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가짜 백마 이야기
2024.04.10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 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 3권 7장 ‘인민의 세상’, 5절 ‘백마에 대한 추억’에서 1933년 5월 왕청유격근거지에서 자신이 백마를 타고 다니게 되었던 이야기를 장황하게 설명하였습니다.
김일성은 백마를 탄 모습의 미술작품을 서두에 싣고 “나는 원래 이 삽화를 세상에 공개할 의향이 없었다. 그러나 이 일화를 나만 아는 비밀로 묻어두기엔 백마에 대한 나의 추억이 너무도 애틋하고 그것을 소개하지 않고는 못 견딜 것 같다”라면서 군마가 처음 생겼다던 1933년 봄을 회고했습니다.
김일성은 “십리평 인민혁명정부 일군이 다른 유격대 동무들과 함께 백마 한 필을 끌고 와 ‘험한 길을 많이 걸으시는 김 대장께서 타시라고 저희들이 말 한 필을 삼가 증정하오니 받아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면서 나이 갓 스물에 백마를 타게 되었다”고 회고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왕청유격구에서 생활했던 사람들의 증언에 따르면 백마가 근거지 내에 존재하지도 않았으며 김일성보다 나이가 많은 상급들이었던 왕청유격대 대장 양성룡을 비롯한 빨치산들도 말을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이 백마 탄 미술작품이 등장한 시기는 1970년대입니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1960년대 중후반에 중앙당 선전선동부에서 영화창작분야를 맡았던 김정일이 1970년대 중앙당 조직지도부에서 활약하면서 김일성의 혁명 역사는 거짓이 마구 부풀려졌습니다.
김정일은 1970년대 당시에 과거 항일빨치산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 거의 다 사망하였거나, 살아있다 해도 기억도 삭막하기에 역사왜곡이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김일성의 백마에 대한 이야기는 만주지방에서 유명하였던 진짜 김일성장군의 명성을 마치 자기의 일인 것처럼 꾸미기 위해 만들어진 역사왜곡이라는 사실도 이젠 비밀이 아닙니다. 진짜 김일성, 즉 김광서는 1888년에 함경남도 북청에서 태어나 일본유학을 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대한독립청년단에 입단하였으며, 1922년 대한혁명단 사령관,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으로 활동했습니다. 김광서의 명성은 당시 만주지방에는 물론 국내에도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진짜 김일성 장군인 김광서는 당시 ‘고려의 나폴레옹’, ‘김경천’, ‘김응천’, ‘김현충’ 등으로도 불렸는데 그는 항상 백마를 타고 일본군과 싸웠기에 진짜 김일성 장군과 백마는 당시 10대의 김일성, 즉 만주에 이사를 와서 성장하던 본명 김성주에겐 흠모의 대상이었습니다. 훗날 김정일의 지시로 만수대 언덕에 조선혁명박물관이 세워지고 여기에 김일성의 백마 탄 그림이 걸리게 된 것도 진짜 김일성인 김광서가 이미 사망했기에, 가짜가 진짜인 것처럼 행세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3권에 이어 4권에도 너무도 많은 허구가 들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935년 2월 24일부터 3월 3일까지 10일간 진행된 다홍왜회의에서 억울하게 죽은 조선사람들의 이름을 들어가면서 “반민생단투쟁의 좌편향적 과오를 고발했고 조선혁명의 주체노선을 견지하고 옹호하기 위한 대 사상전을 자신이 주도했다”고 했지만 이것 역시 거짓말입니다.
다홍왜회의에 관한 중국공산당과 연변조선족자치주에 보관된 문헌들의 그 어디를 찾아봐도 김일성의 역할과 연설내용은 볼 수 없으며 김일성이 이 회의 참석자 명단에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자신이 동만특위 위원의 자격으로 참가했다고 했지만 중국공산당 입당을 숨기고 있는 처지에서 중국공산당이 파견한 동만특위 위원이란 것도 어불성설이며 당시 민생단으로 몰린 처지에서 이 회의에 참가할 수도, 그런 내용의 안건을 주최하여 사회를 보았다는 것도 궤변에 불과하다는 것이 역사전문가들의 지적입니다.
그리고 청취자 여러분들이 들으면 깜짝 놀랄만한 사실은 요영구회의에 대한 내용입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1935년 3월 21일에 열린 요영구회의에 대해 사진까지 보여주며 회고록에서 자신이 이 회의도 주관한 것처럼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왕청현 요영구에서 진행된 이 회의는 중국공산당 동만특위와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소집한 군정치위원들의 연석회의로, 회의 사회자는 동만특위 서기였던 위증민과 2군 독립사 정치위원 왕덕태였습니다. 당시 회의 참석자들은 11명이었고 여기에도 김일성은 참석자 명단에 없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 4권의 마지막 절인 ‘조선광복회’에서 “남호두회의 이후 시기부터 통일전선운동은 범민족적인 통일전선체의 조직을 위한 활동으로 집중되었다”며 자신을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고 자평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1973년 조선노동당 당역사연구소에서 출간한 ‘정치사전’에는 “민족주의는 계급적 이익을 전민족적 이익으로 가장하고 자기 민족의 우수성을 내세우면서 다른 민족을 멸시하고 증오하며 민족들 사이의 불화와 적대를 일삼는 부르죠아 사상”이라고 엄격히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민족주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적대되는 사상으로 민족적 이익과 노동계급의 이익에 배치되는 반동적인 부르죠아 사상이므로 자그마한 민족주의적 표현과도 강한 투쟁을 벌려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랬던 김일성이 1993년에 출간된 회고록 4권에서 자신이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고 한 이유에 대해 저는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이 붕괴되면서 지구상에 공산권이 사라지는 위기가 닥쳐오자 설 자리를 잃게 된 김일성과 북한으로서는 공산주의 하나로는 국가 존립을 견지하기 어렵다는 것을 인식한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 회고록 3권과 4권 내용과 그 속에 담긴 백마에 대한 회고 등 ‘세기와 더불어’에 실린 내용들은 김일성 우상화를 위한 역사왜곡에 불과하며 역사의 진실은 반드시 거짓을 물리치게 된다는 것입니다. 김정일과 김정은은 백마에 타서 실제 사진까지 찍으면서 김일성의 후계자로서의 당위성을 선전하려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런 와중에 김정일은 과욕으로 1992년에 말을 타다가 떨어져 중상을 입기도 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