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끝나지 않은 전쟁] ‘전쟁’ 단어에 웃음기 사라져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에서 발견된 찢어진 신발
우크라이나 하르키우 지역에서 발견된 찢어진 신발 (/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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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울 수 없는 기억

트라우마. 과거에 경험했던 공포와 같은 순간이 발생했을 때 당시의 감정을 느끼며 심리적 불안을 겪는 증상을 말한다고 합니다.

우크라이나 고향을 떠나 한국에 정착한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낯선 사람 앞에서 말수가 적고, 묻는 말에 답변도 짧다는 겁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또래 친구들끼리 장난을 쳤는데, 전쟁이란 단어에 금세 웃음기가 사라집니다.

잊기에는 아직 너무나 이른 기억 때문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광주 고려인 마을에서 우크라이나 난민을 돕는 박 빅토리아 씨는 매일 청소년센터를 찾는 난민 어린이들에게 간식 하나라도 더 챙겨주고 싶은 마음이라 합니다.

[박 빅토리아] 전쟁 때문에, 그리고 이제 한국에 적응해야 하니까 대부분 학생과 부모님들이 밤에 잘 못 잔다고 해요. 왜냐하면 아직도 큰 소리를 들으면 폭탄인 줄 알고 무섭다고 하더라고요. 이렇게 어렸을 때부터 이런 스트레스를 겪으면 많이 힘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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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라남도 광주의 새날학교에서 한국어 수업 중인 우크라이나 난민 어린이 / RFA photo

북한의 포격을 받았던 연평도의 주민들도 트라우마를 겪었습니다. 집 안 거실로 포탄이 떨어졌던 정창권 씨의 아내는 그 후로 2년 넘게 고통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정창권] (아내가) 놀랐죠. 몇 년간 트라우마 때문에 고생했어요. 그러니까 조그만 소리에도 민감해져서 깜짝깜짝 놀라고, 그 이후에도 여기 부대가 있으니까 훈련이 계속됐는데, 그럴 때마다 굉장히 고통을 많이 겪었죠. 그래서 육지로 한 2년 정도는 병원에 다녔어요. 지금은 뭐 일상으로 돌아갈 만큼 회복해서 평상시처럼 생활하고 있어요.

하지만 이명재 씨처럼 10년이 훌쩍 지난 일임에도, 그때 기억이 일상을 괴롭히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명재 씨] 상상할 수 없는 공포였기 때문에 눈물이 날 수밖에 없어요. 제가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미디어를 잘 안 봐요. 그 상황을 겪었으니까 그때 생각이 나기 때문에, 가끔 (연평도 포격 상황을) 설명할 때도 눈물이 왈칵 쏟아질 때도 많아요.

잊을 수 없다면 애써 그 기억을 외면하고픈 마음도 있습니다.

연평도 포격 현장을 눈에 잘 띄지 않은 곳에 보존한 것도 그 때문인지 모릅니다.

[송영옥 씨] 아직까지 트라우마가 있는 분들도 있을 거예요 . 벌써 10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잖아요. 이미 다른 곳으로 바로 복구를 한 상태고, 정상적인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기 한쪽에, 우리 주민들 눈에 많이 띄지 않는 곳에다가 이렇게 보존을 해놓은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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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평도 주민이 2010년 당시 북한의 포격으로 부서진 민가를 둘러 보고 있다. / RFA photo

“당신이 우리 아빠예요?”

1968년 미국 정찰함 푸에블로호와 함께 북한에 납치됐던 에드워드 머피 씨는 당시 두 살배기 아들과 임신 7개월의 아내를 두고 떠난 것이 평생 마음에 남는다고 합니다.

[에드워드 머피] 전 그 당시 아내에게 인사하지도, 갓 태어난 딸에게 말을 건네지도 못했어요. 불행히도 전쟁 당시 모든 실종자와 전쟁포로의 가족들에게도 해당되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락할 자유를 잃었다는 것은 굉장히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수천 명의 전쟁 실종자 가족들은 아직도 그 마무리를 짓지 못했습니다.

머피 씨는 북한에서 풀려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들이 건넨 첫 마디를 잊지 못합니다.

조금 붉어진 머피 씨의 눈빛에서 53년이 지난 지금까지 가지고 있는, 가족에 대한 미안함이 느껴집니다.

[에드워드 머피] 제가 풀려났을 때까지만 해도 아들 인생의 3분의 1은 아버지 없이 지냈습니다. 세 살짜리 아이는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못할 거라 생각하겠지만, 아이들도 알고 있습니다. 전쟁 중 실종된 사람과 전쟁포로 가족의 아이들은 전쟁의 영향을 받습니다. 제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아들의 미소와 함께 '당신이 우리 아빠예요?'라고 물었던 걸 아직도 기억합니다. 다른 애들은 아빠와 엄마가 있었지만, 우리 아들에게는 아빠가 없었다는 것, 이는 전쟁의 참상 중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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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머피 씨의 가족사진 / RFA photo

실향민 아버지를 둔 신미녀 씨도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살고 있습니다. 함경북도 길주군이 고향인 그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때 홀로 피난길로 오른 뒤 분단된 한반도에서 늘 고향을 그리워했습니다.

[신미녀] 아버지는 평생 이산의 한을 가슴에 안고 사셨어요. 돌아가실 때조차 울면서 돌아가셨어요. 저희 어렸을 때 늘 우리 형제들을 모아놓고, 고향 주소를 외우게 하고, 약도까지 그려 주시고, 고향에 계신 큰아버지나 고모들의 이름 외우는 거. 아버지는 유독 말씀이 없으셨는데 술만 드시면 밤새도록 우리를 앉혀 놓고 고향 얘기를 하셨어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오늘날 신 씨가 통일 운동을 하게 된 원동력이 됐다고 합니다. 신 씨는 민간단체 ‘새롭고 하나된 조국을 위한 모임’의 대표로서 탈북민들의 남한 정착을 돕고 있습니다.

[신미녀] 저는 전쟁 세대가 아니기 때문에 모르지만, 아버지를 통해서 보면 그냥 한 사람의 삶과 인생이 다 뒤바뀌는 것 같아요. 무거운 짐과 그리움, 특히 전쟁으로 인한 남북 이산가족은 가고 싶다고, 돈이 많다고 (고향에) 갈 수 있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전쟁이 낳은 이산은 한 사람뿐만이 아니라 가족, 자식들, 3세까지도. 모든 삶을 다 뒤바꿔 놓는 엄청난 일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마지막 눈을 감을 때까지 고향을 그리워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기억하는 신 씨에게 통일 운동은 아버지를 향한 ‘사부곡’이라고 합니다.

[신미녀] 우리 고향이라는 것은 평생 내가 돌아가야 갈 곳이잖아요. 모든 물고기들도 자기 태어난 곳을 수만 킬로 헤엄쳐서 다시 돌아가잖아요. 하물며 인간은 자기가 태어난 곳을 죽기 전에 한 번씩 가보고 싶은 게 소원이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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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향민 아버지를 둔 신미녀 씨는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오늘날 통일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 RFA photo

그리움에 사무친 날들

2022년 6월 6일 현충일. 전날 오후부터 내리던 비는 이른 새벽이 돼서야 그쳤습니다.

민평기 상사의 어머니는 일찌감치 외출 준비를 마칩니다. 오늘은 아들을 만나러 가는 날입니다.

3개월 만에 다시 아들의 묘지를 찾는 어머니, 윤청자 여사.

한 번 만져볼 수도 없는 아들이지만, 매번 끌리듯 찾게 된다고 윤 여사는 털어놓습니다.

[윤청자] 지금은 아파서 자주 못 다니지만, 예전에는 많이 왔었어요. 2~3일 만에도 오고, 한 달 만에도 오고. 와서 얻어가는 게 없는데도, 왔다 가야 마음이 편해요.

현충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어머니.

[윤청자] 착잡하고 서글프지 뭐. 짐승도 자식이라면 벌벌 떠는데, 우리 아이는 특별히 안쓰러운 아이예요.

어머니의 눈에 수많은 호국 영령들의 비석이 들어옵니다.

꽃바구니가 가지런히 놓인 비석 사이로 아들을 찾아 걸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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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국립현충원에 안장된 고 민평기 상사의 묘 앞에서 아들을 그리워하는 윤청자 여사. / RFA photo

‘해군상사 민평기의 묘’. 그의 비석에 새겨진 이름입니다.

어머니는 비석에 붙어 있는 아들의 사진을 손수건으로 말없이 닦고 또 닦다 끝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립니다.

[윤청자] 아이고, 평기야….

‘아들을 먼저 떠나보내고 그 동안 어떻게 사셨냐’는 물음에 어머니는 “미쳐서 뛰어다녔다”고 답합니다.

[윤청자] 어쩌겠어요. 따라는 못 가고, 세월이 가면 갈수록 보고 싶은 마음은 더하고. 우리 아들에게 가고 싶은데 마음대로 안 되네요.

아들에 대한 어머니의 그리움은 아쉬운 마음으로, 그 마음은 미안함으로 바뀌기도 하나 봅니다.

마지막으로 봤던 그 모습이 이별일 줄 알았다면, 제대로 인사하며 떠나보낼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지금보다 덜 아팠을런지, 후회와 아쉬움만 커져갑니다.

[기억의 지속] (9) 지울 수 없는 기억 [기억의 지속] (9) 지울 수 없는 기억

취재 : 노정민, 천소람, 박수영, Monique Mai, Lauren Kim

촬영 : 이은규, Lauren Kim, Paul Lee

에디터 : Nadia Tsao, 박봉현, H. Léo Kim, 박정우, Beryl Huang, Tina Hsu, Brian Tian

그래픽 , 웹페이지 제작 : 김태이

내레이션 : 양윤정

더빙 :한덕인

번역 : 뢰소영

참고 자료 : KBS, SBS, YTN, AP

제작 : RF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