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북한인권법 제정이후 미국에 입국한 탈북난민의 숫자는 꾸준히 늘어 올해 100명을 넘어섰습니다. 자유아시아 방송은 미국에 정착한 탈북난민 100명 시대를 맞아 그들의 삶과 희망을 조명해보는 특별 기획을 방송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태어나서부터 ‘원수의 나라’라고 여겼던 미국에서 희망을 꿈꾸며 살아가는 탈북자 김씨의 ‘아메리칸 드림’을 전합니다.
이수경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미국의 수도 워싱턴 디씨에서 서쪽으로 자동차로 약 3시간 거리에 위치한 버지니아의 어느 작은 도시. 이 곳에 탈북자가 보금자리를 꾸렸다고 해서 찾아갔습니다.
나무가 울창한 전망좋은 길을 따라 쭉 늘어선 아담한 단독주택 사이에서 단정한 차림의 신사가 환한 미소를 띈 채 나타났습니다. 그는 지난 2008년 6월 난민의 자격을 인정받고 미국땅을 밟은 탈북자 김철남(가명, 40세) 씨입니다.
김씨는 미국에 입국한 그해 스시를 만드는 기술을 습득해 근처 대학 내 식당에서 일자리를 찾았고 당당하게 자립했습니다.
북한과는 말도 문화도 완전히 틀린 미국에 와서 경제적으로 자립하기 어렵지 않았냐는 질문에 김씨는 북한에서 10년 넘게 보낸 특수부대에서의 온갖 경험이 여기서 도움이 될 줄은 몰랐다며 웃었습니다.
김철남: 스시는 잘 몰랐지요. 그냥 김밥이라고 알았지요. 어느날 정착 생활을 도와주던 미국 단체에서 스시 기술자 자리가 있는데 할 수 있냐고 문의했습니다. 그날부터 24시간 공부해서 합격했습니다. 내가 옹진에서 13년 특수부대 생활을 했는데 그곳은 미역과 김이 많은 지역입니다. 거기서 김을 많이 다뤄봤고 김밥도 많이 말아 먹었지요. 그때 경험을 살려서 인터넷을 통해 일본 사람이 스시 만드는 것을 보고 해보니 똑같았습니다.
김씨가 대학 식당에서 스시를 만든 것도 벌써 2년. 그는 어느새 학생들 사이에서 북한에서 온 스시맨이라고 소문이 났다고 자랑합니다. 북한 문제에 관심있는 학생들은 북한과 관련한 무슨 사건이 터질때마다 곧바로 식당으로 찾아와 김씨와 의견을 나누기도 하고 북한의 실정을 알고 싶어하는 교수들도 종종 김씨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때마다 고마운 것은 말이 잘 통하지 않는 김씨를 위해 통역을 도와주는 한국 학생들이라고 말합니다.
김철남: 전문 스시집처럼은 못 만들지만 대학내에서 부페식입니다. 너무 맛있다고 해서 이틀동안 400명 어치를 만들어야 합니다. 아파서 어쩔 때는 안 나가기도 합니다. 학교에서 북한에 대해서 묻는 학생들과 교수들도 많아요. 몇번을 만나자고 연락이 왔습니다. 그러면 당신들이 필요하면 나를 찾아와라 내 시간에. 그렇게 요구합니다. (한국 학생들도 있지요?) 제가 어쩔때 통역이 필요하면 한국 학생불러서 통역도 부탁하고.
대학 식당이라는 특성때문에 쉬는 날도 꽤 많습니다. 학생들이 수업이 없는 주말과 방학 동안엔 일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김씨에게 시간적 여유는 용납되지 않나 봅니다. 김씨는 주말은 물론 방학에도 온갖 부업을 하며 잠시도 쉴 틈이 없습니다.
김씨를 찾아간 그 날도 뒷 마당에 커다란 나무 상자가 여러개 널려 있었습니다. 미국 군대에서 폭탄을 운반했던 상자라며 잘 손질하고 페인트를 다시 칠하면 수납상자나 기부상자 용도로 다시 되팔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김씨는 비단 스시를 만들고 페인트를 칠하는 기술만 가진 것이 아닙니다. 언제 배웠는지 신발도 수리하고 풀도 깍고 나무 다듬는 정원관리 기술도 수준급입니다.
쉬지 않고 꾸준히 일한 김씨의 노력 덕분에 지금은 수입이 안정되어 부인과 맛있는 음식도 즐기고 해외 여행도 다니고, 일본산 새차도 구입하는 등 경제적 여유를 가졌습니다.
무엇이 이처럼 김씨의 빠른 자립을 도왔을까? 물론 김씨 스스로의 노력과 자신감이 가장 큰 이유지만 김씨는 지원보다 자립을 유도하는 미국의 난민 정책도 한몫했다고 지적합니다.
김철남: 정부에서 지원을 별로 안해주는 것이 아니라 아예 안해줍니다. 북한 사람에게만 그런 것이 아니라 세계 어느나라 난민들에게 다 똑같습니다. 그리고 그런 도움은 바라지도 않습니다. 어렵게 여기 왔는데 여기서 또 정부한테 돈 달라고 하는 거 싫습니다. 솔직히 우리가 미국땅에 와서 집 한채를 지어줬나요. 도로 청소를 한번 해주었나요. 아니면 나무 하나 심었습니까? 북한에서 미제 승냥이라고 때리라는 소리만 했는데 이렇게 자기 나라를 싫어하는 국가에서 온 사람들을 받아주고 먹여주고 입혀주고 그것만으로도 그 이상 더 고마운 것 없습니다.
물론 어려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김씨는 미국에 산지 2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영어를 알아듣기 힘들다고 토로합니다. 틈틈이 텔레비전과 책을 보며 영어를 공부하고 있지만 해외 경험이 전혀 없는 김씨에게 간단한 영어 한마디도 어렵다는 설명입니다. 그리고 고향을 떠나 가족과 떨어져 사는 게 외로운 것도 사실입니다.
김철남: 외롭다는 것은 말도 못합니다. 일생을 외롭게 산다는 것은 뭐라 표현할 수 없지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래도 부인이 같이 있으니까 아이도 생길거고 집도 살거고 .. 미래가 있습니다.
김씨의 말처럼 언어도 안통하고 머나먼 북한에 가족도 두고 왔지만 그에게는 미국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습니다. 바로 탈북과정에서 만난 현재의 부인과 가족을 이루어 자손들에게 좋은 환경을 물려주는 일입니다. 식량난도 없고 신분차별도 없고 생활총화도 없는 미국 땅에서 궁전같은 집을 짓고 질 좋은 교육과 이웃과의 사랑을 경험하며 자녀를 낳아 잘 키우는 것이 김씨의 소망입니다.
김철남: 후회는 없습니다. 어차피 와야할 길을 왔습니다. 어차피 한번은 왔어야 하는 길입니다. 세상을 한번 봐야지요. 그곳에서 생활총화하고 조직생활만 하다가 죽을 수는 없지요. 평화는 이곳에 있는 것 같습니다.
김씨는 미국에 정착하는 북한인 1세대로서 책임감도 느낀다며, 세계적으로 드물게 이상하고 특별한 나라에서 온 탈북자인만큼 후세들에게 본보기가 될 수 있도록 꿋꿋하게 살아 갈 것이라고 다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