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김일성 출생의 진실
워싱턴-이규상 leek@rfa.org
2010.09.14
2010.09.14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한에서 4월 15일은 태양절입니다.
북한에서는 김일성이 사망한지 3년이 지난 1997년부터 김일성의 생일을
‘태양절’로 부르고 있습니다.
1912년 4월 15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하리칠곡, 오늘날 만경대로 불리는 곳에서 태어나 북한의 지도자로 올라선 김일성. 오늘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에서
그의 가계와 성장과정을 살펴봅니다.
1912년 4월 15일 저녁 영국의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을 건너다 빙산에 부딪혀 천오백여명의 희생자를 내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합니다. 같은 시간 지구 반대쪽 한반도에서는 조선민족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고 갈 인물이 태어납니다. 김성주가 바로 그 인물입니다.
김성주라는 이름은 김일성의 어릴 적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그의 아버지 김형직 또는 할아버지 김호현이 지어준 이름으로 김일성이 자라서 기둥이 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김일성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지금 남한의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지식인 이였고 어머니 강반석의 아버지는 학교 교장을 지냈습니다. 어머니 강반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습니다. 강반석의 아버지, 즉 김일성의 외할아버지는 교육자이기도 했지만 칠골교회 장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수 십 년간 김일성과 김정일 등 북한의 지도층을 연구해온 서대숙 전 하와이대 석좌교수는 김일성의 유년시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대숙: 창덕국민학교를 다녔다. 북한에 아직도 이 학교가 있다. 단장을 해서 혁명전적지 처럼 꾸며놓았다. 김일성은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만주로 갔다... 만주로 가서 팔도구라는 동리의 소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최근 김정일이 방문했다는 길림에 있는 용문 중학교를 다녔다. 거기서 좌익계통과 통해 회의를 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다.
북한 측 주장에 따르면 감옥에 투옥되기 3년 전인 1926년 김일성은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불과 14살입니다. 다시 서대숙 교수의 말입니다.
서대숙: 자료는 없다. 북에서 만들어놓은 자료 밖에는... 혁명 박물관에 가면 ‘ㅌ.ㄷ 반제국주의투쟁’을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자료상으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김일성은 수개월동안의 감옥살이를 하는 중에 용문중학교에서 퇴학을 당합니다. 1930년 5월 출옥한 김일성은 만주에 있는 소학교에서 선생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서대숙: 김일성이 감옥에서 나와 카륜이라는 곳으로 간다. 길림에서 연길까지 가는 사이에 있는 카륜이란 동내에서 소학교를 가르친다. 그러다가 유격대에 들어간다. 그가 싸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부터 기록이 있다.
북한에서는 당시 김일성이 소학교 선생으로 활동하면서 만주일대에 소학교 여러 곳을 설립해 어린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교육했다고 주장합니다. 서대숙 교수는 이 또한 북한의 과대선전에 불구하다고 말합니다.
서대숙: 학교를 지은 것은 없고 순덕 소학교라는 조그만 학교에서 가르쳤다. 소학교에서 마르크스 주의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북한 측이 과대하게 포장해 얘기한 것이다. 그 벽천 소학교에서 한국어로 김일성이 그런 것을 가르쳤을 리도 없고 가르칠 자료도 없었다. 소학교에서 가르쳤다는 사실은 인정해 줄 수 있지만 그곳에서 좌익계통 사상을 주입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가 없다.
서대숙 교수는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가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의 항일운동 활동역시 과대선전과 과대포장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예로 북한은 김일성이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항일 투쟁을 했던 이종락의 부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서대숙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대숙: 석가모니와 같이 낳자마자 장군이 됐다는 식으로 북한에서는 주장하는데 이종락 뿐만 아니라 양세봉과 같은 독립운동가들 밑에서 김일성이 싸운 것은 사실이다. 결국 그 사람들이 다 중국 사람들과 같이 항일 운동을 한다. 조선 사람들의 청산리전투와 같은 쪽으로는 참가를 하지 않았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후 중국과 만주 각지에서는 조선인들과 중국인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가 생겨났습니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까지 올라온 김일성은 같은 해 5월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전선을 위한 조국광복회에 가담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은 1937년에서 1940년 절정에 이르게 되고 1937년 6월 4일에 벌어진 작은 규모의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을 세상에 알리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다음 시간에는 김일성을 전설적인 영웅으로 만든 ‘보천보 전투’의 진실을 파헤쳐 봅니다.
1912년 4월 15일 저녁 영국의 타이타닉호가 대서양을 건너다 빙산에 부딪혀 천오백여명의 희생자를 내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합니다. 같은 시간 지구 반대쪽 한반도에서는 조선민족의 운명을 비극으로 몰고 갈 인물이 태어납니다. 김성주가 바로 그 인물입니다.
김성주라는 이름은 김일성의 어릴 적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그의 아버지 김형직 또는 할아버지 김호현이 지어준 이름으로 김일성이 자라서 기둥이 되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김일성은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 김형직은 지금 남한의 숭실대학교의 전신인 숭실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던 지식인 이였고 어머니 강반석의 아버지는 학교 교장을 지냈습니다. 어머니 강반석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기도 했습니다. 강반석의 아버지, 즉 김일성의 외할아버지는 교육자이기도 했지만 칠골교회 장로를 지내기도 했습니다. 수 십 년간 김일성과 김정일 등 북한의 지도층을 연구해온 서대숙 전 하와이대 석좌교수는 김일성의 유년시절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대숙: 창덕국민학교를 다녔다. 북한에 아직도 이 학교가 있다. 단장을 해서 혁명전적지 처럼 꾸며놓았다. 김일성은 소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만주로 갔다... 만주로 가서 팔도구라는 동리의 소학교를 다녔다. 그리고 최근 김정일이 방문했다는 길림에 있는 용문 중학교를 다녔다. 거기서 좌익계통과 통해 회의를 하다가 잡혀서 감옥에 들어갔다.
북한 측 주장에 따르면 감옥에 투옥되기 3년 전인 1926년 김일성은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당시 김일성의 나이는 불과 14살입니다. 다시 서대숙 교수의 말입니다.
서대숙: 자료는 없다. 북에서 만들어놓은 자료 밖에는... 혁명 박물관에 가면 ‘ㅌ.ㄷ 반제국주의투쟁’을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자료상으로는 아무것도 가지고 있는 것이 없다.
김일성은 수개월동안의 감옥살이를 하는 중에 용문중학교에서 퇴학을 당합니다. 1930년 5월 출옥한 김일성은 만주에 있는 소학교에서 선생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서대숙: 김일성이 감옥에서 나와 카륜이라는 곳으로 간다. 길림에서 연길까지 가는 사이에 있는 카륜이란 동내에서 소학교를 가르친다. 그러다가 유격대에 들어간다. 그가 싸우기 시작한 것은 1930년부터 기록이 있다.
북한에서는 당시 김일성이 소학교 선생으로 활동하면서 만주일대에 소학교 여러 곳을 설립해 어린학생들에게 공산주의를 교육했다고 주장합니다. 서대숙 교수는 이 또한 북한의 과대선전에 불구하다고 말합니다.
서대숙: 학교를 지은 것은 없고 순덕 소학교라는 조그만 학교에서 가르쳤다. 소학교에서 마르크스 주의를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것은 북한 측이 과대하게 포장해 얘기한 것이다. 그 벽천 소학교에서 한국어로 김일성이 그런 것을 가르쳤을 리도 없고 가르칠 자료도 없었다. 소학교에서 가르쳤다는 사실은 인정해 줄 수 있지만 그곳에서 좌익계통 사상을 주입했다는 것은 인정할 수 가 없다.
서대숙 교수는 김일성이 항일운동에 가입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인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김일성의 항일운동 활동역시 과대선전과 과대포장이 있기는 마찬가지입니다. 한 예로 북한은 김일성이 중국 사람들 사이에서 항일 투쟁을 했던 이종락의 부하였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있습니다. 서대숙 교수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대숙: 석가모니와 같이 낳자마자 장군이 됐다는 식으로 북한에서는 주장하는데 이종락 뿐만 아니라 양세봉과 같은 독립운동가들 밑에서 김일성이 싸운 것은 사실이다. 결국 그 사람들이 다 중국 사람들과 같이 항일 운동을 한다. 조선 사람들의 청산리전투와 같은 쪽으로는 참가를 하지 않았다.
1931년 9월 만주사변이후 중국과 만주 각지에서는 조선인들과 중국인들로 구성된 항일유격대가 생겨났습니다.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6사 사장까지 올라온 김일성은 같은 해 5월 독립운동단체들의 통일전선을 위한 조국광복회에 가담하게 됩니다.
김일성의 항일 무장 투쟁은 1937년에서 1940년 절정에 이르게 되고 1937년 6월 4일에 벌어진 작은 규모의 보천보 전투는 김일성을 세상에 알리게 되는 중요한 사건이 됩니다. ‘김씨 일가의 거짓과 진실’ 다음 시간에는 김일성을 전설적인 영웅으로 만든 ‘보천보 전투’의 진실을 파헤쳐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