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마니아 여성 미르초유 “47년 만에 북한에서 온 남편 소식이…”

1962년 헤어진 북한인 남편을 기다리던 루마니아 여성이 최근 북한 당국으로부터 남편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루마니아 여성인 조르제타 미르초유(Georgeta Mircioiu) 씨는 47년 만에 남편의 사망 확인서를 받았지만 남편에 대한 희망의 끈을 결코 놓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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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경 기자가 보도합니다.

(루마니아어 통역: 그렉 스칼라튜 루마니아 출신 언론인)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의 겨울이 다 지나갈 무렵인 지난 3월 마지막 주의 어느날, 올해 75살의 미르초유 할머니가 사는 작은 아파트에 전화 벨소리가 울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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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연애시절의 조르제타 미르초유(Georgeta Mircioiu) 할머니와 남편 조정호씨 - PHOTO courtesy of alto &base company (PHOTO courtesy of alto &base company)

루마니아 외무부에서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도암나 미르초유 씨 댁입니까?”

“네 그렇습니다.”

“남편의 기록을 찾았습니다. 북한 인민보안성에서 남편께서 2004년 8월 13일에 사망하셨다는 확인서를 보냈습니다. 외무부에 잠시 오셔서 사망 확인서를 받아가십시오.”

미르초유 할머니가 그토록 기다리던 북한인 남편 조정호 씨의 소식을 듣는 순간이었습니다. 미르초유 씨가 1962년 남편과 헤어진 후 50여년 동안 남편의 생사확인을 위해 포기하지 않고 노력한 결실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르초유 할머니는 북한 인민보안성의 도장까지 찍힌 남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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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받았음에도 남편이 살아 있을지 모른다는 희망을 버릴 수 없다고 말합니다. 북한 당국은 과거에도 허위로 기재된 남편의 사망 확인서를 발급한 전례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몇 줄의 서신으로 남편의 사망을 받아들이기에는 남편을 향한 그리움의 세월이 길었다고 말합니다.

미르초유 할머니가 북한인 남편 조 씨를 처음 만난 때는 한국 전쟁이 일어난 직후인 1952년입니다. 당시 남편 조 씨는 북한의 전쟁 고아들을 이끌고 위탁 교육을 위해 루마니아로 파견된 책임 교사였습니다. 남편 조씨가 수년간 위탁교육을 도운 고아는 3,000명에 이릅니다. 같은 시기 미르초유 할머니는 사범대학을 갓 졸업한 후 조씨가 책임 교사로있던 루마니아 내 조선인민학교로 발령을 받았고 그곳에서 두 사람은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당시 남편의 모습을 이렇게 기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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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마니아 여성인 조르제타 미르초유 씨가 생이별 47년 만에 북한으로부터 받은 남편의 사망 확인서.미르초유 씨 제공

미르초유: 남편은 아이들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성실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쉬는 시간에도 아이들과 함께 운동을 하며 늘 봉사하는 분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 있어도 화를 내지 않고 인내심을 가지고 해결하려고 했지요. 저와 남편은 토요일이면 같이 춤을 추러 가기도 했습니다. 춤을 추는 파티에서 케잌도 함께 먹으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어느날 남편은 부모님께 저를 소개하고 싶다면서 편지로 청혼을 했습니다.

두 사람의 국경을 초월한 사랑은 국제 결혼에 부정적이었던 루마니아와 북한 정부의 허가를 받아냅니다. 마침내 북한인 조씨와 루마니아인 미르초유 씨는 1957년 두 나라의 정식 허가를 받아 같은해 4월 12일 루마니아의 수도 부카레스트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립니다. 두 사람은 이후 함께 평양으로 이주해 그 사이에 태어난 딸 미란과 행복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1962년 1살 반 된 딸 미란이가 칼슘과 영양 부족으로 치료를 받기 위해 루마니아로 일시 귀국하면서 이들 부부는 긴 이별을 맞게 됩니다. 북한 당국은 딸의 치료를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가려는 미르초유 씨에게 다시 비자를 내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루마니아 주재 북한 대사관은 남편 조씨가 갑자기 사망했다, 실종됐다라는 이유를 반복적으로 주장하며 미르초유 씨의 북한 입국을 막았습니다.

다행히 미르초유 할머니는 남편의 친척을 통해 남편과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만날 날을 기다리며 편지로 소식을 이어갔지만 1966년부터 편지마저 끊기게 됩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받은 남편의 편지에서 남편이 평양에서 지방 학교로 보내졌다가 다시 탄광으로 보내져 노역을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고 기억합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남편이 편지에서 조국과 당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탄광에서 일한다고 설명했지만 자신과 결혼한 일이 이유가 됐을 거라며 미안하다고 말합니다.

미르초유: 남편은 마지막 편지에서 가족이 다시 만나는 일은 자신의 의무라고 말했습니다. 남편은 자신이 탄광에서 열심히 일하면서 최선을 다하면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날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그것이 남편의 바람이며 의무라고 강조했습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지난 50여년 동안 남편의 소식을 듣기 위해 안해본 일이 없습니다. 루마니아 주재 북한 대사관을 수없이 찾아가 북한 대사관의 직원들과 친분이 있을 정도입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남편이 살아 있으면 만나게 해달라고, 죽었다면 아내로서 유골이라도 확인하게 해달라고 북한 대사관 측에 끊임없이 요구했습니다. 그때마다 북한 대사관 측에서 돌아온 답변은 사망과 실종, 생존, 사망 등으로 매번 달랐습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루마니아 외무부에도 진정서를 수십차례 보냈습니다.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할 수 있을까 한국의 대한적십자사의 문을 두드려 보기도 했습니다. 유엔과 앰네스티 인터내셔널(AI)에 탄원서도 써서 보냈습니다. 하지만 미르초유 할머니에게 돌아온 답변은 없었습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2월 미르초유 할머니는 다시 루마니아 외무부를 찾아가 진정서를 접수했습니다. 진정서에는 남편이 살아있다면 여생만이라도 함께 지낼 수 있게 해 달라고 호소하는 내용을 담았습니다. 그리고 진정서를 접수한 지 한달만인 3월 말, 북한 인민보안성은 루마니아 외무부 측에 조정호 씨의 생사확인 요청에 사망 확인서를 보냈습니다.

사망 확인서
이름: 조정호, 성별:남자, 생년월일 1926년 1월 23일,
국적: 조선, 거주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함경남도 정평군 용흥리,
사망일자: 2004년 8월 13일
상기 성원이 위와 같이 사망하였음을 확인합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인민보안성 대외사업국
주체 98(2009)년 3월 17일

미르초유 할머니는 북한 당국이 발급한 사망 확인서를 믿을 수는 없지만 남편이 살아 있다면 고령의 나이이기 때문에 북한의 주장처럼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합니다. 남편이 고령으로 사망했다고 해도 여전히 미르초유 할머니는 궁금한 점이 많습니다.

남편이 어떻게 살다가 왜 사망했는지 그리고 자신이 이제 48세가 된 딸 미란을 평생 혼자 키우며 남편을 그리며 살았던 것처럼 남편도 자신과 딸 미란을 그리워했는지 알고 싶다고 말합니다.

미르초유 할머니에게 또 다른 소망이 생겼습니다. 살아 생전에 북한을 방문해 남편의 흔적을 직접 찾아보는 일입니다. 미르초유 할머니는 루마니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무너진 지 20여년이 지난 지금 루마니아 정부가 자신처럼 힘없는 여성의 진정을 받아들여 외국인 남편의 생사를 확인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북한도 언젠가 자신의 입국을 받아들이고 남편이 살았던 지역을 방문해 남편의 발자취를 확인할 수 있는 날이 올 거라고 미르초유 할머니는 굳게 믿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