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기억과 진실 ①] 인천상륙작전 시작을 알린 팔미도의 등대불

6.25 한국전쟁, 과연 잊혀진 전쟁인가, 그 답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전쟁입니다. 전쟁을 기억하는 한 전쟁은 쉽게 찾아오지 않고 전쟁을 잊어버리면 전쟁은 다시 돌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59년이 지난 한국전쟁은 지금도 끝나지 않았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6.25 한국전쟁 59주년을 맞으면서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 잊혀질 수 없는 한국전쟁을 되돌아 보는 특집을 24일부터 26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보내드립니다.

0:00 / 0:00

오늘은 첫 순서로 인천 앞바다에서 인천상륙작전의 개시를 알렸던 팔미도의 현장 취재를 통해 당시 치열했던 포성의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인천 연안부두에서 배로 50분 거리에 있는 팔미도는 한국 최초의 등대가 있는 섬으로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린 등대로 알려져 있습니다.

palmido_lighthouse-200.jpg
한국전쟁 때 인천상륙작전의 시작을 알린 팔미도 등대. (RFA PHOTO/노재완)

올해로 건립된 지 106년이 된 팔미도 등대는 군사작전지역으로서 그동안 일반인에게 개방되지 않았지만, 2009년 인천방문의 해를 기념해 106년 만에 일반인에게 개방했습니다.

유람선 강 팀장: 앞쪽에 보이는 섬이 팔미도입니다. 작은 만한 섬입니다...

지난 21일 오전 11시 인천 연안부두에서 유람선을 타고 출발한 뒤 50분 만에 인천항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진 팔미도에 도착했습니다.

유람선에서 팔미도 전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섬 꼭대기에 하얀 등대와 해군 막사가 보여 이곳이 군사지역임을 알게 했습니다.

팔미도 등대에는 당시 특공대원의 공적과 아울러 이 작전에서 희생된 켈로 대원들의 젊은 넋을 기리기 위해 기념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이날 휴일을 이용해 팔미도 관광에 나선 관광객들은 대부분 나이든 어른들이었습니다. 그렇지만 1950년 한국전쟁에서 팔미도의 등대 탈환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으로 이끄는 초석이 됐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시민1: 정확히는 잘 몰랐어요. 인천상륙작전의 도화선이 됐다는 사실도 몰랐습니다.
시민2: 나도 팔미도 등대의 내용은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시민3: 등대에 대해서 여기서 알았습니다. 팔미도 섬이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시민4: 그냥 처음엔 집사람이 경치가 좋고, 100년 만에 개방됐다고 해 한번 가보자 해서 왔는데요. 그런 역사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돼서 저한테는 이곳에 잘 왔구나는 생각이 듭니다.

인천상륙작전은 북한의 인민군에게 일방적으로 밀리던 남한의 국군에게 결정적인 역전의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그러나 인천의 바다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해서 상륙작전을 할 수 없는 지형이었습니다. 유엔군 총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참모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에서 수집한 정보를 토대로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합니다.

미국 정보원들이 해방 전 한반도에 주둔했던 일본 군인들을 통해 알아낸 정보는 이랬습니다. 9월 15일에는 인천의 수심이 50년 만에 간만의 차가 가장 심할 때라는 사실.

당시 많은 사람이 맥아더 장군이 상륙작전을 할 거라고는 짐작했지만, 그곳이 인천이 될 줄은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웬만한 사람들은 상륙작전이 수심이 깊은 동해 원산이 될 거로 추측했습니다.

1950년 8월 중순은 북한의 인민군 대부분이 전투력을 낙동강 전선에 집중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민군을 효과적으로 격파하기 위해서는 낙동강보다 서울에 있는 인민군 병참선 중심부를 타격하기 위한 상륙작전이 필요하다고 결심하게 됩니다.

손진 대한민국건국회 명예회장은 인천상륙작전의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손진: 그때가 대한민국이 가장 위험할 때입니다. 김일성은 낙동강 전선에서 조금만 더 하면 대한민국을 부산 앞바다에 내몰 수 있었죠. 그때 대한민국 영토라는 게 불과 경상남도 동부쪽에 7개군 만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3년 동안 전쟁을 했지만 가장 어려울 때가 1950년 인천상륙작전 바로 직전입니다.

당시 인천항 주변 영흥도를 중심으로 각종 첩보 활동을 펼쳤던 켈로 부대원들은 1950년 9월 10일 밤 발동선을 타고 들어가 팔미도 등대를 조사했습니다.

그래서 작전 지역을 인천으로 정하고, 북한군 수중에 있던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고 점등하려고 시도합니다. 팔미도 등대를 탈환하는 작전에 직접 참여했던 켈로 부대원 최규봉 씨는 당시의 팔미도 등대를 밝혀야 하는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choi_memorial-305.jpg
최규봉 씨가 속한 KLO 8240부대 전우회에서 세운 기념비. (RFA PHOTO/노재완)


최규봉: 당시 팔미도 등대를 밝히지 않으면 배가 인천항에 들어올 수가 없습니다. 밑에 암초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뱃길이 있는데, 팔미도 등대 옆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배 밑이 암초들 때문에 군함들이 들어 올 수가 없어요.

그리하여 맥아더 사령부는 흔히 켈로 부대로 알려진 미국 극동사령부 한국 연락사무소 부대의 대원들을 투입시킵니다. 그들은 1950년 8월 18일 밤 한국 해군함정으로 팔미도 인근의 영흥도에 잠입해 정보 수집을 시작합니다. 우선 굶주림에 시달리는 주민들에게 부산에서 가져 온 쌀을 배급하자 주민들은 정보원을 자청했습니다.

주민들이 파악하여 알아내거나 야간에 사진기로 찍어 온 인천도립병원이나 월미도, 아산만 일대의 정보와 사진 등은 인천에서 서울까지 포진한 적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인천항의 수심과 인근 해역의 해도 등이 작성됐으며, 후방의 맥아더 장군은 적이 상륙지점을 간파하기 어렵도록 다른 지역을 공습하거나 항공모함을 배치하여 교란작전을 펼칩니다.

이러한 사전 활동을 근거로 팔미도 탈환작전을 9월 15일로 정하는데, 이날은 50년 만에 조수 간만의 차가 가장 적어 원활한 상륙작전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며칠 전인 9월 10일 드디어 팔미도 등대를 확보하라는 명령이 떨어집니다.

9월 14일 밤 켈로 부대원들은 팔미도에 숨어들어 등대에 불을 밝혔습니다. 이로써 10만 명의 병력을 실은 구축함과 순양함 등 261척의 연합함대가 등댓불을 길잡이 삼아 팔미도 해역에 집결했고, 다음날 새벽에 상륙 작전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이로써 인민군은 퇴로를 차단당하고 고립되었으며, 국군과 연합군은 서울을 되찾고 북진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작전 시각은 정해진 시각보다 1시간 40분가량 늦은 새벽 2시 20분경이었으며 연합국 함대는 그때까지 기다리다가 등대를 길잡이 삼아 인천상륙작전에 돌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등대 탈환에 참여했던 최규봉 씨는 등대에 게양한 성조기를 맥아더 장군에게서 직접 포상으로 받았습니다. 성조기는 맥아더 원수가 직접 불러 “소원을 말해보라”고 해 팔미도 탈환작전 시 게양했던 성조기를 갖고 싶다고 말해 받은 것입니다.


최규봉: 그런데 내가 성조기를 갖고 있는데, 1954년부터는 그 성조기가 나한테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자들이 자꾸 팔라고 달려들었습니다. 만 달러부터 올라간 게 나중에는 10만 달러까지 갔습니다. 성조기는 그럴 수 없다고 해 팔지 않고 7년 만에 제가 맥아더 장군에게 (성조기를) 다시 보냈습니다. 그래서 맥아더 장군이 감개무량해서 저한테 ‘영원한 전우여’라는 친필 사인을 저한테 보내주었습니다.

맥아더 장군에게 다시 전달한 성조기는 지금 미국 버지니아 주 노퍽의 맥아더 기념관에서 소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에 대한 답례로 맥아더 원수가 최규봉 씨에게 보낸 사진과 감사장은 현재 인천의 인천상륙작전기념관과 서울의 전쟁기념관에 전시돼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의 특집방송 ‘6.25 한국전쟁’ 오늘은 그 첫 순서로 인천상륙작전의 개시를 알렸던 인천 앞바다 팔미도의 현장 편을 보내드렸습니다.

내일은 두 번 째 순서로 ‘삐라, 6.25의 기억과 진실’편이 방송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