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 폰사로사 나무 곁에 가면 과자 냄새가 많이 납니다. 폰사로사 나무가 껍질이 벗겨지고 향기를 내려면 한 세기가 넘는 110살이나 120살이 되어야 한답니다.
미국에서 거의 반세기를 국민에게 큰 영향을 준 활동을 한 에드워드 케네디 연방 상원의원이 며칠 전에 뇌종양으로 숨졌습니다. 그가 숨지자 거의 모든 미국 사람이 그의 죽음을 아쉬워하고 명복을 빌고 있습니다. 정치인 에드워드 상원의원이 한 좋은 일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오늘의 미국이 있게한 데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기 때문에, 또 뇌종양 치료를 받다가 자신이 더는 살 수 없다는 걸 안 뒤에도 그는 끝까지 멋지게 살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을 여러분께 전해 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분이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동생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을 알고 계실 텐데요, 이 두 사람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의 형들입니다. 케네디 가문은 아버지 때부터 아들들, 또 그 후손까지 많은 사람이 정치나 공공봉사를 해왔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정치인들이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로버트 케네디 법무장관, 그리고 에드워드 케네디 연방 상원의원입니다. 형 두 명은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훌륭한 정치인이었지만 두 사람 모두 40대에 암살당했고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은 47년 동안 미국의 큰 정치인으로 일하다가 며칠 전에 숨졌습니다.
미국 의회는 상원과 하원이 있고 의회를 움직이는 주요 정당은 민주당과 공화당입니다. 상원과 하원은 만드는 법안이 다르고 민주당과 공화당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같겠지만, 미국이라는 나라를 가꿔가는데 우선순위나 방법이 다릅니다. 민주당은 진보적이어서 공화당보다는 가진 것 없는 사람, 힘없는 사람의 입장에 서게 되고, 공화당은 보수적이어서 안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게 서로 다릅니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민주당 상원의원이었습니다.
1962년 에드워드 상원의원이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상원의원이 되자 세계적인 신문 뉴욕 타임스는 사설에서 상원의 품위가 떨어졌고 미국의 민주주의가 후퇴했다고 평했습니다. 그러나 47년이 지난 2009년 8월 27일 뉴욕 타임스는 미국 최고의 정치가였다고 평했습니다.
그 사이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 의원은 인간적으로도 정치적으로도 다른 사람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자면서 가난한 사람을 생각하고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안다는 게 쉽지 않을 텐데 케네디 의원은 부자 가문에서 정치인이 됐지만 가난한 사람들이 일하고 돈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남자면서 여성의 권리를 챙기기가 서구 사회에서 쉽지는 않았을 때부터 그는 가족이 아프면 여성이 당당히 직장을 쉴 수 있도록 했습니다. 케네디 가문이 큰 부자였지만 그래도 과거에 차별받던 아일랜드계였기 때문에 인종 차별을 없애려고 힘썼고 집안 종교가 미국 정치계에서는 드문 가톨릭이기 때문에 종교차별도 없애는데 앞장섰습니다. 한인을 포함한 이민자들에게도 좋은 법을 만들었고 아일랜드를 포함해 세계 평화에 앞장섰습니다. 전쟁을 반대해서 이라크 전쟁은 조지 부시 대통령의 베트남 전쟁이라면서 전쟁 시작할 때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젊었을 때는 여자문제도 많았고 술도 지나치게 마셨으며 관련된 문제로 형의 뒤를 이어 대통령이 되려던 꿈은 포기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대통령이 되길 포기한 뒤에 길면 8년 대통령이 아니라 47년 계속 국민이 뽑아준 상원의원으로 많은 힘없는 국민을 위해 일하다가 행복하게 숨졌습니다. 몇 년 전 미국 의회에서 미국의 국기 성조기를 불에 태우지 못하도록 하는 법안이 심의될 때 그는 열심히 일하는 보통 사람들에게는 자동차 연료비나 처방약 값, 등록금이 성조기를 태울 표현의 자유가 있느냐 없느냐보다 중요하다고 말했습니다.
민주당이면서도 공화당 의원들과 함께 법안을 만들었고 합의를 할 때는 민주당 지도자로서 민주당 후배 정치인들에게 양보도 하도록 설득한 사람입니다. 오늘의 적이 내일 동지가 되는 정치세계의 이치도 잘 안 사람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 그가 숨지자 민주당은 물론이고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부인인 낸시 레이건 여사, 조지 부시 대통령 등 수많은 공화당도 그의 죽음을 슬퍼하고 장례식에 참석할 예정입니다.
보수적인 공화당 오린 헤치 상원의원은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이 뇌종양 치료를 본격적으로 받기 위해 의사당을 떠나 집으로 갈 때 그에게 선물하는 노래를 만들었을 정도입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백인 부자 가문 출신인 그가 대통령 선거에서 흑인 버락 오바마 후보를 지지해 그가 대통령이 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입니다. 오바마 대통령이 탄생하면 미국이 흑인 노예에게 저질렀던 잘못된 역사의 어느 부분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본 사람이 에드워드 케네디 의원입니다. 물론 아직 큰 정치인은 아니지만, 자신의 아들도 하원의원이고 많은 또 다른 케네디 가문의 사람들도 있는데 그는 케네디 가문의 큰 정치 흐름 이어가기보다는 미국의 앞날을 위해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선택했다고 생각합니다.
인간 에드워드 케네디의 모습을 보면 많은 미국 사람들이 '나도 그 사람처럼 숨져가야지'라고 말합니다. 지난봄부터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자 늘 사랑하는 사람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밥을 먹고 좋아하던 아이스크림을 더 자주 먹고 예뻐하는 강아지와 공놀이도 더 많이 하고 , 기분이 좋은 날이면 케네디가의 많은 사람이 즐기던 보트 타기도 했습니다. 그가 숨지기 전에 가장 많이 한 말은 '나는 정말 멋진 인생을 살았습니다' 입니다. 그의 바람기를 잠재운 사람이 1992년에 결혼한 지금의 아내인데 그 아내와 케네디 의원의 자녀는 케네디 의원이 어느 의사가 생각했던 것보다 오래 살았기 때문에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장례식에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많은 미국 사람들은 장례식에서 통곡하지 않습니다. 가는 사람이나 보내는 사람이나 대부분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입니다. 잘 살다 간 사람에 대해서, 그의 인생에 대해서 축하하기도 합니다. 에드워드 케네디 상원의원처럼 젊었을 때의 미숙함과 실수를 나이가 들면서 고쳐가며 다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모든 힘을 다해 한 사람은 더욱 그렇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미국 대학 가운데 웰슬리 대학( Wellesley college)이 있습니다. 웰슬리 대학이 올가을 학기부터 다른 학교와 강의를 함께합니다. 강의를 함께한다는 건 웰슬리 대학 학생들이 다른 대학교에 가서 그 학교 교수의 강의를 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웰슬리 대학과 함께 이런 교육을 하게 될 대학교는 후랭클린 W. 올린 대학 (Franklin W. Olin college)과 밥슨 칼리지(Babson College)입니다. 이 세 학교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고 학교의 특징이 다릅니다. 웰슬리 대학은 인문사회학이 강하고 후랭클린 W. 올린 대학은 엔지니어 계통이, 밥슨 대학은 경제가 강한 대학입니다.
세 대학의 총장들은 어느 한 학교 교육으로는 21세기에 이상적인 교육을 시키기에 모자란다고 믿고 서로 강한 분야를 나누기로 한 겁니다. 세계의 문제를 풀기에도 세 대학의 좋은 점을 합치는 게 좋다는 결론입니다. 웰슬리 대학 학생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보다 현실에 맞게 발전시킬 수 있고, 후랭클린 W 올린 대학 학생들은 밥슨 대학에서 자신이 개발한 기술을 어떻게 사업으로 연결할 수 있는지를 배우고 , 밥슨 대학 학생들은 웰슬리 대학에서 환경에 좋은 사업 결정을 내리는 데 필요한 철학 등을 배우게 되는 식입니다. 미국 대학끼리뿐이 아니라 최근 세계 최고의 대학으로 인정받는 하버드와 남한 최고 대학인 서울 대학교도 서로 협력하기로 합의했습니다. 이제 교육도 한 학교, 한 나라 안에서 다 이뤄지지 않는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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