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오늘은 1940년대에 들어서면서 일제의 대토벌이 심해지자 김일성이 김정일을 임신한 김정숙 그리고 몇 명의 항일빨치산들과 함께 소련으로 도망치기 6개월 전인 1940년 4월 16일부터 4월 24일 사이에 5회에 걸쳐 만선일보에 실렸던, 김일성에 대한 기사내용을 소개하겠습니다.
먼저 만선일보에 대해 설명 드린다면 1932년에 만주지방에 일본이 괴뢰국가를 세웠을 당시,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수백만 명의 조선인들을 위해 만주국의 수도 장춘(長春), 당시 신경(新京)에서 출간되었던 일간지였습니다.
5회에 걸친 기사의 대제목은 ‘비수 김일성의 생장기(匪首 金日成의 生長記)’입니다. 여기서 비수는 비적의 우두머리라는 뜻입니다. 당시 중국인 지주들과 만주에서 살고 있던 조선인 농부들의 집을 무장하고 쳐들어가서 생명을 위협하면서 마구 재산들을 약탈하였던 김일성 패거리들을 말하지요. 이를 보면 당시 주민들도 김일성 일행을 비적의 무리로 치부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기사는 대한민국의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열람이 가능합니다. 이 기사를 상세히 소개하려는 것은 북한에서 가르치고 있는 혁명 역사가 얼마나 거짓이며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가 얼마나 황당한 왜곡으로 되어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16일 6면에 실린 ‘비수(匪首) 김일성(金日成)의 생장기(生長記)’ 제1회 제목은 ‘중학시대(中學時代)부터 적화(赤化)’입니다.
한자와 한글을 섞어 쓴 기사내용을 그대로 읽어보면,
“만주사변이 발발된 이래로 양정우(楊靖宇), 김일성(金日成), 최현(崔賢) 등 비적들은 통화성(通化省) 방면에 근거지를 두고 다년간 각지 부락을 습격하여 주민의 금품과 식량을 략탈하면서 통화성 오지 방면의 주민을 괴롭혔다”
“작년 1939년 4월 7일 밤에는 길림성 화전현 대포시하(大蒲柴河) 조선인 집단 부락을 습격하여 금품을 약탈한 다음 8일에는 안도현(安圖縣)에서 금품, 식량, 의복 등을 약탈하여 농민들을 괴롭혔고 공포에 떨게 했다” 이렇게 적혀있습니다.
기사에는 당시 기자가 김일성의 가정에 대해 조사하여 그 내용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의 조부 김보현과 조모 이보익의 사이에는 장남 김형직과 차남 김형권, 3남 김형록 외 1녀를 두었는데 김일성의 조부모는 지금도 3남 형록을 데리고 평남 대동군 고평면 남리에서 농사하여 근근이 살아가고 있다”
“김일성의 본명은 김성주였고 13세 때에 무송에서 소학교를 졸업하였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길림육문중학교에 다니면서 중국공산당 책임간부였던 담임교원의 영향으로 점차 공산적화되기 시작하였다” 신문은 이렇게 그의 학창시절에 대해 기록하였습니다.
이 기사에 이어 이틀 뒤,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18일에 제2회가 게재됩니다. 제2회 소제목은 “비명(匪名)『김일성(金日成)』을 습명(襲名)”입니다. 한마디로 김일성은 가짜 이름이라는 의미입니다. 여기엔 김일성이 1920년대 만주와 소련 등에서 항일투쟁을 하면서 이름을 날렸던 진짜 김일성이 사망하자 그의 이름을 도용해 김성주에서 김일성이라는 이름으로 바꿨던 사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 기사에는 김일성이 “중학(中學)을 중퇴(中退)하고 18세(十八歲)부터 녹림생활(綠林生活)을 했다”고 수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녹림이라는 말은 ‘한서’에서 나오는 도적떼를 말합니다.
기사에는 “김일성은 삼촌 김형권이가 서대문 감옥에서 사망하자 더 과격해져서 길림육문중학교를 중도퇴학하고 안도현을 거쳐 남만으로 가서 당시 정의부 계통의 남만청총 간부였던 리종락(李宗洛), 박근원(朴根源), 신영근(申榮根), 박단석(朴且石) 등과 손을 맞잡고 결의형제가 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그리고 “18세 이전에 김성주로 불리던 그는 만주사변 직전에 토벌대에 의해 당시 유명하였던 김일성 장군이 사살 당하자 18살 나던 1930년부터 자기의 이름을 성주에서 김일성으로 고치고 활동하였다”고 밝혔습니다.
김일성은 비적생활을 하면서도 점차 만주지역에서 세력을 확장해가는 일본의 군사팽창에 대해 주시하였으며 한동안 귀순을 결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21일에 실린 제3회 “김일성 귀순을 결심, 집요한 양정우(楊靖宇)의 특무대(特務隊)에 일신을 도피”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70세가 되는 늙은 조모 이보익이 손자의 귀순공작을 하고 의형제를 맺었던 이종락 등 동지들이 일본에 의해 변절하여 김일성에게 귀순을 권유하자 그는 몇 안 되는 부하들을 설득하여 함께 귀순하여 하산하려고 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자기에게 귀순을 권유하는 박단석에게 “나는 귀순하기로 결심은 하였으나 내 자신이 혼자만 갈 수 없으니 박군이 돌아가서 의형인 이종락을 들여보내주게. 이형이 들어와야 나와 협력하여 부하들을 설득하여 귀순토록 하겠네”라고 말하며 자기가 가지고 있던 전 재산인 카메라 1대와 인삼과 녹용을 박군에게 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일성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 이종락에게 “내가 갑작이 볼일이 있어서 일주일 동안 다른 지방에 갔다 오게 되었으므로 만날 수 없으니 그리 아세요”라는 회답편지를 남기고 귀순을 포기하였는데 이 이유에 대해 만선일보 기자는 “이종락의 신변은 물론이고 자기의 신변에까지 위험이 있을 것 같아 그런 행동을 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23일에 실린 제4회 제목은 ’양정우의 협박으로 귀순공작(歸順工作)은 수포화(水泡化)‘입니다. 당시 김일성을 귀순하려고 산에 들어온 이종락은 “나는 과거에 만주에서 유명하였던 공산당이었습니다. 당신들도 이대로 비적생활을 하지 말고 다 같이 협력하여 만주국의 락토건설에 협력하는 이상사회를 건설합시다”라고 호소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만일 여러분이 귀순만 하신다면 정부에서는 가장 유리한 조건으로 여러분을 환영할 것이니 하루라도 속히 나와 같이 평지에 나가서 귀순하고 안락한 생활을 하도록 합시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김일성을 비롯한 공산비적들을 귀순하려고 했던 이종락은 김일성의 귀순을 반대하였던 동북항일연군 1로군 양정우 총사령에 의해 1940년 1월에 총살당하게 됩니다. 후일에 양정우 총사령은 김일성이 귀순하려 했던 사실을 추궁하자 김일성은 모르쇠를 하면서 변명하였던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김일성은 양정우 총사령에게 “사령도 잘 아는 바이지만은 내가 갑자기 귀순하려고 했을 리 있습니까? 최근 박단석이도 귀순을 권유하고 이종락이도 만나자는 편지를 보내왔으나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었으니 만날 수 없다고 거절 하였습니다”라고 변명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만선일보(滿鮮日報) 1940년 4월 24일에 실린 제5회 “하로 속(速)히 마음을 돌려 귀순(歸順)하기만 고대(苦待)! 고향(故鄕)에 있는 가족(家族)들의 애타는 심원(心願)”.... 에서는 신문기자와 김일성의 조모 이보익 사이의 인터뷰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보익은 김일성의 귀순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우리 가정에서는 하루라도 속히 귀순하기만 고대하고 있습니다. 서로 갈라진 지도 이미 7년이 지났고 작년 여름에 내가 통화에 갔을 때에는 귀순하겠다고 해서 너무도 기뻤었는데 양정우란 놈이 방해하여 귀순하지 못하게 되었지요”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이렇듯 김일성이 소련으로 도망치기 6개월 전인 1940년 4월에 만선일보에 5회에 걸쳐 실린 기사를 보면 김일성이 비적생활을 하면서 얼마나 중국인들과 조선인들을 괴롭혔으며 마지막에는 생명의 위험을 직감하고 귀순하려 하였다가 결국은 소련으로 도주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거짓투성이 역사왜곡도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