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포로→귀향, 51년 만에

워싱턴, 서울, 타이페이 - 특별취재팀 nohj@rfa.org
2022.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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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포로→귀향, 51년 만에 한국 전쟁 당시 포로가 된 미군 병사들
/ Korean Central News Agency/Korea News Service via AP

죽음의 계곡  

 

[마이크 다우] 가로세로가 각각 10피트 (3미터) 정도 됐던 것 같아요. 그리고 죄수들이 이 방에 두 줄로 늘어섰습니다. 서로 굉장히 가까웠죠. 한 명이 돌아누우면 모두가 돌아누워야 했습니다. 밤에 일어나 소변을 봐야 할 때는 사람들을 밟아야만 지나갈 수 있었어요.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 중 가장 악명이 높았던 일명 ‘죽음의 계곡.’

 

[마이크 다우] 작은 해충들도 곤혹스럽게 했습니다. 매일 밤 이를 고르지 않으면 감당하기 어려웠어요. 매일 100마리가량의 이를 골라내야 했습니다. 만약 이 잡는 것을 멈추거나, 새 모이만큼의 옥수수 알갱이들을 억지로 삼키지 않으면 삶을 유지할 수 없었습니다.

 

그곳은 한 칸 남짓 공간에 18명의 성인들이 몸을 욱여넣어야 했습니다.

 

[마이크 다우] 가장 고통스러웠던 일은 시체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가 옮지 않도록 수용소에서 죽은 사람을 밖으로 옮기는 것이었습니다. 더 끔찍한 것은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갈수록, 수용소에 더 넓은 공간이 생겼다는 점입니다. 이전까지는 공간이 비좁아 한 명이 돌아누울 때면 다같이 돌아야 했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진 거죠.

 

다우 씨는 한참 동안 말을 잇지 못합니다.   

 

[마이크 다우] 제가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지 몇 달 후에 저녁 식사 초대를 받은 적이 있는데요. 만찬이 준비됐지만, 저는 그 음식들을 거의 먹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제 소화기관이 그 평범하고 영양가 있는 음식들을 어떻게 소화해야 하는지 잊어버렸기 때문이예요.

 

1950 12 25일부터 이듬해 2 28일까지 두 달 남짓 사이에 다우 씨 주변에서만 400명 이상이 굶어 죽거나 얼어 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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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한 유엔 산하 제76 거제수용소에서 포로들의 폭동이 발생한 이후 (1952년 5월 7일) 포로들이 막사 위에서 인질로 붙잡은 미군들을 감시하고 있다. (1952년 5월 23일)/ AP

 

탈출  

 

51. 전쟁 발발 5일 만에 19살의 나이로 포로가 된 김성태 씨가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오기까지 걸린 시간입니다.

 

[김성태] 너무나도 고달픈 생활을 하고, 식량이 없으면 밤에 배낭을 메고 협동농장 강냉이밭에 가서 몰래 도둑질해 와서 그렇게 연명하면서 자식들을 길렀어요. 그리고 국군 포로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들이) 대학도 못 가요. 그저 탄광에서그리고 군대도 못 가고.

 

김 씨의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립니다.

 

[김성태] 고생을 너무나 많이 하고, 내가 이 세상에서 어떻게 이렇게 태어나서 이렇게남은 다 잘 살고, 잘 먹고 하는데

 

수용소 탈출을 시도하다 잡히기를 반복한 김 씨는 휴전협정을 이틀 남기고 군사재판에 넘겨집니다.   

 

[김성태] ‘대원들을 데리고 한국으로 넘어가려고 그렇게 음모하지 않았는가하면서 거기서 발각돼서, 7 27일이 휴전 아니오. 정전협정인데, 7 25일에 군사재판에 회부돼서 13년형에 선거권 박탈 3년이란 말이오

 

형기를 꼬박 채우고, 1966 7월에 석방된 그는 함경북도 온성의 추원탄광에서 23년간 광부로 살았습니다.

 

[김성태] 내가 말을 다 못해. 말을 하면 눈물이 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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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쟁 당시 서부전선에서 연합군에 체포된 중공군 병사들이 총을 쏘지 말라며 애원하고 있다. (1951년 1월 30일) / AP

  

13년의 수용소 생활과 강제노동을 견뎌낸 김 씨는 2001, 큰아들과 함께 다섯 번째이자 마지막 탈북 시도를 감행합니다

 

[김성태] 내 동생이 왔더란 말이오. 연길 비행장에. 그런데 동생을 알 수가 없잖아. 그래서 내가 학교 다닐 때 동생 몸에 상처 난 것, 이런 것을 다 이야기하니까 형님이 옳다고 하면서, 그래서 거기서 상봉하게 됐어, 51년 만에

 

중국 대련항에서 화물선을 타고 18시간 만에 도착한 인천항. 19살에 포로가 된 김 씨가 70세가 돼서야 밟은 한국 땅입니다.

 

[김성태] 글쎄 여기가 낙원인지, 천당인지 모르겠더라고. 인천항부터 서울 거기까지 고층 건물이 다 들어섰는데, ‘이게 정말 꿈인가 생시인가이렇게 생각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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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다우 씨가 포로수용소에서 사용했던 컵과 밥그릇 / RFA photo

  

마이크 다우 씨는 수용소를 탈출할 때 가져온 밥그릇과 컵을 아직 간직하고 있습니다. 

 

[마이크 다우] 수용소 가장자리에 분뇨를 퍼내 갈 있는 작은 구멍이 있었습니다. 이 분뇨는 비료로 사용할 수 있었거든요. 저는 그곳을 탈출하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구멍을 통과하기 위해 몸을 가능한 한 둥글게 말았어요. 그리고 수용소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진 곳에 포로 교환을 위한 재판에 회부되는 무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리에 들어갔어요.

 

탈출 이야기에 다우 씨의 말이 빨라집니다.  

 

[마이크 다우] 북한군들이 한 명씩 이름을 부르면서 트럭에 포로들을 실어 나르고 있었습니다. 포로들을 판문점으로 데려갈 때 제가 어떤 순서로 줄을 섰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호명하는 사람들이 작은 다리를 건넜고, 다리 반대편에는 유엔 해군들이 서 있었습니다. 유엔군이 한 명씩 "5, 4, 3, 2, 1" 마지막 숫자까지 셌는데, 아직 저는 다리를 건너기 전이었습니다. 중국인이 포로들의 이름이 적힌 종이판을 들고 있었고, 저는 그 종이판을 가리키며 이름이 있다고 했어요. 그가 종이판을 내려다봤을 , 저는 곧바로 다리를 가로질러 갔습니다. 아무도 저를 막지 못했죠. 그렇게 저는 돌아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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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4월 26일, ‘리틀 스위치(Little Switch)’ 작전을 통해 ‘자유의 마을’로 송환된 전쟁 포로들/AP

 

직접 전쟁을 겪고, 전쟁포로까지 됐던 김성태 씨와 마이크 다우 씨에게 전쟁이란 단어는 아직도 몸서리치게 하는 기억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김성태] 이 전쟁의 참화라는 게 정말 눈 뜨고 볼 수 없는 비참한 생활을 겪게 된단 말이오. ‘도대체 전쟁을 왜 해야 하는가’, ‘이게 누구를 위해서 이렇게 전쟁을 하는가이것도 엄청 가슴에 새기게 되더란 말이오.

 

1950년 한국전쟁과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분쟁의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RFA는 망각(忘却) 대신 ‘기억의 지속’을 통해 이들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취재: 노정민, 천소람, 박수영, Monique Mai, Lauren Kim

촬영: 이은규, Lauren Kim, Paul Lee

에디터: Nadia Tsao, 박봉현, H. Léo Kim, 박정우, Beryl Huang, Tina Hsu, Brian Tian

그래픽, 웹페이지 제작: 김태이

내레이션: 양윤정

더빙: 이진서, 홍알벗, 한덕인, 김효선

번역: 뢰소영

참고 자료: KBS, SBS, YTN, AP

제작: RFA 

 

  • 취재에 응해주신 김성태 씨와 마이크 다우 씨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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