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행자 : 지구상에서 가장 폐쇄된 국가 바로 청취자 여러분이 살고 계신 북한입니다. 내부 문서를 통해 오늘의 북한을 만나보는 [문서로 보는 북한] 진행에 안창규입니다. 오늘도 김지은 기자와 함께합니다. 안녕하세요.
김지은 기자 : 안녕하세요.
진행자 : 지난 시간에 이어 2024년 10월 10일 발표한 당 창건 79주년 기념 김정은의 담화, “일군들은 창당의 리념과 정신을 체질화한 공산주의혁명가가 되여야 한다”를 다뤄보겠습니다.
김정은이 집권한 이후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직책으로 낸 첫 번째 담화는 2012년 4월 19일, 두 번째는 2012년 5월 8일에 나왔습니다.
김지은 기자 : 네, 김정은 개인 명의의 담화는 주로 초기에 발표했습니다. 당시 1차 담화의 기본 내용은 “선군이 우리의 존엄이고 생명”이고 이를 위해 군사와 국방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경제 부문도 조금 언급했으나 실제적으로 아무 권한도 없는 내각에 경제문제를 집중시키라고 한 것이 전부입니다. 따라서 전반적인 내용은 선군사상을 기본적인 지도 노선으로 잡고 이를 집행해 나갈 것임을 명백히 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012년 5월의 두 번째 담화는 당·국가경제기관, 근로단체 책임간부 대상이었으며, 공식 명칭은 “사회주의강성국가 건설의 요구에 맞게 국토관리사업에서 혁명적 전환을 가져올 데 대하여” 였습니다. 바로 여기서 “혁명적 수령관이 선 거룩한 수도” 평양을 “세계적인 도시로 꾸려야 한다”고 밝혔는데 인터넷 활용 등의 내용이 포함돼 있어 개방에 대한 약간의 희망적인 분석도 나온 바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다루고 있는 2024년 10월 10일 담화가 있습니다.
진행자 : 네, 북한에선 최고 지도자 명의의 담화가 나오면 주민들에게 학습하게 합니다. 현장에서 한 마디 한 것도 모두 기록으로 남기는데 담화는 더 중요하게 다룹니다. 오늘 다루는 10월 10일 담화 역시 당시, 전국적으로 학습된 것으로 전해지지 않았습니까?
김지은 기자 : 그렇습니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은 그리고 김정은에 이르기까지 지도자의 사상과 당의 정책을 주민들에게 전달하고 주입시키기 위해 ‘학습’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그 틀에서 강압적으로 주입시키고 있습니다. 과거 신년사가 나오면 문자 하나라도 틀릴세라 줄줄 외우고 암기 경연을 열었는데 지금은 김정은의 담화문을 학습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에는 이 학습을 지시하며 “원수님의 담화 내용을 구절구절 심장에 새길 정도로 완벽하게 학습할 것”을 주문했다고 전해지는데요. 구구절절이 외워, 현실에서 실천하라는 요구였겠지만 학습은 어디까지나 이론입니다. 이론을 현실에 접목시키기 위해서는 조건이 따라야 하는데 북한에서 주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노력 동원’ 외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당에서도 주민들에게 가장 많이 요구하는 건 노력 동원입니다. 주민들은 아파트를 지으라고 하면 개미 떼처럼 달라붙어 아파트를 건설하고, 옥수수밭을 엎어서 밀보리를 심으라면 밀보리를 심어야 합니다.
인민들은 밀보리를 심으라는 것이 이해되지 않고 잘못된 방법이라고 할지라도 온 나라의 옥수수 밭을 갈아엎고 아파트가 완공되면 김정은이 등장해서 치적을 선전하며 자기가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파트를 주며 선심을 씁니다. 여기에 어디 인민을 위한 정치가 어디 있습니까. 학습은 주민들에게 강제로 주입시키는 것이고 현실은 다른 얘기가 되는 겁니다. 담화에 나오는 대로 이뤄졌으면 북한의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이르는 80년 동안 다 이루고도 남았을 겁니다.
김정은 시대, 가장 이율배반적 구호 ‘인민대중제일주의’
진행자 : 수십 년 반복되는 말과 자화자찬, 본인 ‘주장’을 넘어서지 않는 온갖 수식어들이 넘치는 담화문이지만 두 가지 문제가 보입니다.
우선, 김정은은 담화문이 발표된 2024년 선대인 김일성과 김정일을 지우고 본인을 가장 정점에 놓는 작업을 노골화했습니다.
2023년 말부터 적대적 두 국가론을 언급하기 시작해 김일성 때부터 민족 최대의 숙원이라고 여겨온 통일이 필요 없다는 망언도 내뱉었고, 또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에 붙은 태양절 명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러나 담화문에서는 당 창건의 리념과 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앞부분을 모두 할애해 주장합니다. 또 핵 개발에 집중하면서 경제를 정상화하고 먹고살게 해달라는 ‘민심’을 무시하는 행보를 보이지만, 담화문에서는 민심을 강조하고 인민대중제일주의를 주장합니다. 상당히 이율배반적 주장이 아닐 수 없는데 어떻게 보십니까?
김지은 기자 : 저는 북한 당국이 내놓은 사상 중에 가장 가증스러운 것이 ‘인민대중제일주의’라고 봅니다. 북한의 모든 정책과 노선은 전부 세습통치를 위해 짜여져있는 ‘김씨제일주의’입니다.
대표적인 것이 방금 얘기한 ‘학습’입니다. 김정은 세습 독재를 인민 정치로 포장하면서 그의 위대성을 선전하는 것이 바로 학습입니다.
저도 북한에서 인민을 위한 수령, 대중을 위한 원수님으로 알았던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세대를 이어 통치하지만 우리는 항상 헐벗었고 굶주렸습니다. 북한 인민들이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게을러서 굶주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만을 위한 통치자를 둔 때문이었습니다. 노래를 하나 불러도 수령을 위하여, 학습도 1인 독재자를 위해서 필요한 북한에서 인민은 희생양일 뿐이었습니다. 날에 날마다 핵무기 개발과 시험발사를 하면서 인민 생활은 언제 향상시킵니까. 그러면서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 인민을 위한 정치라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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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행자 : 2024년 북한은 ‘위대한 김정은시대’를 공식 선포한 것으로 전해졌습니다. 김 기자의 보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보도 시점이 지난해 5월이었죠?
김일성시대, 김정일시대 그리고 김일성주의, 김정일주의는 우리가 많이 들어본 술어입니다. 김정일이 권력을 차지한 지 얼마 안돼 김정일주의, 김정일시대라는 말이 등장했고 김정은의 경우 집권 후 약 13년 만에 김정은주의, 김정은시대라는 표어가 등장했습니다. 김정일에 비하면 자기 이름을 붙인 사상과 시대라는 표현 등장이 좀 늦은 면이 있습니다.
사실 별로 특이한 것이 없어 보이지만 과거 선대의 이름이 붙은 김일성주의, 김정일주의 또 김일성시대, 김정일시대에 비해 새로 등장한 김정은주의, 김정은시대… 무슨 차이가 있을까요?
김지은 기자 : ‘김정은시대’와 ‘김정은주의’는 2024년 5월경 북한 매체에서 집단적이고 반복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이는 분명 북한 체제 내에서 의미 있는 정치적 사건입니다. 언뜻 보면 김일성주의–김정일주의와 연속 선상에 있는 듯하지만,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1990년 초중반 등장한 김정일주의는 김정일이 집권 이후 바로 등장했습니다. 김일성 사망 이후 권력의 공백과 혼란을 줄이기 위해 빠르게 김정일의 사상과 영도력을 신격화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반면에 김정은주의는 집권 13년이 지난 뒤 공식화했는데 스스로 어느 정도 성과를 축적한 뒤 그 자신감 위에 ‘김정은주의’를 내놓은 것으로 보입니다.
또 내용적으로도 차이가 있습니다. 김일성주의는 항일무장투쟁과 반제민족주의를 기반으로 주체사상을 신격화시킨 것이고 김정일주의는 선군주의를 핵심축으로 합니다. 그러나 ‘김정은주의’는 잘 뜯어보면 ‘주의’,’사상’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내용이 없습니다. 사상적 핵심이나 이론적 틀을 명확히 제시하지 못하고 ‘인민대중제일주의’라는 구호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김일성,김정일 주의와 김정은 주의는 차이?
사실상 김정은주의는 ‘통치 철학’보다 ‘통치 성과에 대한 주장’에 가깝습니다.
특히 김정은시대는 오늘 시간에 다루는 담화문에서는 ‘계승’을 주장하지만 사실상 ‘새로운 시대의 개막’, 자기 시대의 창조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회주의’라는 큰 틀에서도 비교할 수 있습니다. 과거 김일성 시대에는 그나마 러시아, 중국 등 구라파 사회주의권이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나라들에서 사회주의의 허상을 국가적 실험을 통해 경험하고 나서 자본주의로 전환했습니다. 북한은 이를 배반이라는 용어를 들어 비난했습니다. 러시아가 자본주의제도를 도입하자 사회주의의 깃발을 내리고 자본주의에 투항한 것이라고 선전했죠. 그리고 세상이 열백번 변해도 사회주의를 지키겠다,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 사회를 고수해야 한다며 주민들을 추동했습니다. 하지만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를 주창한 북한에 지금 사회주의가 있습니까. 자본주의 사회를 비난한 모든 현상이 현재 북한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병원에 가도 돈을 내야 치료를 받을 수 있고 돈이 없으면 병이 나도 약 한 알 사먹지 못해 죽어야 하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은 10살부터 하고 싶은 공부를 뒤로 하고 매년 농촌에 동원되어 봄과 가을에 2달 정도 일해야 하는 곳입니다. 노동자들은 일해도 한 달에 식량 3kg도 구입할 수 없을 정도의 월급을 받는 것이 바로 ‘김정은시대’입니다.
진행자 : 저희가 오늘 다루는 것이 당 창건 79주년 담화였고, 이제 80주년을 앞두고 있습니다. 79주년보다는 정주년인 80주년의 의미가 훨씬 클 것으로 보입니다. 올해 중요한 담화 등이 나온다면 아마 10월쯤이 될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어떤 내용들이 나올 것으로 예상할 수 있을까요.
김지은 기자 : 북한은 최근 당 창건 80돌을 맞으며 전당, 전민, 전군에 ‘위대한 김일성-김정일주의 국가건설사상’을 학습시키기 위한 사상열풍을 세차게 일으키고 있습니다. 아마도 10월 10일 당 창건 80돌을 계기로 새로운 담화가 발표될 것으로 짐작됩니다. 한쪽으로는 김일성에 주어진 태양의 권위를 삭제하도록 지시하고 김정은 자신이 태양의 지위에 오른 상황에서 이러한 학습 열풍은 오히려 주민들의 반감을 살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또다시 인민대중 중심의 사회주의를 곱씹으면서 사회주의 집권당이 진정한 어머니 당으로서 인민을 위하여 멸사 복무하는 참된 충복이라는 기조의 선전성 담화문이 나올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인민을 하늘처럼 믿고 인민을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친 선대 수령들의 이민위천 숭고한 사상과 뜻을 계승하고 높이 받들어 나가기 위하여 주체의 인민관, 인민철학을 당과 국가활동에 구현하는 것을 최대의 중대사로 하겠다고 다짐할 겁니다.
수십 년 선전의 방식으로 인민을 자신의 두리에 묶어 세우려고 하겠지만 이제는 현실로서의 노선을 증명해야 할 때입니다. 거듭되는 담화문은 주민들에게 희망이 보이지 않는 김정은 시대에 대한 피로감과 불만만을 가중시킬 뿐입니다.
진행자 : 네,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김지은 기자 수고했습니다.
김지은 기자 : 감사합니다.
진행자 : 지금까지 진행에 안창규였습니다.
에디터 : 양성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