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정권의 수립과정: 소련군 첫 입성

장진성∙탈북 작가
2013.05.14
tvtalk_kimilsung-305.jpg 1956년 6월 소련 방문 당시 TV대담 중인 김일성(왼쪽).
사진-연합뉴스 제공

오늘부터 3번에 거쳐 일본패망과 함께 소련에 의한 한반도 내 분단고착,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김일성이 어떻게 북한의 지도자로 선발됐는가에 대해 전 동아일보 회장이며 서울대 교수인 김두학 선생의 회고록을 인용해 계속 해서 보내드립니다.

김두학 선생은 해방 후 김일성 정권이 탄생되기까지 북한과 소련에서 있었던 사건을 파헤치기 위해 5년 동안 러시아 땅을 현장 취재했습니다. 특히 소련 붕괴 이후 공개된 소련 문서들, 그리고 북한 정권 수립 과정에 직접 간여했던 소련 군정책임자들과 북한인들의 면담을 통해 수집한 생생한 증언을 모아 북한역사의 진실을 복원한 <비화: 평양의 소련 군정>이란 책을 출간하였습니다. 책은 필자의 주관이 아니라 모스크바에서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국방성, 외무성 등 비밀문서 보관소에서 북한주둔 소련군정의 문서들과 자료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또 당시 평양의 소련군정에서 북한정권 창설 의 주역을 맡았던 소련군 고위 장성들과 권력의 암투 과정에서 밀려나 타국으로 망명해야 했던 북한의 전직 고위 장성과 장․차관들을 만나 북한정권 창출과 소련의 북한 소비에트화 과정에 대한 생생한 증언을 모았습니다. 이 비밀문서들과 증언들을 통해 붉은 군대 소련군은 어떤 계획을 갖고 대 일 전 참여로 북한에 진주했고, 3년여 동안 북한 주둔하면서 추진한 정책들은 무엇인가. 특히 소련은 왜 33세의 소련군 대위 김일성에게 한반도 반쪽을 맡겼는지 등 구멍 뚫린 우리 현대사의 베일 벗기기에 집중했습니다. 오늘은 먼저 소련군의 평양 입성과 일본 군의 대항에 대해 전해드립니다.

1945년 8월9일 개시한 소련의 대 일 전은 세계 전쟁 사에서 유례를 쉽게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최단기간에 벌인 전쟁이었습니다. 소련군은 전쟁 초기 웅기, 나진, 청진 등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을 뿐 나머지 북한 지역의 점령은 ‘식은 죽 먹기’ 였습니다. 특히 소련군은 일본군의 저항 없이 평양에 입성했습니다. 일본군은 제대로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무기를 반납하거나 무장해제를 당해 모든 지휘관이 포로 신세가 되었습니다. 소련군의 대 일 전 성적표가 이를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소련 국방성 비밀문서에 따르면 1945년 8월31일 일본군 전사자(장교와 병사)는 모두 1만2295명, 포로병 13만8687명. 이에 반해 소련군 사망자는 1446명(장교143명, 하사관 527명, 병사 776명)으로 일본군 전사자의 12.9%밖에 되지 않습니다. 소련군은 평양수비대 사령관 다케나토 중장 등 북한지역 주둔 일본군 장성 27명을 포로로 붙잡았습니다. 이들 고위 장성들을 포함한 일본군 포로병들은 대부분 시베리아 등지로 압송돼 소련의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받았거나 실형을 받아 형무소에 감금되거나 집단농장에서 강제 노역을 하다가 일부만 일본으로 송환되고 대부분은 그곳에서 최후를 보낸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1945년 8월26일 밤. 평양인민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은 김용범, 박정애, 최아립 등을 대동하고 이날 소련군 장성으로는 처음으로 평양에 도착한 제25군 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숙소로 찾아가 회담을 했습니다. 통역은 박정애가 맡았습니다. 김용범의 부인 박정애는 유창한 소련 말을 구사하며 오래 전부터 지하에서 소련공산당 지령에 따라 조선 정세를 소련 정보기관에 보고한 혐의로 일본군에 붙잡혀 감옥생활을 하다 해방 후 풀려난 소련공산당의 ‘조선 내 핵심 세포’였습니다.

조만식은 치스차코프에게 “소련군대가 조선에 온 목적은 무엇인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라고 따졌다. 며칠 후 평양에 도착한 제25군 군사위원 레베데프 소장에게 “기본 정치노선은 민주주의여야 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 압박 민족의 한을 자주독립국가로 풀어야 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위해 종교,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보장돼야 한다.”고 강력히 주문합니다.

그러나 평양에 도착한 제25군 지휘부는 참모장 펜코프스키 중장을 중심으로 일본이 사용했던 평안남도 도청에 군정사령부를, 각•도•시•군에 위수사령부를 설치합니다. 평양, 함흥, 신의주 등 주요 도시에는 대좌(대령)를, 중•소도시에는 중좌와 소좌를 위수사령관으로 배치했습니다. 지역 위수사령부에는 군사 부 보안 부 교육부, 산업부, 사회노동부, 농업부 등을 두었습니다. 지역사령관과 부장은 소련군 장교가 맡지만 부사령관은 88정찰여단 출신 조선인 ‘빨치산’들이, 각 부 차장은 재소 고려 인들이 각각 맡게 됩니다. 결정 명령 지휘 책임은 소련군 장교가, 공산당 조직과 주민들의 동향 파악은 88여단의 빨치산이, 군과 주민 간 가교와 통역은 고려인이 맡는 삼각 구조였습니다.

지역 위수사령부는 도•시•군 인민위원회와 조선공산당 시•도•군 당과 행정 사법 경찰권의 지휘 감독권을 쥔 무소불위의 기관이었습니다. 이 같은 소련 군정과 지역위수사령 부 설치 계획은 소련군이 평양에 입성한 후 세운 것이 아니고, 대 일 전 개시 1개월 전인 1945년 7월6일 하바로프스크에 있는 소련군 극동 총사령부(사령관 바실레프스키 원수)가 사전에 준비해 온 것이었습니다. 이 계획은 제 88여단의 대대장 김일성 대위를 비롯, 빨치산 출신 조선 병사들을 북한 주둔 각 지역 위수사령부 부사령관으로 활용하기로 돼 있었습니다.

제1대대장 대위 김일성을 평양시 부사령관, 제2정치부대장 대위 김책을 함흥 시 부사령관, 제2 대대장 강건을 청진 시 부사령관으로 각각 임명하라고 지시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련 국방성의 이 비밀문건은 소련군정을 풀어갈 주목할 만한 대목들이 담겼습니다. 먼저, 지금까지의 역사와 달리 소련군의 대일 전투 지역이 북한 지역으로 국한돼 있음을 보여줍니다. 또 중요한 점은 소련군은 북한 지역에서 일본군을 몰아내 해방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점령군으로 남아 김일성을 비롯해 88정찰여단 소속 항일 빨치산 출신 조선인을 적극 활용해 이 지역을 소련의 위성국이자 ‘극동의 민주기지’로 건설하려는 의도가 숨어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비밀문서는 뒤에서 상세히 다루겠지만 1942년 6월 스탈린의 ‘조선의 정치 군사지도자 양성을 위한 88정찰여단 창설’지령과 1945년 9월 ‘북한에 민주정권을 창설하라’는 비밀지령과 그 맥을 같이하는 대목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소련 외무성이 공개한 스탈린의 면접시험에 김일성과 박헌영이 불려갔고, 또 김일성이 어떻게 소련의 신탁통치를 실현했는가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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