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가 본 북한] ④ 변해 가는 주민들 “그깟 당증이 뭐 필요하나”

난민 인정을 받아 최근 미국에 온 탈북자 서 모 씨는 중국에서 강제 북송을 두 번 당하고 구사일생으로 재탈북에 성공해 지금은 미국에서 아내 그리고 두 아들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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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서 씨가 목격한 북한의 변화 마지막 순서로 '종이 쪼가리가 돼버린 조선노동당원증'편을 보내드립니다.

이진서 기자가 보도합니다.

서 씨가 두 번째 강제 북송을 당했던 2004년, 서 씨는 북한에서 사회적 신분을 말해주는 당증을 대하는 주민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점을 발견합니다.

서 씨:

우리 사는 농촌에선 반장이나 분조장하는 것을 출세라고 생각하고 초급당 비서에게 뇌물을 주고 입당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국경에선 당증이라고 하면 ‘당증해서 뭐하는가, 쌀이 나오니 돈이 나오니 가까운 사이에선 이런 말이 나돌 정도였습니다. 옛날하고는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비에 젖을까 기름종이에 둘둘 말아서 금속 곽에 넣은 후 또 가죽 지갑에 넣어 허리춤에 차고 다닌다는 당원증. 집에 불이 나면 김부자의 초상화와 함께 제일 먼저 챙겨 나오는 이 당증이 언제부터 인가 찬밥 신세가 됐습니다. 물론 일부 국경에 사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겠지만 분명 주민들이 더는 당만 바라보고 살지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입니다.

북한의 하층부에서 시작된 변화는 미미하지만 상층부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을 생활총화의 모습을 통해서도 느낄 수 있었다고 서 씨는 말합니다.

서 씨:

노동당원들의 생활총화는 계속 그대로 하는데 근로단체 나처럼 농군맹이나 사로청원들은 다른 날은 하지 않고 월 총화나 3개월에 한 번 몰아서 하는 분기총화나 할 따름이지 생활총화는 그저 대충 하면서 그저 이상 없이 잘 했다고 위원장이 거짓말을 하고 근로단체 책임자가 우리 생활총화 했다고 하자, 누가 뭘했다고 적고 간략화 했습니다.

노동자는 일주일에 한 번, 농민은 열흘에 한 번 하던 북한 생활총화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없어지진 않았지만 건성건성한다란 말은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해진 북한의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서 씨는 말했습니다. 주민들은 또 해외에서 식량원조나 지원이 들어가면서 그동안 당국에서 통제하던 외부 소식에도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물론 드러나지 않게 가만가만히 말입니다.

서 씨:

아들이 말하는 데, 정전이 됐는데 날씨를 안다는 겁니다. 날씨를 안다는 것은 방송을 들었다는 건데 들을 만한 방송이 없단 말입니다. 정전이 됐거든요. 방송을 듣는다면 분명히 남한 방송을 듣는 겁니다.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보고 느꼈는데 표면상으로는 보위부 감시 정치랑 다 이어지는데 사람들 의식 변화는 있는 것 같습니다. 확실합니다. 그 다음 우리 노동자들은 국경으로 또 중국에 갔던 사람들을 통해서 비디오가 전달됩니다. 북한에서 미국 영화는 크게 문제시 하지 않는데 남한 영화는 문제시합니다.

서 씨가 말하는 미국 영화는 주로 전쟁물이나 조직 폭력배들이 싸우는 류의 영화를 말한 겁니다. 서 씨는 북한 사람들이 아는 남한의 현실은 자동차를 만들고 경제적으로 월등히 앞섰다는 정도지 그 이상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북한 주민들 사이에는 미국에서 하는 자유아시아방송 (RFA)을 듣는 사람이 있으며 외부에서 만든 영상물이 비밀스럽게 돌고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서 씨:

확실히 돕니다. 나도 말을 들었습니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이 그렇게 말했고 우리 마을에도 중국에서 색텔레비(컬러텔레비전)를 산 사람 DVD 산 사람이 많은데 우리 아이들이 그 사람 아들하고 섞여서 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을 들은 겁니다. 그것도 초급당 비서나 보위부 사람하고 가까운 사람은 뇌물을 써서 눈감아 주는데 보통 사람들은 무자비하게 처리하죠.

서 씨 말에 의하면 지금도 탈북자는 강제북송을 당하면 민족의 반역자란 죄명으로 노동단련대나 정치범 수용소엘 가야합니다. 북한의 정치 제도나 체제에는 변함이 없고 못살고 굶주림에 시달리는 것도 똑같았지만 탈북하기 전 서 씨가 북한 땅에서 목격한 것은 이제 북한에도 서서히 변화의 물결이 주민들 사이에서 일고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서 씨는 자신도 언젠가는 고향마을 백암을 그리워할지 모르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고 고백합니다.

서 씨:

다시는 북한 땅을 돌아보고 싶지 않습니다. 너무나 속아 살았던 분노 때문입니다. 난 아버지때부터 속아 살았습니다. 아버지가 한국에서 김일성 따라 혁명한다고 북한에 갔는데 김일성이 사람 데려 갔으면 사람 대접을 해줬어야지 죄도 없는데 양강도 갑산으로 쫓아 버리고 난 인민군대로 못가고 난 남만큼 공부을 했는데 대학도 못갔습니다. 난 북한 정부에 원한이 많습니다.

탈북자 서 씨는 미국의 인권단체 ‘318 파트너스’ 스티브 김 대표의 도움으로 라오스에서 8개월 만에 미국 난민 인정을 받아 올해 6월3일 미국 생활을 시작했습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