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뭐 때문에 참전했나”

워싱턴, 서울, 타이페이 - 특별취재팀 nohj@rfa.org
2022.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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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뭐 때문에 참전했나” 1971년 12월 4일에 열린 한국전 참전 화교 종군기장 수여식
/ RFA photo

아버지의 선택 

 

상가 건물들이 모여 있는 서울 연희동의 한 도로변.

버스에서 ‘다음 정차할 곳은 한성화교중고등학교 앞이란 안내 방송이 나옵니다.

 

정류장에 내려 조금만 걷다 보면 은색 교문 뒤로 3층짜리 건물이 보입니다.

건물 중앙에는 빨간색 한문으로 ‘한국한성화교중고등학교라 쓰여 있고, 그 앞에 심어진 나무들은 햇살 아래 그늘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교문을 통과해 언덕을 걸어 올라가니 학교 운동장이 보이고,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면 학교 본관 옆에 자그마한 기념관이 있습니다. 이곳은 화교의 역사와 전통을 기리기 위한 공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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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연희동 한국한성화교중고등학교의 기념관 / RFA photo

 

건물에 들어서니 머리카락이 희끗한 중년남성들이 전시물을 둘러보고 있습니다.

김육안, 나국위, 류대길, 왕성민.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아버지가 화교 출신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겁니다.  

 

[김육안] 저희 아버님은 중국 산둥에서 태어나셨는데, 생활이 어려워 할아버지를 따라 북한 함흥으로 이주하셨어요. 할아버지와 가족분들은 함흥에 거주하시고, 아버님은 생계 때문에 남한에 와서 직장을 다니던 중에 6.25 전쟁이 발발한 거죠. 화교 의용군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당시 이념은 자유를 추구하던 추세였으니까 참전하신 것 같습니다.

 

김육안 씨의 아버지(김성정)‘SC부대(Seoul Chinese),’ 한국화교 부대의 지대원으로 중공군, 북한군과 맞서 싸웠습니다. 그의 왼손에는 흰색 종이에 복사된 아버지의 참전 자료가 들려있습니다.

 

[김육안] 참혹하죠. 그때 당시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죠. 제가 듣기로는 약 이백 명 넘게 모집됐습니다. 그중 칠십몇 분은 전투 쪽으로 투입되고, 나머지 분은 후방 부대에 소속돼 이것저것 지원해줬는데, 특히 부분적으로 낙하산 부대가 있었대요. 낙하산 부대 쪽은 거의 비행기를 타고 바로 적진에 떨어지는 상황이니까 거의 전쟁 때 총알받이가 된 거고, 생존했다는 소식은 거의 못 들었고요.

 

김 씨가 오른손을 들어 진열장 안의 사진 한 장을 가리킵니다. 손가락을 따라가 보니 군복에 총을 든 두 남성이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버지(김성정)와 당숙(김정의)입니다.

 

[김육안] 두 분이 같이 참전했는데, 당숙(김정의)은 낙하산 부대에 들어가서 지금까지 소식이 없고, 아버님은 육군으로 참전해 직접 (전투에) 참여하고, 정보 수집도 하고, 특수부대 임무 수행을 하신 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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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에 참전한 화교 용사들이 박정희 전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포장증 / RFA photo

  

이곳에는 나국위 씨 아버지(나아통)의 포장증도 진열돼 있습니다.

 

[나국위] 아버님은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었어요. 그래서 학자가 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는데, 중국이 공산주의로 넘어갔잖아요. (아버님이) 공산주의를 참 싫어했어요. 그래서 반공산주의 활동도 좀 했어요.

 

나 씨는 어렴풋이 아는 아버지의 한국전쟁 참전 과정이 ‘드라마같다고 말합니다

 

[나국위] 아버님은 황포 육군사관학교 출신이에요. 아버님은 중국 사람이니까 당연히 (중국군대에) 입대했지요. 그런데 우리 아버님은 공산주의를 굉장히 싫어해서 탈출했습니다. 이후 한국으로 갔고, 다시 북한군과 중공군의 상대편에서 싸웠습니다.

 

진열장 안에는 나란히 걸린 태극기와 대만기 앞에서 다섯 명의 화교 참전용사가 찍은 사진도 있습니다. 한국전 참전 화교 종군기장 수여식, 뒷줄에서 양복을 입은 나 씨의 아버지가 왼쪽 가슴에 하얀색 꽃과 훈장을 달고 있습니다

 

류대길 씨의 양아버지도(류국화) 사진 속 참전용사 중 한 명입니다.

 

[류대길] (저희 아버지는) 중국 만주 길림성 출신이에요. 거기서 만주 일본 군관학교에 다니셨고, 대위로 졸업해서 6.25 때 대만을 대표해서 한국으로 나오셨다고 들었어요. 지금 서울 부암동 쪽에서 군부대 활동을 시작했죠.

 

한국에서 태어난 류 씨의 친아버지는(안창남) 한국인이었습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친아버지가 집을 나간 뒤 소식이 끊겼는데, 훗날 특수부대에 자원입대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2019년에는 한국 국방부로부터 친아버지의 뒤늦은 전사 통보서도 받았습니다

 

[류대길] 저는 친아버지가 따로 있습니다. 지금 여기 류국화 아버지는 양아버지입니다. 두 분 다 공교롭게도 같은 (참전 용사) 출신이에요. 저희 친아버지는 한국 국방부에서 국가 유공자로 선정돼서 정리가 됐지만, 양아버님에 대해서 물어보니 이것은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어릴 적 친아버지 없이 생활고를 겪던 류 씨와 어머니를 받아 준 사람이 바로 지금의 양아버지입니다. 감정이 북받친 류 씨는 잠시 말을 잇지 못하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을 쏟아냅니다.

 

[류대길] 요즘 세상에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겠죠. 그런데 돈보다 더 중요한 것이 명예라고 보거든요. 우리 아버지(류국화)도 살아계셨을 적에 죽을 때까지 의를 버리지 말아라’, 그런 말씀을 하셨거든요. 저에게는 은인이죠. 6.25 때 저희 어머니하고 제가 갈 데가 없어 방황했을 때 거둬주셨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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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한성화교중고등학교의 기념관에 전시된 화교 참전 용사들에 관한 자료들 / RFA photo

 

왕성민 씨도 군복을 입은 아버지(왕죽삼)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왕성민] 어렸을 때 아버님이 군복을 입은 사진을 네다섯 장 갖고 있었는데, 저는 중국에서 군인을 하신 줄 알았어요. 나중에 말씀하시더라고요. 한국 전방에 참전해서 취사를 담당하셨다고 했습니다. 거기서 음식도 해주시고, 포로 통역도 해주시고, 그런 역할을 하셨습니다

 

사진과 훈장 등을 소개하는 아들들의 표정과 목소리에서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아버지에 대해 조금 더 길게, 자세히 말해주려 하지만, 이것만으론 참전을 택한 아버지의 삶을 다 설명하지 못합니다

 

[김육안] 그러니까 뭘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었을까란 생각도 해보게 돼요. 첫 번째는 이념도 중요하지만, 마음속에는 가족에 대한 애착이 있었을 거예요. 가족이 북한 함흥에 있는데, 본인은 남쪽에 있고. 참전해서 가족의 생사를 확인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목적이고, 그때 당시에는 반공 이념이 사상적으로 아주 확실하게 대립해 있는 상황에서 자유 국가에 있는 사람이 당연히 자유를 추구하는 마음이 제일 우선이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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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정의 지동관’ 

 

경기도 의정부시.

의정부 전철역 앞 번화가의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면 ‘지동관이라는 중식당이 있습니다.

 

때마침 점심 시간이라 식당 안은 자장면, 잠뽕, 탕수육 등을 먹는 손님들로 북적이고, 주방에는 면을 볶고, 고기를 기름에 튀기는 요리 소리로 가득합니다. 화구 위에서 프라이팬이 쉴 새 없이 움직입니다

 

[김육안] 이 지동관은 아버님이 옛날에 중국에서 북한으로 넘어갔다가 한국에 오셨으니까, 뜻이 동쪽에 있는 나라, 옛날에는 중국에서 볼 때 동쪽이 한국이었잖아요. 어렸을 때부터 이리로 왔으니까 뜻은 난 동쪽으로 해서 고향이 그립다는 생각으로 이 상호를 만든 거예요.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화교 참전용사인 김성정 씨가 한국전쟁 뒤 먹고살기 위해 문을 연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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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교 참전용사인 김성정 씨가 1963년에 문을 연 중식당, 지동관 / RFA photo

 

아버지가 시작한 식당을 물려 받은 김육안 씨도 의정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김육안] 그때 당시 아버님이 내려왔을 때 서른 살이 조금 넘었어요. 서른 살 넘어 의정부에 들어가서 식당을 어렵게 열었는데, 전에 자기가 가게에서 일을 배웠던 사장님께서 기름 열 통, 밀가루 열 포를 갖고 와서 이것을 밑천으로 해서 장사를 시작하라고 해서 아버님이 시작한 거고.

 

1963년에 문을 연 지동관은 의정부에서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또 음식이 맛있기로 소문난 식당입니다.

 

[김육안] 지역 분들이 당신이 어떻게 외국인으로서 한국전쟁에 참전할 수 있나. 우리가 그것을 알고 나서 놀랐다. 너무 감사하다라면서 식사를 하더라도, 짜장면이나 우동 하나를 먹더라도 이 가게에 가서 먹어야지, 딴 데 가서 먹을 수 있냐라는 것이 저희 지동관이 의정부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는 기초였습니다.

 

지동관의 역사 이야기를 하는 동안 김 씨는 ‘아버지란 말을 여러 차례 반복했습니다

 

김 씨는 아버지뿐 아니라 모든 화교 참전용사들에 대한 마음을 빼놓지 않습니다.  

 

[김육안] 한국전쟁에서 생존하신 화교분이 한 이십 명도 안 돼요. 처음 모집할 때는 이삼백 명이었고, 특수 임무 수행자가 한 칠십 명이 넘었는데, 그러다가 80년대 후반, 90년 때 초반에 들어와서 그때 아버님이 대원들 몇 명과 만나서 참전동지회를 만들고 이제 조금 인정해 달라는 하소연을 했나 봐요. 그때 제가 어르신들 모시고 국방부, 보훈처 등 여러 군데 다녀서 청원을 한번 해봤죠. 그런데 다 참 묘한 대답이 왔어요. ‘당신들은 외국인이니까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김 씨는 지난 8, 청원서와 자료 등을 모아 국방부에 또 민원을 접수했습니다. 그만큼 간절한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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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육안] 내년이면 6.25 정전 협정 70주년이래요. 당사자가 지금 살아계시면 90세가 넘어 거의 100세까지 되신 분들인데 지금도 살아계실까의문스럽고. 지금 제가 알기로는 한 분도 안 계세요. 우리가 많이 구상한 것은 추모비하나 세워서 모셨으면 하고, 그 추모비에는 당시 어르신 분들의 소속 부대, 대원, 부대명을 새겨놓고, 조금 더 희망적인 것은 뒷면에다가 당시 칠십 몇 분의 특수 임무를 수행하신 분들의 함자를 새겨 놓으면 국립 현충원에 모시는 것과 똑같지 않을까란 생각입니다.

 

김 씨가 이러는 이유를 설명한다면, 기억을 놓치고 싶지 않아서인지도 모릅니다.

 

1950년 한국전쟁과 1968년 푸에블로호 나포, 2010년 천안함 폭침과 연평도 포격, 그리고 2022년 우크라이나 전쟁까지 분쟁의 피해자들은 오랜 시간 지워지지 않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RFA는 망각(忘却) 대신 ‘기억의 지속’을 통해 이들이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기록했습니다.

 

취재: 노정민, 천소람, 박수영, Monique Mai, Lauren Kim

촬영: 이은규, Lauren Kim, Paul Lee

에디터: Nadia Tsao, 박봉현, H. Léo Kim, 박정우, Beryl Huang, Tina Hsu, Brian Tian

그래픽, 웹페이지 제작: 김태이

내레이션: 양윤정

더빙: 이진서, 김진국, 홍알벗, 한덕인, 김효선

번역: 뢰소영

참고 자료: KBS, SBS, YTN, AP

제작: RFA 

 

  • 취재에 응해주신 ‘한국한성화교중고등학교관계자분과 여한화교참전동지회승계회'의 김육안, 나국위, 류대길, 왕성민 씨께 특별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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