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대혁명소조운동과 김정일의 후계세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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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이 권력세습을 위해 1967년 내각 부수상 박금철을 비롯한 국내파 고위간부들을 숙청하면서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중앙당 선전선동부를 장악통제하는 것이었습니다. 국내파를 숙청하고 그들이 주도하였던 선전선동사업을 김정일이 자진해서 맡으면서 그가 맡은 직책은 중앙당 선전선동부 문학예술 지도과장이었습니다. 김정일은 당시까지 중앙당 내부에서 사용되었던 ‘당적사상체계’라는 표현을 ‘당의 유일사상체계’로 바꾸어 부르도록 하면서 북한사회에 오직 하나의 사상, 김일성의 유일사상만이 지배되도록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유일적인 지도사상이 주체사상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하고 김씨 일가의 우상화선전을 통해 김정일의 권력후계 정당성이 강조되기 시작하게 된 데는 3대혁명소조운동이 큰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북한의 3대세습의 근원인 김정일의 후계세습과정의 단계들을 통하여 여기에 숨겨진 3대혁명소조운동의 역할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김정일에 의한 북한에서의 3대세습은 동유럽 공산권 국가들이나 중국에서도 볼 수 없는, 북한에서 소위 말하는 ‘가장 발전된 사회’인 공산주의 사회의 요구에도 부합되지 않는 정치권력 형태입니다. 새로운 현대판 후계세습을 강행하기 위한 김정은 후계구축과정은 준비단계를 시작으로 구축단계, 공고화단계를 거쳤습니다. 준비단계는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64년 중앙당 조직지도부에 들어가서부터 1973년 9월에 진행된 당중앙위원회 제5기 7차전원회의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 겸 중앙당 조직부장으로 되었던 10년 동안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을 갓 졸업하여 중앙당 조직지도부 지도원으로 배치되어 내각 부수상 박금철을 중심으로 한 국내파 숙청으로 김일성의 인정을 받은 김정일은 선전선동부사업을 맡아보면서 당내에 생활총화제도를 내오면서 당원들에 대한 통제력과 당내 규율성을 제고하여 자기의 입지를 더 든든히 다지었습니다.

김정일은 문화예술분야에서 2일 당생활총화제도를 내오고 이를 통해 선전부문에 종사하는 간부들과 예술인들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해 나갔습니다. 그리고 2일 당생활총화를 통해 자신에 대한 충성분자들을 만들어나가는 과정에 이 생활총화제도를 중앙당 간부들과 군부대 고급군관(고위급 장교)들에게도 적용하도록 하였고 점차 전국 각지에 확대하도록 하였습니다. 중앙당과 내각, 중앙기관들에 대한 당적지도를 생활총화를 통하여 확고히 보장할 수 있었지만 지방당과 전국의 모든 단위들에 대한 당적 지도를 실현하기 위하여 김정일이 묘안을 내놓은 것이 3대혁명소조였던 것입니다.

후계자 구축단계인 1974년에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을 내놓고 3대혁명소조의 기본 과업이 이를 관철하기 위한 것이었던 것만 보아도 이 소조운동의 목적을 잘 알 수 있습니다. 10대원칙 1조 1항에 있는 내용은 ‘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는 사업을 끊임없이 심화시키며 대를 이어 계속해 나가야 한다’입니다. 여기에서 ‘대를 이어 계속해나가야 한다’는 표현은 김일성에 이어 김정일 자신을 영원한 수령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강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3조 1항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밖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확고한 립장과 관점을 가져야 한다’, 2항 ‘정치사상적으로 옹호하며 목숨으로 사수하여야 한다’라는 문구도 이전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것들입니다. 그리고 10조 1항에 ‘전당과 온 사회에 유일사상체계를 철저히 세우며 수령님께서 개척하신 혁명적위업을 대를 이어 빛나게 완수하기 위하여 수령님의 령도 밑에 당중앙의 유일적지도체제를 확고히 세워야 한다’에서 자신을 당중앙으로 지칭하면서 유일적 지도체제를 확고히 세워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하였습니다.

구축단계는 1980년 10월 조선노동당 제6차대회가 진행되는 시기까지 지속되면서 김정일은 철두철미 유일한 후계자로 등극하였고 북한사회의 3대혁명소조는 당과 국가의 모든 기관들과 지도간부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1974년 2월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원칙의 발표와 동시에 김정일은 중앙당에 3대혁명소조사업부를 내오고 소조원들을 통해 북한 전 지역을 자기의 통제하에 두게 되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1974년까지는 중앙당과 중앙기관에 대한 통제감시를 중심에 두었다면 그 이후부터는 전국에 파견된 3대혁명소조원들을 통해 북한 전 지역을 자기의 통제권 안에 넣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1975년 3월에는 중앙과 도, 시, 군에 있던 3대혁명지도소조 종합실을 중앙당의 산하조직으로 개편하고 3대혁명소조사업부로 명칭을 개명하였습니다.

결국 김정일의 후계자 준비단계에서는 3대혁명이라는 표현과 이를 실천하기 위한 3대혁명소조가 존재하지 않았으나 후계자 구축단계에 들어서면서 북한전역에 3대혁명소조원들이 파견되면서 해당지역의 당과 국가기관은 물론 공장기업소, 농촌들에도 김정일의 유일적인 장악통제가 강화되었던 것입니다. 구축단계에는 해당지역에 대한 북한당국의 정책을 전달해주고 사상학습과 인간개조사업이 사상사업의 중심이 되어 북한주민들을 김일성과 김정일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는 맹신들로 세뇌시켰습니다.

그러나 1980년 이후로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사상’을 무장하는 단계에서 장악통제하고 사상투쟁으로 처벌하는 공고화단계로 들어서면서 3대혁명소조원들도 담당기관에 대한 ‘장악보고’가 사업의 주선이 되었습니다.

지난기간에는 검열그루빠들이 단기적으로 몇 명에서 많아야 20여 명 안팎에서 진행하던 것이 3대혁명소조원들은 3년이상 파견지에서 생활하다보니 현장에서는 애로가 많았습니다. 짧은 기간이면 뇌물이나 주고 어물쩍하게 넘길 수 있었지만 3대혁명소조원들은 배치되어 수년간 생활하다 보니 현장의 실체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충신과 간신을 첫눈에는 알 수 없어도 오랜기간동안 생활하다 보면 잘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지난 기간의 검열그루빠들은 당과 국가기관, 사법기관 등에서 경험이 많고 연령층도 높은 사람들이었다면 3대혁명소조운동은 젊은 대학생들이 대다수다 보니 해당기관에서 잘못된 문제점을 아무런 고려도 없이 김정일에게 3대혁명소조사업부를 통해 직보하다 보니 오랜 간부들도 비유를 맞추기가 힘들었습니다.

김정일의 후계 구축의 공고화단계에 들어서면서 김일성의 교시보다 김정일의 말씀 비중이 더 많아졌고 사회 전반이 김정일의 지시 관철에 더 몰두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김일성은 1973년 3월 14일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강서확대회의에서 3대혁명소조원들은 사상혁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결함이 있는 사람 자체를 반대하고 목을 떼는 투쟁이 아니라 사람들의 머릿속에 남아있는 낡은 사상을 뿌리 빼고 그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 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지만 김정일은 직보선을 통하여 보고된 문제가 된 간부들은 무조건 해임철직하게 하였고 거슬리는 것들은 숙청하였습니다.

지난 기간에 중앙당과 지방당에 존재하던 신소과들을 통하여 보고되면 그 내용들이 위에 전달되기 전에 신고자에 대한 제재와 복수로 돌아왔지만 3대혁명소조사업부를 통한 직보선(直報線)은 바로 김정일에게 전달되어 사회 전반이 3대혁명소조를 무서워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간부들은 해당기관에 파견되어 내려온 소조원들에게 잘 보여 그들이 직보하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였고 1970년대와 1980년대는 김정일의 후계세습의 구축과 공고화과정속에 3대혁명소조원들의 권한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갔습니다. 다음시간에는 1987년에 3대혁명소조에 파견되었던 본인의 경험을 통해 3대혁명소조활동의 진속을 더 파헤쳐보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