 지으려니 고민이 클 것 같습니다.
그래서 대부분 무난하게 숙명, 명숙, 경식, 수길. 5월생이면 오월이, 가을에 낳으면 추월이, 봄에 태어나면 춘월이라고 짓습니다. 행복할 희망이 보이지 않는데 누가 무슨 이유로 행복이니, 은혜라고 이름을 지을 것이며 북한에서 혁명이 인민의 삶을 더 윤택하게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점점 열악하게 만드니 최근에는 혁명이라든가 당국을 찬양하는 식의 이름은 사라져 가는 분위기입니다.
진행자 : 최근 남한식 말투와 함께 남한식 이름도 문제가 됐는데 실태가 어떤지, 주민들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다음 시간에 다뤄보겠습니다.
김지은 기자, 수고했습니다.
[문서로 보는 북한]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진행에 안창규였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희는 다음 시간에 인사드립니다.
에디터 이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