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곡목장 구호나무 조작

김주원∙ 탈북자
2016.08.16
baekdu_blood_b 북한은 평안남도 안주지구 '마두산 혁명전적지'를 '제2의 백두산'으로 내세우며 '백두혈통' 우상화에 적극 활용하고 있다. 사진은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마두산 지역에서 '발굴'했다고 소개한 '백두산 3대 장군'(김일성ㆍ김정숙ㆍ김정일) 찬양 구호나무들.
사진-연합뉴스 제공

북녘에 계신 동포여러분, 올해는 지구온난화로 대한민국 뿐 아니라 여름 날씨가 환상적이라고 하는 북한의 날씨도 지글지글 끓어 번지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니 불현 듯 운곡목장의 울창한 수림속에서 연구 사업을 하던 시절이 생각이 납니다.

제가 김부자의 건강장수를 전문으로 연구하던 만수무강연구소인 만청산연구원에서 근무하면서 안주지역의 특수목장인 운곡목장에서 연구 사업을 하던 시기는 이미 그 지역의 구호나무가 발견되었다고 소문이 나있던 1990년대 초였습니다.

제가 담당했던 가금전문직장인 6직장에서 북쪽 5km정도를 올라가면 자그마한 호수가 있는데 이 지역사람들은 룡담저수지라고 불렀습니다. 예전에는 제전저수지라고도 불렀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작가들이 글을 쓰는 휴양각도 있었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덕성실기인 ‘인민들속에서’와 ‘주체시대를 빛내이시며’ 등 노동당 역사연구소가 주도하는 기록물들과 ‘4.15 창작단’에 소속된 작가들이 김일성 일가를 우상화 하는 글들의 상당량을 여기에서 창작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1년 여름은 운곡특수목장에서 연구생활을 하며 보냈는데 여가시간이면 룡담저수지에 있는 휴양각에 들려 탁구도 치고 주변의 계곡들에 바람을 쏘이러 나갔다가 경비임무를 맡은 8호안전부 성원들에게 차단되어 되돌아서던 생각도 납니다.

주변의 산들은 연구성원들도 마음대로 통행하지 못하도록 8호안전부가 경비를 섰는데 왠지 그땐 예전보다 경계가 훨씬 삼엄해졌습니다. 왜 그러냐고 물었더니 그들이 한다는 말이 “주변의 마두산과 성산에서 ‘1호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북한에선 1980년대 후반부터 갑자기 김일성 일가를 칭송하는 구호나무들이 여기저기서 무더기로 발견되며 큰 파문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북한은 이런 구호나무들이 김일성의 수하에서 항일빨치산 활동을 하던 대원들이 남긴 글이라고 선전했습니다.

빨치산 대원들이 김정일의 출생을 ‘백두광명성’ 탄생으로 환호하며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백두산 3대장군’으로 칭송하는 글들을 국내 곳곳에서 나무껍질들을 벗기고 새겨 넣었는데 이제 와서야 발견되었다는 것이 북한 당국의 주장이었습니다.

북녘의 청취자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1961년 양강도 삼지연군 청봉지구에서 항일빨치산의 숙영지 흔적들이 19그루의 구호를 새긴 나무들과 함께 발견되었습니다. 북한은 이 나무들을 유리관 속에 보관하고 김일성 일가의 우상화에 활용했습니다.

1960년대 말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노동당 중앙위에서 첫 사업을 시작한 김정일은 당 선전선동부에서 문화예술을 통한 선전활동에 주력하면서 자신이 백두혈통임을 주장하기 위한 역사왜곡을 체계적으로 준비했습니다.

이 시기 김일성은 신장과 심장혈관에 이상 징후가 발생되면서 후계자 문제를 서두르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틈타 김정일은 빨치산 출신들을 등에 업고 삼촌 김영주와 배다른 동생 김평일을 곁가지로 몰아 제압하고 후계자의 자리에 올라섰습니다.

하지만 출생지가 문제였습니다. 김일성은 1941년 일제의 대토벌이 시작되자 옛 소련의 국경을 넘어 피신했습니다. 소련으로 피신한 김일성은 중국과 러시아 군인들로 편성된 극동군 88여단에서 1대대장으로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곳에서 복무했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러시아의 하바롭스크에서 생활하던 중인 1941년 2월 16일 주변의 작은 농촌집에서 태어났고 어렸을 때 이름은 김유라였습니다.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에 입학하면서 김유라라는 이름을 김정일로 바꾼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후계자가 된 김정일은 1982년 김일성의 생일 70돌을 맞으며 우리 인민들이 숭배하는 조종의 산인 백두산이 자신의 고향이라면서 최현을 비롯한 몇명 안 되는 빨치산 출신 생존자들을 내세워 그런 주장에 동조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김정일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1980년대 초 청봉숙영지를 돌아보면서 그곳에 진열된 구호나무에서 영감을 얻어 자칭 고향이라고 하는 백두밀영에 자신을 칭송하는 구호나무들을 만들어 놓도록 노동당 역사연구소에 비밀지령을 내렸습니다.

당시까지 북한은 김정일의 고향을 백두밀영이라고 하면서도 백두산의 복잡한 지형으로 인해 아직 백두밀영의 정확한 위치를 확인하지 못했다고 인민들을 얼려 넘겼습니다. 그러면서 한쪽으로 가짜 백두밀영과 구호나무들을 은밀하게 준비했습니다.

1986년 여름 큰 태풍이 백두산 지구를 지나가며 수많은 나무들을 쓸어 눕혔습니다. 가짜 밀영과 구호나무들을 준비해 놓고 이를 어떻게 세상에 터뜨려야 할지 구실을 찾던 김정일에게 있어서 그 여름의 태풍은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김정일은 태풍에 쓰러진 나무들을 정리하던 중 백두밀영 터를 발견했다며 주변에서 발견된 구호나무들이 그곳이 백두밀영이었음을 증명한다고 요란하게 선전했습니다. 이렇게 되어 조작된 구호나무들이 처음으로 세상에 선을 보였습니다.

김정일이 1982년부터 백두밀영을 조작해 놓고 기회만 엿보고 있었다는 사실은 1980년대 구호나무 조작에 직접 참여했던 혜산농림대학 목재가공학부 교수들을 통해 1990년대 중반 양강도의 간부들 사이에 암암리에 알려졌습니다.

체스코슬로바키아 코멘스키종합대학 유학생출신인 김하룡 교수를 비롯한 전문가들은 오래된 고목들을 구호나무로 둔갑시키기 위해 금수산의사당 수목관리 전문가들과 함께 수 천 번의 실패를 거듭하면서 세상 사람들을 속일 방법을 연구했습니다.

초기 노동당 선전선동부는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1930년대 후반부터 1940년대 초반의 구호나무 2백여 그루가 발견되었다고 주장하였고 1991년까지 북한 전역에서 1만2천여 점의 구호나무가 발견되었고 선전했습니다.

그중 김정일을 칭송한 내용은 210점, 김정숙을 칭송한 것은 330점이라면서 구호나무를 영구보존하기 위해 수천만 달러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북한의 간부들은 당시 내각 부총리 겸 문화예술부장이었던 장철을 구호나무 조작책임자로 꼽고 있습니다.

백두산 지구의 구호나무 발굴이 마무리된 1990년 운곡지구에 발굴대가 들어와 구호나무를 발견했다는 이야기가 돌기 시작했습니다. 운곡지구는 김부자에게 공급되는 각종 축산제품들이 생산되는 특수목장이 있어 누구도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운곡지구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마두산과 성산, 송래산은 산봉우리까지 완전히 봉쇄되어 누구도 오를 수 없었습니다. 이런 운곡목장은 1960년대 말까지 북한에서 제일 크다고 할 수 있는 정치범수용소가 자리 잡았던 장소이기도 합니다.

1960년대 말 이곳 정치범수용소가 해체돼 개천정치범수용소에 합병되면서 그 자리에 특수목장이 조성되게 되었습니다. 때문에 마두산과 성산을 비롯한 주변의 산들에는 수십 년 전부터 굶주린 정치범들이 껍질을 벗겨 먹은 소나무가 많았습니다.

그런 마두산과 성산에서 구호나무가 발견됐다는 소식은 들려왔으나 운곡특수목장 위수구역이어서 실제 주민들의 접근은 봉쇄됐습니다. 이후 김일성의 사망과 ‘고난의 행군’으로 운곡지구에서 발견됐다는 구호나무들은 기억에서 사라지는 듯 했습니다.

그렇게 잊혔던 마두산과 성산이 김정은이 집권하면서 화려하게 부활하는 모습을 보며 너무도 억이(기가) 막혔습니다. 김일성에게 학대당한 정치범들이 남긴 쓰라린 흔적들이 김정은의 백두혈통 선전에 악용되는 것을 보며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구호나무조작에 동원되어 그 내막을 잘 알고 있는 혜산농림대학 목재가공학강좌 김하룡 교수는 ‘고난의 행군’이 한창이던 2005년 12월 사망을 앞두고 구호나무 날조에 동원됐을 때 찍었던 기념사진을 가리키며 울분을 금치 못했다고 합니다.

운곡지구에서 연구 사업을 진행해 오며 구호나무 조작을 적지 않게 파악하고 있던 저로서는 백두의 혈통을 들먹이며 대대로 우리 인민을 기만하는 김씨 일가에 반드시 하늘의 저주가 내릴 날이 오리라고 확신합니다. 지금까지 탈북자 김주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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