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7.27정전 기획특집: 서울과 평양을 통해 보는 남북한 주택건축 변천사]① 해방과 전후 복구시대 / 1945년~1959년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1-0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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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7.27정전 기획특집: 서울과 평양을 통해 보는 남북한 주택건축 변천사]① 해방과 전후 복구시대 / 1945년~1959년
/ 통일건축포럼 제공

RFA 한국전쟁 전정 기획 특집 남북한 살림집 변천사

남북한은 3년간의 전쟁을 치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합니다. 이후 현재까지 분단 상태에 있는데요. 각각 서로 다른 체제 하에서 살림집도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일제 강점기에서 해방된 이후 1960년대까지 남북한 살림집 상황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도움 말씀에는 “통일건축 포럼”에서 활동하는 네 명의 전문가 나와있습니다. 서울과학기술대학 건축학부 옥종호 교수,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 위원회 신규철 건축사, 에드 건축사 설계사무소 이종석 대표 그리고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 함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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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신규철 건축사,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옥종호 교수, 이가 ACM 건축사 사무소 이종석 사장.

기자: 우선 해방 된 1945년 당시 남한의 살림집 상황부터 알아봅니다, 옥종호 교수님이 말씀해 주시죠.

옥종호 교수: 1945년 해방 당시 38도선 이남 지역에는 약 3백만채의 주택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남쪽의 인구가 약 1,600만명, 북쪽은 9백만명이었고 도시인구가 14.5% 수준이었으니까 대략 232만 명이 서울과 남쪽의 도시 즉 부산, 군산, 대구 이런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다고 보면 되겠습니다.

당시 농촌의 경우는 많은 인구가 도시로 이주하였던 관계로 주택문제가 사회문제로 인식되지 않았어요. 하지만 도시의 경우는 주택 부족 문제가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서울의 경우 1945년 8월에 90만명이 거주하고 있었는데 이중 30만명이 집이 없는 사람들이었으니까 세 명 중 한 명은 집이 없는 상황이었지요.

기자: 도시 인구가 늘어나면서 대도시의 주택공급 상황이 안 좋아졌는데요. 당시 서울의 살림집은 어떤 형태였는지 신규철 건축사가 설명을 해주겠습니까?

신규철 건축사: 당시 서울에 있던 주택들은 문화주택, 개량한옥, 영단주택 이라고 불리던 주택이었습니다. 문화주택은 서양식이나 일본식을 모방해서 거실, 식당뿐만 아니라 욕실, 화장실 등의 위생공간을 주택 안에 구성한 주택이었고 그 수요층이 일부 상류층에 한정된 주택이었습니다. 개량한옥은 이름 그대로 전통한옥을 개량한 주택이었는데 평면배치는 전통 한옥과 유사하지만 외관 등의 형태는 문화주택을 모방하면서 간소화한 모습이었고 화장실은 건물 외부인 대문 옆에 두었습니다.

영단주택은 목조평가 기와지붕이었고 일본식에다 조선식을 가미한 것이었습니다. 영단주택이란 이름이 붙게 된 것은 1941년에 조선총독부가 심각한 주택난을 해결하고자 설치한 조선주택영단이라는 법인이 공급한 주택이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이런 도시주택은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대단히 협소했는데 대략 12-14평 정도였습니다.

기자: 북한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이종석 대표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종석 대표: 네 그렇습니다. 해방직후는 공관과 같은 공공시설은 일제의 잔재로 현대화된 모습으로 남았으나, 주택은 남한과 마찬가지로 초가집과 기와집의 한국 전통적인 모습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남과 북의 건축이 매우 다르게 전개된 것은 사회주의와 자유민주주의 체제로 갈라져서라기보다는 한국전쟁으로 인해 기존의 도시와 건축을 이어갈 만큼 북한건축이 남아나질 않았던 겁니다. 당시 북한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굴뚝에서 연기가 나는 집은 모조리 폭격해서 밥을 해먹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런 결과 북한 대도시는 폐허가 될 수 밖에 없었지만 김일성과 나중에 김정일이 건축을 통한 정치를 하기 쉬운 여건이 되었습니다.

기자: 옥종호 교수께서 해방 시점에 도시에 사는 사람 세 명중 한 명은 집이 없었다고 말씀해 주셨는데요. 이렇게 주택부족 문제가 심각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나요?

옥종호 교수: 일제는 31년 만주사변, 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켰습니다. 30년대 이전까지 한반도는 일제의 미곡생산기지 역할을 했었는데 전쟁 때문에 군수공업기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 도시 근로자수가 늘어나게 되었어요. 1930년대 약 10만명이던 공장 근로자수가 36년에는 19만명, 43년에는 55만명으로 13년 동안 5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이로 인해 도시인구가 크게 늘어나면서 주택부족이 심화되었는데 서울의 경우 1925년 주택부족률이 5.5% 였으나 35년에는 22.5%, 44년에는 33%로 늘어났습니다.

1930년대 중반 주택부족난이 심화되면서 민간건설 사업자들이 늘어났었지만 전쟁 때문에 1937년부터 건축자재를 구하기 어렵게 되었지요. 한국전쟁 직전인 1940년대 말까지 주택을 짓고 싶어도 시멘트도 목재도 심지어 못 하나도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고 한국전쟁 직전에 서울의 주택사정은 최악의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기자: 일제에서 해방은 됐지만 한국전쟁을 치르면서 남한의 살림집 상황이 더 나빠졌을 것 같은데요.

옥종호 교수: 전쟁 직전 남한의 주택 재고는 3,284,000 호였습니다. 전쟁 중 약 1/5에 해당하는 60만호가 파괴되었고요. 서울의 경우는 19만호의 주택 중 절반이 파괴되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전쟁 이후 주택문제는 가장 긴급한 사회문제가 되었고요. 정부도 직접 주택공급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고 외국의 원조를 통한 주택공급도 활기를 띠게 됩니다.

기자: 정부가 대규모 살림집 건설에 나섰다고 했는데 신규철 건축사께서 답변을 해주시겠습니까?

신규철 건축사: 전쟁 이후 1953년 이후에는 재건주택, 복구주택, 희망주택, 부흥주택 등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이 이름들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주택을 건설하기 위한 자금들의 원천에 따라 붙여진 이름입니다. 2층짜리 부흥주택이 있지요. 이 주택은 층별 세대분리형 다층주택인데 한 층 당 2세대가 사는 주택이고요. 1955년 12월 16일 청량리와 신당동에 각 50동씩 준공되었습니다. 또 1956년에 종로구 행촌동에 2층 연립주택 11동 52가구, 단독주택 11가구와 함께 행촌아파트라고 불리는 3층짜리 조립식 아파트 3개 동 48가구를 건설하였습니다. 이 아파트에는 수입한 조립식 PC 부재가 사용되었는데 각 세대는 3개의 침실, 주방, 욕실로 구성되어 있었어요. 이 행촌아파트는 주택의 대량건설을 시도한 최초의 사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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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건축포럼 제공

기자: 1950년 중반 이후에 남한에 아파트가 등장을 하는군요? 옥종호 교수님.

옥종호 교수: 1960년 이전의 주택으로서 꼭 말씀 드려야 하는 것이 종암아파트입니다. 종암아파트는 1958년 보건사회부의 부흥주택관리요령에 의거하여 중앙산업이라는 건설기업이 건립하였습니다. 종암아파트는 152 세대를 수용하는 5층짜리 건물 3개 동 아파트로 방 2개, 거실, 주방 창고 발코니 수세식 변기 인조석 싱크대, 침실온돌이 설치된 고급 아파트였습니다. 이 아파트의 설계는 독일기업이 하였지만 한국정부의 기금과 중앙산업이라는 한국 건설업체의 시공으로 건립되었다는 측면에서 한국 아파트의 시작점으로 보고 있습니다.

기자: 전쟁 이후 북한의 복구 사업은 어떻습니까? 차상욱 건축사께서 설명을 해주시죠.

차상욱 건축사: 전쟁 직후, 북한은 인구증가의 규모가 남한에 비해 미미했기 때문에 도시인민을 위한 주택공급에 큰 부담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휴전이 거론되고 있던 1953년부터 북한은 폐허가 된 평양을 ‘모스크바를 본뜬 사회주의 수도’로 재건하겠다는 포부를 키워오다가 다음해인 1954년에 동유럽 공산국가들의 원조를 받아 본격적인 복구작업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 때 복구는 주로 도시내 기반시설과 산업시설에 집중되었고요. 뒤이어 1956년부터 시작된 ‘천리마운동’ 기간에도 도시의 행정시설과 강선제철이나 김책철강과 같은 공업시설 복구에 주력하는 바람에 이 시기의 북한에서 주목할 만한 주택공급 사례는 보이지 않습니다.

기자: 전쟁으로 폐허가 됐던 평양에 본격적으로 사회주의식 건축물이 들어섰다고 보면 되겠군요? 이종석 대표님.

이종석 대표: 북한 주거형태를 보면 도시는 아파트, 농촌지역은 같은 형태의 주택을 반복해서 줄 맞추어 세우는 형식이 특이합니다. 1953년 전후 복구 시기 초기부터 김일성은 설계의 표준화와 건설의 기계화를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건설속도를 높이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역설적이지만 이러한 규격화를 통한 살림집의 공급시스템은 현재에 이르기까지 북한 주거형태가 건축적 개성을 가지지 못한 이유가 되었다는 것도 중요합니다. PC공업은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공급하기 위해 많이 쓰여졌는데 북한이 남한보다도 더 일찍 발달하게 되었습니다.

기자: 그런데 PC 공법이란 뭘 말하는 겁니까?

이종석 대표: PC공법은 미리 공장에서 콘크리트를 찍어 내는 겁니다. 그래서 현장에서는 많은 인력이 필요 없이 빠른 시간 내에 조립할 수 있는 겁니다.

기자: 북한은 전후 복구 재건 사업 때부터 속도전이 등장을 하는 데요. 남한 살림집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신규철 건축사께서 답변을 해주시죠.

신규철 건축사: 전쟁 이후 복구 재건에서 보여주는 남한 살림집의 특징은 시장경제 체제로의 전환이라고 봅니다. 1950년대 후반부터는 주택건설을 수요자 부담으로 전환해서 장기융자금 지원방식을 채택하게 됩니다. 즉, 정부가 주택공급을 일괄적으로 책임지는 방식이 아니라 수요자가 필요한 자금을 부담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게 된 것이지요. 광복직후 국내 건설업체는 지극히 영세한 61개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전후 복구사업 과정에서 차츰 규모를 갖춘 건설사들이 탄생하게 되었는데 현대건설, 대림건설, 동아건설, 삼부토건, 극동건설, 삼환 기업 등이 그때 탄생한 기업들입니다. 1958년에는 건설기업을 체계적으로 육성하기 위한 건설업법도 만들어지고 새로운 희망으로 달려가는 1960년대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차상욱 대표께서 해방 후부터 1960년대까지 남북한 살림집의 특징을 정리하면서 이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차상욱 건축사: 도시지역의 살림집을 가지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이 시기에 남한의 살림집은 두 가지의 특징이 공존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생존을 위한 외피로서의 주택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으로서의 주택이 그것입니다.

반면 북한의 살림집은 아직 뚜렷한 특징을 나타내지 못한 시기였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자유시장경제 원리에 반대하며 출발한 체제 속에서 주택이 갖는 의미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를 따르는 상품이기보다 무상분배 항목 가운데 하나로 변화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북한이 주택공급에 소홀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남한에 비해 수요에 대한 압박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은 흥미롭게 생각됩니다.

RFA 한국전쟁 정전 기획 특집 남북한 살림집 변천사

지금까지 “통일건축 포럼”에서 활동하는 서울과학기술대학 건축학부 옥종호 교수,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 위원회 신규철 건축사, 에드 건축사 설계사무소 이종석 대표 그리고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였습니다. 진행에는 저 이진서입니다. 내일 이 시간에는 1960년대부터 1980년까지 남북한 살림집의 모습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여러분의 많은 청취 바랍니다.

기사 작성 자유아시아 방송 이진서 에디터,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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