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정희 ] 북한에서부터 소원이 , 비행기가 북한 하늘을 날면 " 우리는 언제 저런 비행기를 타고 세계 일주를 해볼 날이 있을까 " 라고 생각했어요 . 지금도 북한 사람들이 모이면 " 우리가 진짜 북한 땅이 아닌 이 좋은 세상에서 살고 있는 거 맞지 " 란 얘기를 많이 해요 .
영국의 수도 런던에서 자동차로 약 30분 정도 떨어진 작은 외곽 도시 뉴몰든.
약 2만 명의 한인 교포와 700여 명의 탈북민들이 모여 사는 이곳에는 한국 음식점과 상점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서울 맛집’, ‘진고개’, ‘이모네’, ‘빙수 카페’ 등 익숙하면서도 정겨운 한글 간판들이 즐비합니다.
그중에는 ‘커넥트 북한'이란 간판도 있는데,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는 영국의 비영리단체입니다.
탈북민들의 안식처
자그마한 하얀색 건물.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방 3개로 나누어진 공간에 5~60대로 보이는 탈북민들과 젊은 봉사자들이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습니다.
벽 한쪽에 걸린 흰색 칠판에는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에 열리는 영어 수업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탈북민들의 민원을 돕는 자원봉사자들의 움직임이 분주하지만, 목소리에서 묻어나오는 친절함이 마음을 편안하게 해줍니다.
[ 봉사자 ] 대중교통 복지 카드 재발급을 위해 전화 드렸습니다 . 이 어르신은 영어가 좀 어려워서 제가 대신 통화 중이고요 . 이분 성함은 …

영국에 정착한 지 18년 된 김현애(신변 안전을 위해 가명 요청) 씨도 ‘커넥트 북한’의 도움을 많이 받았습니다.
김 씨는 노인들을 위한 무료 대중교통 이용 혜택을 받기 위해 관공서를 찾아야 했는데, 영어를 할 줄 몰라 애만 태웠습니다. 그런데 ‘커넥트 북한’의 젊은 여성 봉사자가 각종 서류를 꼼꼼히 확인하며 챙겨준 겁니다.
[ 김현애 ] ( 커넥트 북한에 ) 세 번 왔어요 . 탈북민들은 편지가 와도 영어를 모르는 분이 많으니까 여기 와서 다 해결하는 거예요 . 여기 도우미들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 ( 그 동안은 ) 자식들이 있으니까 , 애들이 다 알아서 하니까 몰랐어요 . 그런데 지금은 애들이 다 나가 있으니까 …
도움을 받고 한시름 놓은 김 씨는 그제야 맞은 편에 앉은 봉사자에게 웃음을 지어 보입니다.
‘커넥트 북한’에서 탈북민들의 정착을 돕고 있는 이예진 디렉터는 코로나 대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부터 이 일을 시작했습니다. 본인도 탈북민 출신입니다.
영국 뉴몰든에 살고 있는 탈북민들은 개인마다 사연이 있습니다.
북한을 떠나 영국이란 낯선 땅에서 언어와 문화 차이로 어려움을 겪는 탈북민 어머니와 아버지를 생각하니 “함께 일해보자”는 제안을 뿌리칠 수 없었다고 합니다.
[ 이예진 ] 사실 이게 저의 삶이었어요 . 저는 사실 13 살 때부터 엄마를 돕기 시작했거든요 . 옛날에 ' 커넥트 북한 ' 이 없었을 때는 제가 항상 하던 일이니까 . 물론 디렉터라는 직책이 많이 부담스럽지만 , 같은 북한 사람으로서 북한 분들을 돕는다는 게 제일 마음에 와닿았던 것 같아요 .

영국의 탈북민들은 다양한 이유로 ‘커넥트 북한’을 찾습니다.
집을 구하는 것부터 자녀들의 학교 등록, 구직에 필요한 자격증 교육까지, 탈북민들의 정착에 필요한 모든 것을 돕고 있습니다.
하지만 탈북민들이 이곳을 찾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바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섭니다.
[ 이예진 ] 탈북민들이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살았기 때문에 트라우마가 많은 것 같아요 . 지금은 정착 이후 생활이 풍요로워지면서 탈북 과정이나 북한에서 받은 억압이 이제 막 표출되는 거예요 . 지금은 잘 정착했지만 , 지금의 좋은 환경을 누리지 못하게 하는 것은 결국 , 그때 받았던 트라우마인 것 같아요 .
그래서 이들은 탈북민들에게 심리 상담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북한에서의 기억 때문에 이마저도 쉽지 않습니다.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으면 지방으로 강제 이주 시켜버리는 북한 정권을 경험한 탈북민들이기에 좀처럼 마음을 쉽게 열지 못한다고 합니다.
사무실 벽면에 ‘심리 상담을 무료로 제공합니다'라고 쓰인 홍보물이 걸려있습니다. 특히 ‘비밀이 보장되고 안전한 공간'이라는 글귀가 눈에 띕니다.
[ 이예진 ] 이곳에 와서 도움받고 잘 사셨으면 좋겠어요 . 어딘가에 묶여 있지 않고 , 원하는 뭐든지요 . 영국은 자유의 나라잖아요 .
평양냉면과 떡볶이
4월 28일, 점심시간.
뉴몰든 시내의 중심가인 ‘하이스트리트(High Street)’ 거리에 압력밥솥 돌아가는 소리와 어묵 국물 냄새가 가득합니다.
영어로 ‘K-Café’, 한국어로는 ‘통일주방’이라 불리는 자그마한 음식점에서 나오는 소리와 냄새입니다. 일곱 개의 식탁마다 손님이 꽉 찬 이곳은,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운영하고 있습니다.
‘통일주방’의 주방장인 이정희 씨가 바쁘게 김밥을 말고 있습니다. 그의 초록색 앞치마에는 ‘2022 코리아 김치 페스티벌’이라는 글귀가 적혀있습니다.
[ 이정희 ] 한국 사람 , 북한 사람이 여기에서 함께 음식도 만들면서 좋은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해서 시작한 것이 지금은 통일주방이 됐습니다 .
비빔밥과 떡볶이, 양념치킨 등 친숙한 차림표부터 오미자차와 누룽지차까지, 한국의 분식점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합니다.
이중에서 가장 인기있는 메뉴가 뭔지 물어봤습니다.
[ 이정희 ] 평양냉면이 인기 있죠 . 우리 창문에도 ' 평양냉면 개시 ' 라고 크게 붙였습니다 . 그랬더니 사람들이 엄청 난리인 거예요 . 지난주 토요일에는 50 그릇이나 팔았습니다 .

이 씨도 영국에 정착한 탈북민입니다. 그는 북한에 있을 때 국숫집에서 일한 경험을 살려 북한의 냉면 맛을 재현했습니다.
지난해 처음으로 출시했던 냉면 맛을 잊지 못한 손님들 때문에 통일주방은 올해 5월, 평양냉면을 정식 메뉴에 추가했습니다.
[ 이정희 ] 외국인들이 와서도 그래요 . " 작년에 했던 ' 노스코리안 평양 누들 ' 언제 다시 파냐 " 고 묻는 분들이 많아요 . 냉면 육수가 너무 시원하다고 그래요 .
잠시 뒤 금발 머리에 키 큰 영국 남자 손님이 들어왔습니다.
양념치킨을 주문했는데, 접시에 가득 담아주는 한인 직원분의 인심에 그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엄지손가락을 치켜듭니다.
팔뚝만 한 김밥 한 줄, 접시 하나에 가득한 잡채가 모두 5파운드(미화 약 6달러)인데, 영국의 높은 물가를 고려하면 꽤 저렴한 가격입니다.
[ 이정희 ] 저의 마음에는 욕심이라는 게 별로 없어요 . 그러다 보니 많아 분들이 여기 와서 편안하게 잡수고 쉴 수 있는 공간을 항상 마련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

" 서로 돕고 베풀며 살아요 "
뉴몰든의 ‘통일주방’에서 도보로 10분 떨어진 곳에 중화요리 식당인 ‘유미회관’이 있습니다.
이 식당을 운영하는 우옥경 씨도 ‘통일주방’의 이 씨와 똑같은 초록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습니다.
그는 15년 전 탈북민들이 뉴몰든에 정착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이들을 종업원으로 고용했습니다. 뉴몰든에서 탈북민을 처음으로 고용한 한인 교포입니다.
[ 우옥경 ] 주방에서 김치도 담글 어시스턴트 ( 보조 ) 를 구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탈북민이 인터뷰를 하려고 온 거예요 . 한 부부가 북한에서 왔다면서 오셨는데 , 저도 한국에서 반공 교육을 받았거든요 . 그런데 직접 북한에서 오신 분들을 보니까 우리 한국인들하고 똑같이 생겼고 , 다를 바가 없더라고요 . 사투리는 좀 있었는데 , 천천히 얘기하면 다 알아듣겠고요 .
우 씨는 처음 탈북민을 봤을 때 ‘신기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상황이 다시 떠오르는 듯 찡긋 웃어 보입니다.
[ 우옥경 ] 일을 시켜보니까 할 줄을 잘 모르는 거예요 . 저희도 고생해서 가게를 차렸기 때문에 , 이분들을 잘 가르쳐서 우리 식구로 만들자고 생각했죠 . 북한에서 오신 분들에 대해서 처음에는 인식이 좀 그랬는데 , 북한에서 고생했다고 생각하고 , 또 여기까지 왔을 때는 얼마나 힘들었겠나를 생각하면서 정말 우리 집 자식처럼 그렇게 대했어요 .

영국 뉴몰든에서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한인과 탈북민들은 때로는 부모와 자식, 또는 친자매와 같은 사이가 된다고 합니다.
그들에게 남한과 북한 사이의 장벽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 이정희 ] 처음에 우리가 영어도 모르고 , 난민 절차를 거치면서 말도 통하지 않으니까 , 정신적으로 모든 것이 힘들었어요 . 하지만 나중에 비자를 받고 여기에 정착하면서 한국 교회와 한국분들이 많이 도와줬어요 .
‘통일주방’의 이정희 씨는 영국에 정착하기까지 자신이 받은 도움에 감사한 마음을 다시 다른 이에게 베풀며 살아가고 싶다고 말합니다.
[ 이정희 ] 한국 목사님들이 여기서 홈리스 ( 노숙자 ) 들에게 도시락 무료 봉사를 할 때 도와달라고 해서 여러 번 그런 행사를 같이 도왔어요 . 봉사활동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 작년 7 월에는 아프리카 튀니지에 가서 평양냉면을 한 100 그릇 만들었는데 , 1~2 분도 안 돼서 다 나갔어요 . 튀니지 사람들이 " 올해 또 와야되지 않냐 " 며 기다린대요 .
한인교포와 탈북민들이 어우러져 작은 통일촌을 만들어 가는 뉴몰든.
이곳에서 남북의 통일 예행연습은 이미 시작되고 있습니다.
[ 이정희 ] 남과 북 , 우리 한민족이 같이 어울려 음식도 하나 되고 사람도 하나 되는 좋은 계기를 만들어 같이 일하려고 합니다 .

유럽 영국의 도시 뉴몰든에는 수백 명의 탈북민이 정착해 살고 있습니다. 한국을 제외하고 가장 많은 탈북민이 한 지역에 모여 사는 곳입니다. 참혹한 현실을 박차고 나와, 꿈과 자유를 찾아 북한을 떠난 이들은 낯선 땅에서 각자의 정착 일기를 써 내려가고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은 눈물과 웃음, 좌절과 성취로 채워가는 뉴몰든 탈북민들의 일기장을 들여다봤습니다. |
에디터: 박정우, 노정민 웹: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