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실체] 김정일에게도 의형제가 있다

장진성∙탈북 작가
2011.08.16
북한의 유일한 지도자, 절대 신으로 선전되는 김정일에게도 어렸을 때 의형제가 있었습니다. 맏형은 오극렬, 둘째는 김정일, 막내는 최룡해 였습니다. 오극렬은 김일성의 빨치산 동지 오중성의 외아들입니다. 북한에는 “충신 오중훕 동지처럼 살자!”는 구호가 있는데 그는 오극렬의 5촌 당숙이기도 합니다. 북한 당 선전선동 자료를 보면 김일성의 첫 부인 김정숙이 해방둥이 고아들을 저택에 데려다 키웠다고 하는데 그가 바로 오극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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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김정일이 지난해 후계자인 셋째 아들 김정은과 함께 군 대장 칭호를 올려 준 최룡해.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진-연합뉴스 제공
그렇게 오극렬은 2년 정도 김일성 저택에서 김정일과 함께 생활하면서 끈끈한 인연을 맺었습니다. 김정숙이 사망하자 김정일은 오극렬을 따라 만경대혁명학원으로 가겠다고 생떼를 쓸 정도였다고 합니다. 당시에는 김일성과 함께 최용건, 최현을 비롯한 다른 빨치산들도 장군으로 불리던 때였습니다. 그 동등한 권력의식 속에서 빨치산 특권층 자녀들은 계모의 손에서 자라는 김정일을 노골적으로 홀대하며 무시했다고 합니다. 그런 김정일을 많이 보호해준 사람이 나이가 십년이나 위이고 주먹도 강했던 오극렬이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구소련 프룬제 군사대학 졸업 후 1964년 경 공군대학 학장으로 공식 취임한 오극렬은 김정일에게 권력의 눈을 뜨게 해주고 야망을 키워준 정치적 스승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대학생이었던 김정일은 오극렬의 사무실에서 거의 매일처럼 함께 숙식하면서 권력의 미래에 대해 자주 논의했다고 합니다.

한편 최룡해는 김정일의 옆집 친구로 시작된 의형제였습니다. 6.25전쟁 후 김일성 저택 옆에는 ‘최현장군’이란 명패가 붙은 큰 저택이 있었는데 최룡해는 바로 그 집 막내였습니다. 최현은 북한 영화에서도 보여주듯 걸핏하면 권총으로 사람들을 위협하는 다혈질의 성격이었습니다. 총소리가 울리는 곳엔 반드시 분노한 최현장군이 있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집안에 처와 첩을 함께 거느리고 사는 위인이기도 해서 그런 아버지가 못마땅한 최룡해는 늘 밖으로 돌며 살았다고 합니다. 계모의 눈치 밥을 먹고 산 김정일은 그런 최룡해를 누구보다 잘 이해해주었고, 동생처럼 챙겨주었다고 합니다.

그렇듯 그 3명은 의형제가 되어 김정일은 국가주석, 오극렬은 무력부장, 최룡해는 당 총비서가 되자고 약속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김정일이 그 3대 권력을 다 가졌지만 아마 그 때까지만 해도 그 세 명은 완벽한 김 씨 신격화 국가를 감히 상상 못 했던가 봅니다. 하지만 유년시절의 그 약속을 지켜 김정일은 세습권력을 시작하면서 오극렬은 군 수뇌로서, 최룡해는 당조직부 고위직으로서의 출세 길을 열어줍니다. 오극렬은 1977년 10월 인민군 부총참모장, 1979년 9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겸 당 정치국 후보위원이 됩니다. 1980년 9월 인민군 상장을 거쳐, 1985년 4월 인민군 대장으로 진급하면서 북한 군부 내 실제적인 통수권자로 완전히 자리 잡게 됩니다.

그러나 김일성의 최측근인 무력부장 오진우의 권력에 부딪혀 2인자로 머물게 되자 그를 무력화시킬 목적으로 김정일과 야합하여 군 정치위원제도 폐지를 주장하게 됩니다. 그 이유는 북한 군부 내 상위 감시권력인 정치위원들이 모두 김일성 측근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1966년 민족보위상이며 부주석이었던 김창봉의 무력쿠데타에 당할 뻔 했던 김일성은 군 지휘계통의 이원화를 적극 추진했고 결국 정치위원제도를 강화하면서 자기 측근들로 채웠던 것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김정일의 과도한 세습권력이 오극렬을 통해 군부까지 장악하려는데 대해 불안감을 느꼈던 김일성은 이를 계기로 오진우를 비롯한 군 측근들을 동원하여 오극렬을 총참모장직에서 해임하도록 했습니다.

하지만 김정일은 이듬해인 1989년 오극렬을 자기의 당조직부 산하 부서인 작전부장으로 임명하여 당 안으로 끌어들이게 됩니다. 김정일은 최룡해 역시 당 조직부 고위직으로 키워줍니다. 우선 다른 빨치산 출신 자녀들은 중앙당에서 받지 않도록 제한하면서도 오직 최현의 두 아들인 맏아들 최룡택과, 최룡해 모두를 중앙당 조직부 핵심부서로 불러들입니다. 그 이유는 김정일의 세습권력 과정에 최현이 큰 공을 세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김정일의 당조직비서 임명 관련 당정치국 회의에서 많은 간부들이 집단 반발하자 최현이 권총을 빼들고 쏴죽이겠다고 난리를 친 일화는 이미 북한 내에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김정일은 최룡해의 당권 지위를 키워주기 위해 당조직부 청년지도사업과 과장을 걸쳐 사회주의중앙노동청년동맹 위원장으로 임명합니다. 북한 권력가들이 모두 김정일 대하듯 최룡해 앞에서 굽신 거릴 만큼 그의 정치적인 권력의 힘은 대단했습니다. 최룡해는 김정일의 신임을 업고 평양이 서울 88올림픽에 도전하여 주최했던 세계13차청년학생축전을 총지휘하게 됩니다. 그 업적을 근거로 당조직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려던 찰나 당시 당조직부 제1부부장이었던 리제강의 지시로 국가보위부가 중앙사로청비리를 수사하게 됩니다.

수사의 초점은 중앙사로청 비리와 도덕적 부패였습니다. 중앙사로청 산하 외화벌이 기관인 은별무역관리국 리병서 국장 비리로 시작된 수사는 최룡해로까지 이어지는데 마침 가택수색에서 미화 300 달러가 발견됩니다. 그러자 남한의 안기부로부터 받은 검은 돈이라는 부풀린 자료가 김정일에게 보고되고, 공식적인 당조직부 검열대가 구성되어 최룡해 이하 사로청 모든 간부들이 직무정지, 조사를 받게 됩니다. 당조직부 검열총화에서 제기된 최룡해의 자료들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북한 내 모든 청년들을 거느리고 있는 중앙기관 수장으로서 전국 각지의 미녀들을 차출하여 기쁨조를 두었고, 매 주 한번 꼴로 평양 시 만경대구역에 위치한 사로청 산하 도라지호텔에서 성적인 향연을 즐겼습니다. 심지어는 성적 취향을 만족시키기 위해 청년동맹협주단 미녀 6명에게는 일인당 3,600달러를 주고 틀니를 하도록 강요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를테면 김정일의 부패와 타락을 모방한 북한 내 2인자의 권력향연이었던 셈입니다. 가택수색에서 나온 미화 300만 달러도 최룡해가 사로청은 물론 온갖 권력 이권을 이용하여 챙긴 뇌물현금이었습니다.

최룡해는 해임되어 자강도 농장원으로 추방되고, 사로청은 근본적인 조직쇄신 명목으로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명칭을 바꾸게 됩니다. 그러나 최룡해는 3년 후 평양시중앙열난방기업소 당비서를 걸쳐 다시 중앙당 총무부 과장으로, 황해북도 도당책임비서, 현재는 중앙당 근로단체부 비서로 복원되었습니다. 최룡해와 오극렬의 저택은 평양 시 대동강구역 문수 동에 있는 은덕촌에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 김정일의 최측근들이 모여 사는 그 은덕촌에 가 본적이 있습니다. 24시간 인민무력부 청사 경무부가 지키는 그 은덕촌은 총 6동으로 구성돼 있는데 1층에 한 세대가 살도록 설계되어 있고 그들만을 위한 디젤발전소 까지 따로 갖추어져 있습니다. 내부는 이태리 붉은 대리석으로 치장돼 있고, 한국의 에이스침대회사 가구들로 갖추어진 호화주택입니다. 북한에서 은덕촌은 권력 전시장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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