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7.27정전 기획특집: 서울과 평양을 통해 보는 남북한 주택건축 변천사] ③ 김정일 시대 vs 고도성장시대 / 1980~2010

워싱턴-이진서 leej@rfa.org
2021-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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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FA 7.27정전 기획특집: 서울과 평양을 통해 보는 남북한 주택건축 변천사] ③ 김정일 시대 vs 고도성장시대 / 1980~2010
/통일건축포럼 제공

RFA 한국전쟁 전정 기획 특집 남북한 살림집 변천사

남북한은 3년간의 전쟁을 치른 후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을 체결합니다. 이후 현재까지 분단 상태에 있는데요. 각각 서로 다른 체제 하에서 살림집도 크게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은 1980년에서 2010년 사이 남북한 살림집의 변화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도움 말씀에는 “통일건축 포럼”에서 활동하는 네 명의 전문가 나와 있습니다. 서울과학기술대학 건축학부 옥종호 교수,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 위원회 신규철 건축사, 에드 건축사 설계사무소 이종석 대표 그리고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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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왼쪽부터 신규철 건축사,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옥종호 교수, 이가 ACM 건축사 사무소 이종석 사장.

기자: 북한은 1980년대는 살림집에서도 건축에 주체미학이 적용된 시기도 알려졌는데요. 그 배경에 대해 차상욱 대표께서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차상욱 대표: 주체미학이라는 것은 김정일이 건축 현장을 시찰하면서 했던 말들에 붙여진 이름이라 보는 게 맞습니다. 남한과 북한의 오랜 체제 경쟁은 이 시기에 사실상 남한의 압도적인 우세로 굳어지고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남한이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연거푸 유치해서 성공적으로 치러내는 모습은 김정일의 눈으로 마음 편히 보고만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이미 김일성의 후계자라는 권위로 평양을 개인적 야심의 전시장으로 만들어 가고 있던 김정일은 1989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을 유치하여 경쟁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한 모습을 보여주었는데요. 이때 행사와 맞물린 주택건설 사업에 일명 ‘주체건축미학’ 이라는 것이 구현되게 됩니다. 평양북쪽의 광복거리와 평양남쪽의 통일거리가 바로 그 현장이었습니다.

기자: 남한은 80년대 “아파트 공화국” 이란 말이 생길 정도로 아파트 건설이 많았습니다. 옥종호 교수께서 당시 남한의 살림집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말씀해 주시죠.

옥종호 교수: 남한이 70년대에 시작된 강남개발의 관성이 80년대를 가로지르면서 서울의 남쪽은 빠르게 신도시의 기틀을 갖추었고 견고하게 부촌의 명성까지 쌓아갔습니다. 대규모 아파트단지는 잠실, 여의도, 반포 등지의 기존 아파트 촌을 더욱 두텁게 확장시켰고 방배동과 화곡동 지역까지 새로운 아파트 촌의 명성을 부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서울에만 머물지 않고 전국 중소 도시로 까지 확대되어 대한민국을 일견 ‘아파트공화국’이라고 불리게 만들 지경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아시안게임 선수촌 아파트’나 ‘올림픽선수촌 아파트’는 그 기획의 동기가 국제행사에서 비롯된 만큼 세계인의 이목을 의식해서 건물의 배치와 건물의 형태에 이상적인 건축설계개념을 가미해보는 그런 시도를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파트 공화국을 대표하는 대부분의 단지들은 소비계층의 취향만을 좇아 아파트 내부의 최대면적 확보와 생활의 편리성만을 중시하는 성냥갑들을 양산하고 있었습니다.

기자: 이렇게 남한에서는 80년이 되면 아파트가 살림집을 대표하는 대명사처럼 되는데요. 그 배경에 대해 신규철 건축사께서 보충 설명을 해주시겠습니까?

신규철 건축사: 아파트도 많은 인구가 대도시인 서울 주변에 더 많이 몰려들었기 때문에 가격도 상승하고 아파트가 지어지면 선호의 대상이 되고 해서 아파트 공화국이란 이름이 나왔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80년대 들어서면서 서울 주변에 신도시가 생기게 됩니다. 지금의 분당, 일산 입니다. 지금은 대도시가 됐지만 당시에 서울시내에 있는 주거공급이나 아파트로는 그 어마어마한 수요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가에서 2백만 호라는 대규모 주택공급 계획을 가지고 서울의 외곽에 해당하는 분당과 일산 지역에 국가적 건설사업을 벌이게 됩니다. 주택보급률이 86%까지 올라갔지만 그래도 보급률이 14퍼센트가 모자란 시기로 주택이 상품으로서 많은 사람이 시설이 더 좋은 아파트로 이사하고 싶어하는 수요가 있었기 때문에 아파트 공화국이라고 불려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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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건축포럼 제공

기자: 이 시기에는 북한도 대규모 살림집 건설이 많았습니다. 당시 북한 살림집의 특징을 차상욱 대표께서 말씀해 주시죠.

차상욱 대표: 특히 광복거리에 지어질 살림집은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할 외국인들의 숙소로 먼저 활용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평소 건축에 대해서도 많은 이야기를 교시형태로 하달해왔던 김정일은 1982년에 자신의 이름으로 발표한 주체사상과 맥을 같이하는 ‘주체건축미학’을 구현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 결과를 보면 살림집의 배치는 소련으로부터 전수받은 ‘주택소구역계획’의 원칙을 완전히 벗어 던졌고 살림집 건물의 형태 또한 획일성 대신 다양성을 지향해야 한다고 선언하면서 소련으로부터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형태의 원형이 독창적이라기보다 서구 모더니즘 건축에 뿌리가 닿아있다는 사실은 ‘주체건축미학의 이론적 근거’가 취약함을 보여주는 것이며 넓은 도로 좌우에 원칙 없이 나열된 살림집 건물들은 그 안에서 살게 될 사람들의 요구보다는 절대적 권력을 지닌 설계자의 개인적 취향이 중점적으로 반영된 주거단지일 수밖에 없음을 여지없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자: 분명히 북한 살림집 건설에 변화가 있었던 시기인데요. 구체적으로 어떤 점을 눈 여겨 봐야겠습니다. 이종석 대표께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이종석 대표: 이 시기의 건축적인 특징은 김정일의 건축철학에 따라 “지나친 장식과 치장을 억제하고 구조의 견고성이나 내구성을 강조하여 신뢰감을 줌으로써 미적 감정을 느끼게 하는 실용성과 같은 합리적인 건축을 추구”하던 시기였습니다. 특히 평양의 아파트는 고층화되면서 1980년대 초에 창광거리와 문수거리의 고층아파트는 김정일이 제시한 “다양성과 통일성, 입체성과 비반복성의 원칙에 따라 평면이 ㅅ형, 어김형, T형, 톱날형, 원형, 6각형 등의 구현으로 다양해 졌다”고 합니다.

또한 김정일은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앞세운 자신의 정치 행보에 맞추어 대규모 기념비적 건축물을 건설했습니다. 1982년 김일성 70회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건축한 주체사상탑은 북한의 가장 대표적인 체제선전용 기념비 건축물로 평양의 랜드마크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기자: 남한에서는 소비자의 요구에 따라 끊임없이 건축 시장도 변화를 갖습니다. 그 현상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옥종호 교수께서 설명해 주시죠.

옥종호 교수: 그렇죠. 2000년대에 돌입하면서 남한은 국민소득 2만달러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국민들의 높아진 소득만큼 다양한 소비욕구가 생겨났고 아파트건축에 있어서는 부유층의 취향에 맞는 상품들이 개발되고 또 소비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이른바, ‘탑상형 주상복합아파트’가 바로 그런 상품으로 등장한 것입니다. 도곡동에 선보인 “타워펠리스”는 궁전의 탑이란 뜻으로 최첨단 설비를 갖춘 대형 아파트로써 도심의 상업지역 안에서 업무유통 기능을 담당하는 저층물을 발판으로 우뚝 세워졌습니다. 건물이 들어선 지역의 땅값이 워낙 비싼 지역인데다 건물의 품질이나 관리 시스템의 편의성 때문에 일반인들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가의 주택인데도 거래가 아주 원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유사한 상품들이 꾸준히 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자: 1980년에서 2010년 사이 남한 살림집 변화에 대해 신규철 건축사께서 마무리를 해주시죠.

신규철 건축사: 많은 사람들이 아파트에 사는 것을 선호한 이유는 편리성에 있습니다. 모든 시설이 내부에 잘 갖춰져 있고 냉온수가 잘 공급되고 이런 측면을 감안할 때 아파트의 폭발적인 수요가 있었습니다. 그에 대비해서 일반 주택도 많이 좋아지는 측면도 있었지만 하나의 집에 여러 가구가 모여 산다고 해서 ‘다세대주택’ 또는 ‘다가구주택’으로 불리는 집들도 보급이 됐습니다. 하지만 가장 선호도가 놓은 집은 아파트였습니다. 그래서 그 시대는 아파트 공화국으로 기억이 되는 것 같습니다.

기자: 90년대로 들어서면서 남북한은 살림집 형태에 있어서 뚜렷하게 비교가 되는데요. 주택분야에 나타난 변화를 차상욱 대표께서 정리하시면서 이 시간 마무리 하겠습니다.

차상욱 대표: 전쟁 이후 남한과 북한이 서로를 경쟁상대라고 인식하고 달려왔다고 전제한다면 공교롭게도 남북 모두가 위기를 맞이했던 90년대는 넘어진 김에 잠시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남한은 수출중심의 경제를 발전시킨 덕분에 주택보급률을 86%까지 끌어 올리는 기염을 토하면서 선진국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었지만 1997년에 외향적인 경제구조가 지닌 오류로 인하여 IMF 관리체제로 들어가는 좌절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반면 북한은 1991년 든든한 뒷배 노릇을 해주었던 소련이 몰락한 데 이어 우상화의 정점에서 신으로 존재했던 김일성이 1994년 죽음을 맞이한 뒤로 방향을 잃어버린 나머지 이른바 ‘고난의 행군’이라 것에 돌입하게 되었지요.

남한의 경우 주택 소유에 대한 개념이 다원화되면서 2000년대 주택시장의 고급화와 다원화로 그 결과를 보여준 것에 비하면 북한의 경우 2000년대에 당이 내놓은 살림집 건축에서 그 본질적인 특성은 전혀 달라진 것이 없다는 사실을 통해 확인되는 부분입니다.

RFA 7.27 정전 기획특집 남북한 살림집 변천사

지금까지 “통일건축 포럼”에서 활동하는 서울과학기술대학 건축학부 옥종호 교수, 대한건축사협회 남북교류 위원회 신규철 건축사, 에드 건축사 설계사무소 이종석 대표 그리고 아이에프 건축사 사무소 차상욱 대표였습니다. 진행에는 저 이진서입니다. 내일은 그 마지막 순서로 2011년부터 김정은 총비서 집권 이후 현재까지 남북한 살림집에 변화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여러분의 많은 청취 바랍니다.

기사 작성 자유아시아방송 이진서 에디터, 웹팀 김상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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