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 번째에 나온 이름
[KBS 보도] 우리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백령도 인근에서 침몰했습니다. 승조원 46명이 아직 실종상태입니다.
[윤청자] 그날 밤 서해에서 배가 폭발됐다면서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내가 우리 영감님한테 “여보, 우리 평기가 서해 바다에 있어? 동해 바다에 있어?” 그랬더니 “평기가 서해 바다에 있지” 그러더라고. 그러면서 그 소리를 들으니까 가슴이 막 두근두근거리는거예요. 이상하게 그냥 막 마음이 불안하고 죽겠더라고요.
아들이 타고 있던 배의 사고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던 그날을 설명하는 어머니, 윤청자 여사의 기억은 또렷합니다.
[윤청자] 폭발해서 물기둥이 올라가는 것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더니 지금 배에서 생존자를 찾아서 건져내고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아이고 우리 평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냥 마음이 불안해요. 그러더니 한 두시쯤 되니까 생존자가 오십몇 명이 나오고, 바닷속에서 아직 찾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하더니 다섯 번째에 가서 ‘민평기’가 나오는 거예요.
[KBS 보도] 네. 우선 이 시간 실종자 46명의 명단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원사 이창기, 상사 최한권, 남기훈, 최정환, 민평기...
“아이고 어쩐다니. 여보, 아이고 우리 평기, 우리 평기 나왔어. 어떻게 하면 좋아.” 그때가 대여섯 시 됐어요. 그때가 추운 때였어요. 맨발로 팔팔 뛰어서 제가 은산 쪽으로 막 뛰어가는 거죠.

아직 아들의 생사를 모르는 어머니는 아들이 살아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지금 달려가면 아들을 찾을 것만 같습니다.
[윤청자] 그러니까 아들이 트럭을 타고 쫓아오더라고요. “엄마, 어디 가려고 그러시냐”고. “나야, 평기 건지러 가야혀, 평기 건지러 가야혀” 하고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맨발 벗은 채 가니까 우리 아들이 슬리퍼를 가지고 와서 그렇게 평택으로 갔어요. 아들이 “엄마, 집에 가서 옷이라도 따뜻하게 갈아입고 가자”고 했는데, “나는 싫다. 나 평기 건지러 가야혀”라고 하도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그냥 평택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렇게 도착한 평택 해군기지에서도 윤 여사는 아들을 찾으러 온 ‘민평기의 엄마’였습니다.
[윤청자] 거기서 공기를 넣어줘서 배 안에 있으면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희망에 얼마나 애가 터지는지, 애간장이 다 터지지. 6일까지는 희망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6일 후부터는 희망이 없잖아요. 그래서 팔팔 뛰고, 물 밑으로 건지러 가려고 하면 군인들이 따라와서 붙들고. 내가 가면 건질 것만 같아서 별짓을 다 해 봐도 안 되고. 나중에 사망자들을 건지는데, 금방 나올 줄 알았더니 한 달이 가도 안 나오잖아요. 애간장이 다 녹고…”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백발의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얼굴을 찡그릴 때마다 눈가의 주름이 더 선명해집니다.
[윤청자] 포장마차에 쓰는 포장막을 쳐놓더라고요. 46명이 나오면 거기에 깔라고. 그걸 보니 눈이 뒤집어지잖아요. 세상에 나라 지키다 간 애들을. 그래서 텐트를 다 부숴버렸지. 그리고 한 달쯤 있을 때 나오기 시작했어요.
[YTN 보도] 네. 34세. 부모님과 형이 두 명이 있으니까 세 아들의 막내, 아주 귀한 막내아들이었습니다. 2009년 2월부터 약 1년 2개월가량 천안함에서 근무를 해왔습니다. 민평기 중사 시신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이 속보로 들어왔습니다.

[윤청자] 나는 다 볼 줄 알았어요 . 그런데 우리 아들을 못 보게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나 봐야 한다"고 하니까 두어 시간 있다가 보여주더라고요. 그런데 태극기를 이렇게 덮어 놨더라고. 그리고 얼굴만 이렇게 내놨더라고요. (바닷속이) 얼마나 찬지 (얼굴이) 하나도 변함이 없더라고요. 얼굴이 그대로고, 몸이 붓지도 않았어요. 그 물이 얼마나 찬지.
한국의 천안함은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그토록 엄마의 기대주였던 민평기 상사를 포함한 46명의 용사와 함께 침몰했습니다.
갑자기 날아 온 총탄
1968년 1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항해 중이던 미군 정찰함 푸에블로호는 북한 초계정 한 척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됩니다. 전날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저희는 당장 빠져나와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출부터 정오까지 북한의 행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사이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배에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전투함이 아닌 푸에블로호가 갑자기 쏟아진 북한의 포격에 대응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푸에블로호에 탑승했던 제임스 켈 씨도 그날 바다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제임스 켈] 정보 수집 같은 거였어요. USS 푸에블로호는 간첩선이 아니었습니다. 50구경 기관총 두 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푸에블로호 선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적대적으로 보이기를 원치 않았고, 총과 탄약을 밧줄 아래 숨겨놨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북한군은 우리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고, 밧줄 아래 있던 총을 잡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맞서 싸우려면 밖으로 나가 밧줄들을 치우고 탄약통을 들고 와야 했으니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켈 씨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습니다.
[제임스 켈] 승무원 중 한 명인 드웨인 호지스가 당시 공격으로 숨졌습니다. 나는 그가 죽는 순간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쪽 다리와 복부의 일부를 잃었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1명~12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북한군은 우리 모두를 포로로 잡았고, 심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머피 씨와 켈 씨를 포함한 82명 승조원들의 11개월간 포로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제임스 켈] 우린 늘 두들겨 맞았고, 억류 기간 내내 심리적인 고문도 당했습니다. 또 그들은 가끔 권총을 들고 와 보는 앞에서 해머를 뒤로 젖혀 내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곤 했는데, 장전되지 않은 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심장을 내려앉게 했습니다. 다리로 의자를 들어 올리거나 팔을 때리는 식으로도 고문했어요. 이 밖에도 많은 고문이 있었습니다. 승조원들이 그 닭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많은 후유증을 겪고 있습니다.
푸에블로호의 나포 소식은 머피 씨의 부인인 캐롤 머피 씨에게도 전해집니다.
[캐롤 머피] 전화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승조원의 아내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울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어요. 전화로 그녀는 푸에블로호가 나포됐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선원이 죽었다는 소식만 전해졌습니다.
남편이 나포된 이후 두 아이와 남겨진 아내 머피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캐롤 머피] 우린 모두 모여서 그냥 기다렸습니다. 정말 큰 중압감에 시달렸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규칙적으로 남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에게서 답장은 없었는데, 마침내 남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기뻤습니다. 며칠 후 저는 편지의 복사본을 받았고, 또 몇 주 후에는 그 편지의 녹음테이프도 받았습니다. 그사이 적어도 11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여기 올 때마다 팔짝 뛰겠어”
[윤청자] 저 행정실에는 들어있는 것 같아. 거기 가서 평기 좀 찾아서 갔으면 좋겠다는 맘으로 살고 있어요. 하늘나라 갔다는 생각은 안 들고, 저 행정실에서 행정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윤청자 여사는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천안함이 전시된 평택 해군기지를 찾습니다. 12년 동안 바뀐 계절만 수십 번, 그 사이 어머니의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됐고, 얼굴과 손등의 주름도 깊어졌습니다.
찌그러진 철판이 뒤엉켜있고, 끊어진 전선이 축 늘어진 채 두 동강 나 있는 천안함 밑으로 윤 여사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전체 길이 88m, 건물 5층 높이의 거대한 천안함 아래 있으니 그 작은 체구가 더 왜소하게 보입니다.
[윤청자] 여기가 행정실이에요. 내가 여기 올라가 봤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 뒹굴었어요. 기가 막혀서.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요. 나는 더군다나 금쪽같은 내 새끼, 어떻게 키운 자식이여. 지가 나 살리고, 내가 지 살리고 그랬는데. 이렇게 보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해요.
윤 여사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젖혀 천안함의 찢긴 선체를 올려다봅니다.
아들이 일했다는 행정실, 그곳을 가리키는 어머니의 손은 떨리기 시작합니다.
[윤청자] 말할 것도 없지. 가슴 아픈 말을 어떻게 다 말해. 여기 올 때마다 미치고 팔짝 뛰겠어. 목숨이라도 끊고 싶어도 산 애들 때문에. 죽은 애들 쪽으로 가고도 싶고, 산 애들도 거두고 싶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취재 : 노정민, 천소람, 박수영, Monique Mai, Lauren Kim
촬영 : 이은규, Lauren Kim, Paul Lee
에디터 : Nadia Tsao, 박봉현, H. Léo Kim, 박정우, Beryl Huang, Tina Hsu, Brian Tian
그래픽 , 웹페이지 제작 : 김태이
내레이션 : 양윤정
더빙 : 이진서, 홍알벗, 한덕인, 김효선
번역 : 뢰소영
참고 자료 : KBS, SBS, YTN, AP
제작 : RFA
- 취재에 응해주신 고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여사와 푸에블로호 부함장 Murphy 씨, 부사관 James Kell 씨에게 특별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