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다섯 번째 희생자

2010년 3월 28일, 실종 해군 46명의 가족을 태운 성남함이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2010년 3월 28일, 실종 해군 46명의 가족을 태운 성남함이 백령도 앞바다에서 천안함 침몰 사고가 발생한 지역을 순찰하고 있다. (/ 그래픽-김태이, 사진-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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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에 나온 이름

[KBS 보도] 우리 해군 초계함 천안함이 백령도 인근에서 침몰했습니다. 승조원 46명이 아직 실종상태입니다.

[윤청자] 그날 밤 서해에서 배가 폭발됐다면서 텔레비전에 나왔는데, 내가 우리 영감님한테 “여보, 우리 평기가 서해 바다에 있어? 동해 바다에 있어?” 그랬더니 “평기가 서해 바다에 있지” 그러더라고. 그러면서 그 소리를 들으니까 가슴이 막 두근두근거리는거예요. 이상하게 그냥 막 마음이 불안하고 죽겠더라고요.

아들이 타고 있던 배의 사고 소식을 처음으로 접했던 그날을 설명하는 어머니, 윤청자 여사의 기억은 또렷합니다.

[윤청자] 폭발해서 물기둥이 올라가는 것이 보이더라고요. 그러더니 지금 배에서 생존자를 찾아서 건져내고 있다고 그래요. 그래서 “아이고 우리 평기가 아닌가…” 그런데 그냥 마음이 불안해요. 그러더니 한 두시쯤 되니까 생존자가 오십몇 명이 나오고, 바닷속에서 아직 찾지 못한 아이들의 이름이 나오는데, 아무개, 아무개, 아무개 하더니 다섯 번째에 가서 ‘민평기’가 나오는 거예요.

[KBS 보도] 네. 우선 이 시간 실종자 46명의 명단부터 전해드리겠습니다. 원사 이창기, 상사 최한권, 남기훈, 최정환, 민평기...

“아이고 어쩐다니. 여보, 아이고 우리 평기, 우리 평기 나왔어. 어떻게 하면 좋아.” 그때가 대여섯 시 됐어요. 그때가 추운 때였어요. 맨발로 팔팔 뛰어서 제가 은산 쪽으로 막 뛰어가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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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아들의 생사를 모르는 어머니는 아들이 살아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 지금 달려가면 아들을 찾을 것만 같습니다.

[윤청자] 그러니까 아들이 트럭을 타고 쫓아오더라고요. “엄마, 어디 가려고 그러시냐”고. “나야, 평기 건지러 가야혀, 평기 건지러 가야혀” 하고 입고 있는 옷 그대로, 맨발 벗은 채 가니까 우리 아들이 슬리퍼를 가지고 와서 그렇게 평택으로 갔어요. 아들이 “엄마, 집에 가서 옷이라도 따뜻하게 갈아입고 가자”고 했는데, “나는 싫다. 나 평기 건지러 가야혀”라고 하도 그러니까 우리 아들이 그냥 평택으로 데리고 갔어요.

그렇게 도착한 평택 해군기지에서도 윤 여사는 아들을 찾으러 온 ‘민평기의 엄마’였습니다.

[윤청자] 거기서 공기를 넣어줘서 배 안에 있으면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희망에 얼마나 애가 터지는지, 애간장이 다 터지지. 6일까지는 희망이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6일 후부터는 희망이 없잖아요. 그래서 팔팔 뛰고, 물 밑으로 건지러 가려고 하면 군인들이 따라와서 붙들고. 내가 가면 건질 것만 같아서 별짓을 다 해 봐도 안 되고. 나중에 사망자들을 건지는데, 금방 나올 줄 알았더니 한 달이 가도 안 나오잖아요. 애간장이 다 녹고…”

이야기가 계속될수록 백발의 어머니는 깊은 한숨을 내쉽니다. 얼굴을 찡그릴 때마다 눈가의 주름이 더 선명해집니다.

[윤청자] 포장마차에 쓰는 포장막을 쳐놓더라고요. 46명이 나오면 거기에 깔라고. 그걸 보니 눈이 뒤집어지잖아요. 세상에 나라 지키다 간 애들을. 그래서 텐트를 다 부숴버렸지. 그리고 한 달쯤 있을 때 나오기 시작했어요.

[YTN 보도] 네. 34세. 부모님과 형이 두 명이 있으니까 세 아들의 막내, 아주 귀한 막내아들이었습니다. 2009년 2월부터 약 1년 2개월가량 천안함에서 근무를 해왔습니다. 민평기 중사 시신의 신원이 확인됐다는 소식이 속보로 들어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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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 15일 민평기 중사 사망 보도. / YTN 캡처

[윤청자] 나는 다 볼 줄 알았어요 . 그런데 우리 아들을 못 보게 하더라고요. "왜 그러냐"고, "나 봐야 한다"고 하니까 두어 시간 있다가 보여주더라고요. 그런데 태극기를 이렇게 덮어 놨더라고. 그리고 얼굴만 이렇게 내놨더라고요. (바닷속이) 얼마나 찬지 (얼굴이) 하나도 변함이 없더라고요. 얼굴이 그대로고, 몸이 붓지도 않았어요. 그 물이 얼마나 찬지.

한국의 천안함은 북한 잠수함의 어뢰 공격으로 그토록 엄마의 기대주였던 민평기 상사를 포함한 46명의 용사와 함께 침몰했습니다.

갑자기 날아 온 총탄

1968년 1월 23일 오전 11시 30분경.

북한 원산 앞바다에서 항해 중이던 미군 정찰함 푸에블로호는 북한 초계정 한 척으로부터 위협을 받게 됩니다. 전날부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에드워드 머피] 저희는 당장 빠져나와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일출부터 정오까지 북한의 행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 사이에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배가 위험에 처한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배에 연기가 자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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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fred S. Pagano)

전투함이 아닌 푸에블로호가 갑자기 쏟아진 북한의 포격에 대응할 방법은 없었습니다. 푸에블로호에 탑승했던 제임스 켈 씨도 그날 바다를 이렇게 기억합니다.

[제임스 켈] 정보 수집 같은 거였어요. USS 푸에블로호는 간첩선이 아니었습니다. 50구경 기관총 두 정을 가지고 있었는데, 푸에블로호 선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적대적으로 보이기를 원치 않았고, 총과 탄약을 밧줄 아래 숨겨놨습니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미 북한군은 우리를 향해 총을 쏘고 있었고, 밧줄 아래 있던 총을 잡을 방법이 없었습니다. 맞서 싸우려면 밖으로 나가 밧줄들을 치우고 탄약통을 들고 와야 했으니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켈 씨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어졌습니다.

[제임스 켈] 승무원 중 한 명인 드웨인 호지스가 당시 공격으로 숨졌습니다. 나는 그가 죽는 순간을 보지 못해서 다행이라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한쪽 다리와 복부의 일부를 잃었기 때문에 그의 목숨을 구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11명~12명 정도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북한군은 우리 모두를 포로로 잡았고, 심한 상처를 입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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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loyd Bucher In this 1968 photo from North Korea's official Korean Central News Agency, distributed by Korea News Service, captain of the USS Pueblo, a Banner-class technical research ship (Navy intelligence), Commanding Officer Lloyd M. Bucher and his crew. (Korean Central News Agency/Korea News Service via AP Images) (Anonymous/ASSOCIATED PRESS)

머피 씨와 켈 씨를 포함한 82명 승조원들의 11개월간 포로 생활이 시작됐습니다.

[제임스 켈] 우린 늘 두들겨 맞았고, 억류 기간 내내 심리적인 고문도 당했습니다. 또 그들은 가끔 권총을 들고 와 보는 앞에서 해머를 뒤로 젖혀 내 머리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곤 했는데, 장전되지 않은 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그럴 때마다 심장을 내려앉게 했습니다. 다리로 의자를 들어 올리거나 팔을 때리는 식으로도 고문했어요. 이 밖에도 많은 고문이 있었습니다. 승조원들이 그 닭장 같은 곳에서 빠져나왔지만, 아직 우리 대부분은 여전히 많은 후유증을 겪고 있습니다.

푸에블로호의 나포 소식은 머피 씨의 부인인 캐롤 머피 씨에게도 전해집니다.

[캐롤 머피] 전화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승조원의 아내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녀가 너무 울어서 무슨 말을 하는지 못 알아들었어요. 전화로 그녀는 푸에블로호가 나포됐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 선원이 죽었다는 소식만 전해졌습니다.

남편이 나포된 이후 두 아이와 남겨진 아내 머피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캐롤 머피] 우린 모두 모여서 그냥 기다렸습니다. 정말 큰 중압감에 시달렸고 힘든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규칙적으로 남편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에게서 답장은 없었는데, 마침내 남편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을 때는 기뻤습니다. 며칠 후 저는 편지의 복사본을 받았고, 또 몇 주 후에는 그 편지의 녹음테이프도 받았습니다. 그사이 적어도 11통의 편지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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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올 때마다 팔짝 뛰겠어”

[윤청자] 저 행정실에는 들어있는 것 같아. 거기 가서 평기 좀 찾아서 갔으면 좋겠다는 맘으로 살고 있어요. 하늘나라 갔다는 생각은 안 들고, 저 행정실에서 행정을 보고 있는 것만 같아요.

윤청자 여사는 아들이 보고 싶을 때마다 천안함이 전시된 평택 해군기지를 찾습니다. 12년 동안 바뀐 계절만 수십 번, 그 사이 어머니의 검은 머리는 백발이 됐고, 얼굴과 손등의 주름도 깊어졌습니다.

찌그러진 철판이 뒤엉켜있고, 끊어진 전선이 축 늘어진 채 두 동강 나 있는 천안함 밑으로 윤 여사가 천천히 발걸음을 옮깁니다. 전체 길이 88m, 건물 5층 높이의 거대한 천안함 아래 있으니 그 작은 체구가 더 왜소하게 보입니다.

[윤청자] 여기가 행정실이에요. 내가 여기 올라가 봤는데, 처음에는 (그 모습을 보고) 뒹굴었어요. 기가 막혀서. 안 당해 본 사람은 몰라요. 나는 더군다나 금쪽같은 내 새끼, 어떻게 키운 자식이여. 지가 나 살리고, 내가 지 살리고 그랬는데. 이렇게 보냈으니 얼마나 억울하고 원통해요.

윤 여사는 허리를 펴고 고개를 젖혀 천안함의 찢긴 선체를 올려다봅니다.

아들이 일했다는 행정실, 그곳을 가리키는 어머니의 손은 떨리기 시작합니다.

[윤청자] 말할 것도 없지. 가슴 아픈 말을 어떻게 다 말해. 여기 올 때마다 미치고 팔짝 뛰겠어. 목숨이라도 끊고 싶어도 산 애들 때문에. 죽은 애들 쪽으로 가고도 싶고, 산 애들도 거두고 싶고. 그래서 오늘날까지 이렇게 살고 있는 거예요.

[기억의 지속] (2) 그날 바다 [기억의 지속] (2) 그날 바다

취재 : 노정민, 천소람, 박수영, Monique Mai, Lauren Kim

촬영 : 이은규, Lauren Kim, Paul Lee

에디터 : Nadia Tsao, 박봉현, H. Léo Kim, 박정우, Beryl Huang, Tina Hsu, Brian Tian

그래픽 , 웹페이지 제작 : 김태이

내레이션 : 양윤정

더빙 : 이진서, 홍알벗, 한덕인, 김효선

번역 : 뢰소영

참고 자료 : KBS, SBS, YTN, AP

제작 : RFA

  • 취재에 응해주신 고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 윤청자 여사와 푸에블로호 부함장 Murphy 씨, 부사관 James Kell 씨에게 특별히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