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러시아의 북한 노동자들] 2부: “나는 국가의 ‘앵벌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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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최근 국제사회에서 해외에 파견된 북한 노동자들의 인권 유린 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러시아에 있는 북한 노동자를 직접 만나 그들의 아픔, 또 그들의 고단한 삶을 조명해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순서로 이들이 어떻게 북한이란 국가의 '앵벌이'로 전락했는지 알아봅니다. 양성원 기자가 전해드립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이 5월 중순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만난 북한 건설 노동자 김 모 씨는 인터뷰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북한 동료 노동자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았습니다.

전화를 건 동료의 용건은 회사에 곧 납입금을 내야 하는데 돈이 없다며 여유 자금이 있으면 꿔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김 씨: 야 내가 양보할 형편이 못 돼... 사람이 자기 체신을 지켜야지 않니...

완곡히 동료의 부탁을 거절한 김 씨는 자신도 처음 러시아에 와서 일감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없어 항상 빚쟁이 같은 심정으로 살았다며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납입금을 제때 바치지 못하면 무능력자로 찍히고 결국 북한으로 송환되기 때문에 러시아 내 북한 건설 노동자들이 느끼는 압박감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라는 것입니다.

김 씨: 스트레스가 많은 정도가 아니지... 조국에 빈손으로 못가지, 쫓겨 가면 집에선 좋겠어? 창피하고 먹고 살기 힘들고...

사진은 러시아 극동 하바로프스크 국제공항.
사진은 러시아 극동 하바로프스크 국제공항. (RFA PHOTO/ 양성원)

현지에서 북한 건설 노동자들을 자주 접하는 한인 이봉수(가명) 씨는 주변에서 납입금 때문에 공사 일감을 찾느라 혈안이 된 이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 씨는 납입금 때문에 고민하는 북한 노동자에게 한국식 마이너스 통장 이야기를 해줬더니 이를 무척 부러워했다는 일화도 소개했습니다.

이봉수:은행에서 대출 받는 것 있잖아요. 마이너스 통장이 있다고 얘기해줬더니 너무너무 부러워하는 겁니다. 돈이 없어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또 그는 납입금을 내지 못해 괴로워하던 한 북한 노동자는 죽기 전에 한번 실컷 먹어보고 싶다, 죽어도 그 전에 실컷 돈 한번 써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선 가족들 생각에 자살도 맘대로 못한다는 게 북한 노동자 김 씨의 말입니다.

김 씨:내가 여기서 자살해 죽으면 내 처, 내 아이가 망합니다. 우리는 자살자 하면 대, 대로 타격을 받습니다. 정권에 대한 반항주의자로, 죽고파도 못 죽어요. 자유가 없다고, 아예 없어요.

하바로프스크 시내에 있는 북한 식당 ‘평양 릉라도 식당'. RFA PHOTO/ 양성원
하바로프스크 시내에 있는 북한 식당 ‘평양 릉라도 식당’. RFA PHOTO/ 양성원

러시아 연해주 지역의 북한 건설 노동자들은 ‘개별청부생(회사 일을 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일감을 구해 일하는 노동자)’일 경우 러시아 화폐 약 4만 루블, 즉 미화로 800 달러의 납입금을 매달 회사에 반드시 바쳐야 합니다.

공사 현장에서 사고로 몸을 다쳐 일을 하지 못할 때도, 또 북한에 처자식을 만나러 다녀오는 기간에도 어김없이 납입금은 매달 바쳐야 하기 때문에 북한 노동자들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또 휴일에도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다는 설명입니다.

김 씨는 회사에 바치는 납입금만 없어도, 아니면 금액이 조금 적기라도 하면 현지에서 어느 정도 먹고 살면서 북한 집에도 더 자주 송금할 수 있을 것이라며 억울한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북한 노동자들은 러시아에서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 다른 어느 나라 출신 노동자들보다 훨씬 더 열심히 일을 하는데도 ‘북한’이란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항상 빚쟁이가 된 심정으로 고통 받으며 고된 타향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그렇게 힘들게 바치는 납입금이 제대로 북한으로 가지 않고 중간에서 회사 간부들이 이를 착복하는 건 더 참기 힘들다며 김 씨는 울분을 터트렸습니다.

김 씨:북한 정부에서 해외 인력 수출을 많이 하는데 노동자 생활 보장은 전혀 없고 일부 해외에 나가 있는 회사 책임자들이, 회사 두령들만 돈 떼먹기 좋고, 숱한 돈을 약취한다...

김 씨는 또 북한 노동자들이 일을 잘하고 성실해서 경쟁력이 있긴 하지만 매달 정해진 날에 납입금을 바쳐야 하기 때문에 공사를 다 끝마치기 전부터 고용주에게 대금을 선불로 달라고 하는 경우가 흔하다고 소개했습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북한 노동자들은 다른 나라 출신 노동자에 비해 공사비 책정이나 일감을 구하는 데 불이익을 당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자유아시아방송(RFA)이 5월 중순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 만난 러시아 벌목장 출신 북한 노동자 박 모 씨도 자신이 어렵게 모은 돈을 북한 간부 때문에 빼앗긴 경험을 털어놨습니다.

92년부터 99년까지 러시아 벌목장에서 일했던 박 씨는 96년부터는 3년 동안 벌목장 관련 일 외에 ‘양돈’ 즉 돼지사육을 통해 꽤 많은 목돈을 모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돈을 맡아줬던 당시 임업대표부 부기과장이 축재 혐의로 보위부에 체포돼 북한으로 송환되면서 자신이 맡겨 놓은 돈까지 모두 날리게 됐다는 겁니다.

이 사건 이후 좌절한 박 씨는 수면제를 다량 복용해 자살 시도까지 했지만 위세척을 통해 간신히 목숨은 구했습니다.

박 씨:(수면제를) 병째로 100알 짜리를 얻었어요. 침실에 와서 죽는 게 낫다, 자살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그래도 한 이틀 만에, 35시간 만에 회복을 했어요.

이후 보위부 요원들은 박 씨를 불만분자로 낙인찍어 감시하기 시작했고 박 씨는 결국 99년 벌목장에서 탈출하게 됩니다.

그 후 러시아 원주민 촌에 정착한 박 씨는 무국적자로 지금까지 15년 이상을 숨어 지내고 있습니다.

주변에서 박 씨를 오랫동안 지켜 본 한국인 기독교 선교사는 북한 당국이 그의 인생을 망쳐놨다며 안타까워했습니다.

외화 벌이를 위해 해외 노동자로 러시아에 나와 열심히 일한 ‘죄’ 밖에 없는 박 씨가 결국 제대로 된 신분도 없이 강제로 타향살이를 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든 것은 바로 ‘북한’이란 국가라는 지적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양성원입니다.

앵커: RFA 기획특집 ‘러시아의 북한 노동자들’ 2부 ‘나는 국가의 앵벌이였다’ 편이었습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3부 ‘잃어버린 고향, 돌아갈 수 없는 조국’ 편을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