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창건사적관’의 숨겨진 계보

김주원∙ 탈북자
2017-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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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72주년 기념일인 10일 당원들이 당창건사적관을 참관하고 있다.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 72주년 기념일인 10일 당원들이 당창건사적관을 참관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북한의 노동당 창건일인 10월 10일도 지나가고 이제는 김일성이 ‘타도제국주의동맹’이라는 첫 혁명조직을 만든 10월 17일입니다. 북한은 1945년 10월 10일 노동당을 창건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 이날은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열렸던 날이었습니다. 이날 회의는 김일성이 직접 주도하지 않았으나 북한은 이날을 조선노동당창건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조선노동당의 실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북한당국이 노동당이 창당된 장소라고 주장하는 ‘당창건사적관’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평양시 중구역 련화1동에 있는 ‘당창건사적관’의 숨겨진 진실에 대하여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평양지하철 봉화역에서 내리면 인근에서 유럽식으로 지어진 건물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북한이 지금껏 조선노동당이 창건된 역사적인 장소라고 주장하고 있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해방 후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가 있던 곳입니다.

내부에는 김일성이 이용하던 집무실들이 있고 건물 서쪽으로 100미터 거리에 김일성이 살던 옛 자택이 아직까지 보존돼 있습니다. 김일성은 해방 후부터 이곳에서 업무를 보다가 1970년 10월에 서문동의 새로 지은 집무실로 이사를 했습니다. 김일성은 집무실을 옮기면서 남아있던 이 건물을 ‘당창건기념관’으로 꾸리도록 지시했습니다. ‘당창건기념관’이었던 이 건물은 1980년대 김정일에 의해 ‘당창건사적관’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지금까지 북한 주민들의 교양장소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해방 전 2층으로 건설된 이 고풍스러운 건물의 주인이 과연 누구였는지에 대해 북한은 일절 언급이 없습니다. 해방 전은 물론 해방 후에도 이 건물엔 주인이 있었으며 당시 규모로 판단할 때 상당한 재산가였음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 건물의 소유주는 해방 후 북한의 초대 재정상이었고 친일파였던 박정식이었습니다. 박정식은 현재 북한 최고재판소 소장인 박명철의 부친입니다. 박정식의 아들로 북한 최고재판소장인 박명철은 역도산의 사위로 잘 알려진 인물입니다.

박명철의 부친 박정식은 해방 전 평양에 여러 채의 건물을 소유하고 큰 양복점을 운영하던 재벌입니다. 골수 친일파인 박정식은 생전에 김일성이 “빈 배낭만 메고 온 우리 빨치산을 극진히 도와준 사람”이라고 늘 회고하던 인물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조국이 해방된지 한 달도 더 지난 1945년 9월 19일에 소련의 화물선 뿌가쵸프호를 타고 원산항으로 입항했습니다. 따라서 해방 전부터 북한에서 활동하다 일제가 패망하면서 권력을 잡은 국내 공산당 세력들에게 밀리는 형편이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점령군인 소련군에서 대위로 활동하면서 빨치산 세력들을 빠르게 주위에 집결시켰습니다. 해방된 조국에서 소련의 든든한 지원을 받으며 세력을 확대해 나가는 김일성을 향해 눈치 빠른 친일파들이 저마다 줄을 서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들이 북한에서 애국열사로 둔갑한 친일파 박정식과 신상균이었습니다. 북한의 초대 재정상이었던 박정식과 금수산의사당 경리부장이었던 신상균은 자신들의 친일행적을 덮어버리기 위해 김일성에게 매달려 지극정성을 다했습니다.

친일행적에도 불구하고 초대 재정상의 자리까지 꿰찼던 박정식은 1948년 월남도주 형식으로 한국에 침투해 국회의원 자리까지 타고 앉았습니다. 김일성의 앞잡이가 된 박정식은 국회의원이라는 지위를 악용해 6·25 전쟁을 유도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대남공작원으로 활동하던 중 6.25 전쟁 직전 한국 육군 정보국장 김창룡에게 체포되어 사형에 처해졌습니다. 박정식은 대한민국에 침투하여 김일성의 앞잡이 노릇을 하였지만 6.25 전쟁 이후 북한에서 월남반동분자로 취급되기도 하였습니다.

박정식이 간첩으로 처형된 후 북한은 월남한 반동분자의 가족이라는 누명을 씌워 그의 가족들을 모두 양강도 산간오지로 추방했습니다. 1950년대 북한 노동당지도부는 국내파와 연안파, 소련파와 김일성파 사이의 패권다툼이 절정이었습니다. 6.25 전쟁당시 박헌영과 이승엽을 간첩죄로 몰아 남노당파를 숙청한 김일성은 1956년 8월 종파사건을 계기로 연안파와 소련파를 숙청해버렸습니다. 1967년에는 박금철을 비롯한 국내파까지 숙청해 노동당 내부에서 1인 독재체제를 구축했습니다.

1960년대 말 1인 독재체제를 완성한 김일성은 부귀영화를 마음껏 즐겼습니다. 현재까지 보존돼 오고 있는 ‘당창건사적관’도 그렇지만 그곳으로부터 백여 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김일성의 옛 저택도 모두 박정식이 제공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일성은 박정식이 제공한 ‘당창건사적관’ 건물에서 25년간 업무를 보면서 북한을 이끌어왔습니다. 이곳에서 생활을 마치고 평양시 중구역의 호화집무실에 자리를 옮긴 김일성은 그동안 살아온 건물을 ‘당창건사적관’으로 꾸리라고 지시했습니다.

옛 자취가 깊숙이 배인 건물을 자신의 우상화에 이용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김일성은 중구역 별장으로 이사를 가게 된 때에야 비로소 옛 건물주 박정식의 행방을 물었고 그의 가족이 추방되어 양강도 오지에서 산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미안함은 있었던지 김일성은 그동안 찾지 않던 박정식의 가족들을 모두 평양으로 데려와 좋은 집에서 살도록 배려했습니다. 이렇게 잊혔던 박정식은 애국열사로 부상하고 그의 아들 박명철은 평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박명철이 체육을 즐긴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그를 조선체육대학에 입학시켰습니다. 조선체육대학에 다니던 박명철은 역도산의 딸 김영숙과 눈이 맞아 결혼까지 하게 되면서 북한의 체육상으로 승진해 인생의 황금기를 맞았습니다. 그동안 신세를 졌던 집주인에게 김일성이 합당한 대가를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김일성은 훗날 노동당 요직 간부들과 ‘당창건사적관’을 찾아와 “이 건물에서 업무를 보며 밤을 새던 날들이 많았는데 늘 꿈자리가 사나웠다”고 말한 적이 있었습니다.

김일성은 이 건물에서 생활하는 동안 내부 경쟁자들을 잔인하게 숙청하고 1인 독재체제를 완성했습니다. 종파청산이라는 구실로 경쟁자들을 모조리 숙청하다보니 항상 불안 심리에 살았고 그런 관계로 꿈자리가 사나왔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이 건물에서 가까운 옛 김일성의 저택은 김정숙과 살림을 차렸던 장소이고 후처인 김성애를 맞아들여 생활을 하던 곳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생전에 김일성은 “당창건사적관은 멀리서 봐도 마음이 슬퍼진다”며 이곳을 거의 찾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선전장소로 이용되고 있는 ‘당창건사적관’은 한때 친일파였으나 줄서기를 잘 한 탓에 애국열사로 둔갑한 박정식, 그의 비극적 운명과 함께 조선노동당의 어두운 계보가 숨겨져서인지 초라하고 소름이 끼치는 분위기를 숨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북한 당국은 옛 북조선공산당 중앙조직위원회 청사였던 ‘당창건사적관’에 대해 일제가 조선의 재부를 수탈하기 위해 만든 장소였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옛 주인이 친일파였던 박정식이라는 사실은 전혀 밝히지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당창건사적관’의 옛 주인마저 밝히지 못하고 있는 북한, 계급적 갈등과 민족내부 문제를 악용해 생존의 기회로 삼는 김정은 정권에서 올바른 역사와 왜곡되지 않은 진실을 과연 찾아볼 수 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지금까지 진행에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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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김일성 일가에 대한 진실을 추적하는 김 선생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북한 초대 재정상 박정식의 남한 행적에 대한 부분은 오류가 있는 것 같습니다.
1948년 위장귀순,국회의원을 했다고 하셨는데요.
제헌의회 국회의원 명단에 박정식은 없더군요.

Oct 18, 2017 04:33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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