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 일가의 숨겨진 진실] 조작된 신화, 두 자루의 권총

0:00 / 0:00

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더불어’는 상당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역사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김형직에게서 물려받은 두 자루의 권총과 항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해 무기 탈취를 했다는 내용의 허구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더불어’ 2권 5장 ‘무장한 인민’ 4절 ‘혈전의 준비’에는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을 위해 무기를 획득하기 위해 활동한 내용들을 기록되어 있습니다. 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하기 위한 우리의 투쟁은 처음부터 여러가지 난관에 부닥쳤다’며 ‘사람문제, 무기문제, 식량문제, 군중적 토대문제, 구국군과의 관계문제 등 많은 난문제들이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특히 김일성은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사업에서 ‘사람과 무기를 가장 중요한 두가지 필수적 요소로 보았다’며 당시 안도에서 아버지가 어머니 강반석에게 맡겨 두었던 권통 두 자루를 물려받았던 사연도 자세히 기록하였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두 자루의 권총에 대해 ‘이것이 우리 아버지가 나에게 물려준 유산이다 · · · 나는 이 두 자루의 권총을 물려받을 때 아버지가 지향했던 것을 내가 대신하여 실현시키고야 말리라는 결심을 굳게 다지었다’며 ‘이것이 새끼를 쳐서 2백 자루, 2천 자루가 되고 밑천이 있으니 이것을 자꾸 굴려 2천 자루가 2만 자루가 되게 하자!’고 호소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청취자 여러분, 김형직이 1926년에 죽고 집도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세 아들을 키우느라 생활고에 빠져서 조선족 부농이었던 조광준과 재혼하였던 강반석이 6년동안 권총을 보관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안도일대에서 김성주의 집안형편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은 이 말이 거짓말이라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김성주라는 본명을 사용하였던 김일성이 처음으로 권총을 손에 잡을 수 있었던 것은 이종락이 창설하였던 조선혁명군 길강성 지휘부 군사부장 김광열(김광렬)에게서 권총을 받았던 것이 때였습니다.

김일성이 무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던 것은 19살 되던 1931년경이었습니다. 김광열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으로 중국 공산당이 주도한 남창봉기에까지 참가했던 김일성에서는 대선배격의 인물이었습니다.

김일성이 반일인민유격대 창건에 대한 허구를 만들기 위해 조선혁명군을 창설한 이종락과 김광열에 대해 회고록에서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당시 김성주는 김광열을 자기가 가장 존경하고 숭배하는 인물로 여겼다고 전해집니다.

국민부(정의부 중심으로 조직된 독립운동단체)에서 장총 30여 자루를 훔쳐가지고 나온 이종락은 군사부장인 김광열에게 ‘총을 사들이는 일은 제가 책임지겠으니 형님은 세금을 징수하여 총을 구입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고 김광열은 세금징수분대를 만들고 김성주를 분대장으로 임명하면서 권총을 건낸 것입니다.

이 사실로도 청취자 여러분들은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김광열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는 이유와 김형직에서 물려받은 권총이 거짓이라는 것을 이해하였을 것입니다.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세금징수하는 일은 일제에 의해 피해서 만주로 이주한 조선인들로부터 반강제적으로 돈을 약탈하는 일이어서 당시는 비적이라는 조소를 받곤 했습니다.

반제반봉건투쟁을 벌인다면서 김일성은 가난한 조선인 농부들에게서 세금을 징수하는 것도 모자라 중국 지주들의 집을 습격하고 다녔기에 당시 삼촌인 김형권은 김성주에게 본명 대신 다른 이름으로 세금징수를 하도록 하여 김일성이라는 이름을 사용하였던 사실도 회고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더불어’에서 2백자루, 2천자루의 이야기가 나온 것은 김일성의 두 자루 권총과 20자루 총에 관해 내용과 연관이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자루 총에 대한 이야기는 19살 나던 1931년, 모험을 즐겼던 김성주가 김일성이라는 별명을 써가며 집집마다 다니면서 군자금을 걷어들이는데 앞장섰고 돈을 내놓지 않겠다는 사람들에게는 무기를 내대고 폭력을 행사하여 빼앗던 시기의 이야기 입니다.

독립군 제9 중대장의 부관으로 있었던 이종락은 국민부에서 탈출해 20여 명의 청년들로 조직된 ‘동아혁명군’ 사령관으로 추대되었지만, 자기가 데리고 온 대원들까지 합쳐 ‘조선혁명군’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이종락은 중국 공안국에 잡혔다가 제일 늦게 놓여 나온 김일성이 나이는 어려도 사상이 좋고 무슨 일을 맡겨도 잘 할 수 있으니 세금징수를 맡기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일본 헌병대 밀정 출신이던 김영순에게 자기가 쓴 편지를 주어 군사부장인 김광열에게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김성주는 자기의 상관격인 김광열에게 “난 세금 징수하러 다니는 일이 이제는 정말 질리도록 싫으니 장춘에 가는 특무대에 나를 넣어주도록 형님이 부사령관에게 말해달라”고 졸랐지만 김광열은 끝내 김성주를 세금징수 분대장으로 선정하였습니다.

김광열은 김성주에게 ‘양세봉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 길강사령부를 습격할지 모르니 세금 징수하러 오가자 쪽으로 나갈 때 각별히 조심하고 오가자 쪽에서 국민부와 협력하는 사람들이 발견되면 즉시 부사령관에서 알려 긴급조치 하여야 한다고도 주의를 주기도 했습니다.

김일성은 자기의 상관인 군사부장 김광열에게 세금징수를 하면서 무장을 하면 더 안전할 터이니 총을 주면 안되냐고 물었고 결국 김광열의 승인으로 특무대의 총 20자루가 김성주가 맡았던 세금징수 분대에 전해집니다.

군사부장 김광열을 통해 권총도 받고 장총 20자루도 받은 김성주는 그때부터 만주지역에서 살고 있는 조선인 농부들과 중국인 지주들로부터 세금징수를 한답시고 비적 같은 행동을 거침없이 감행했고 주변지역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1931년 2월 3일 자 동아일보에는 장춘에서 이종락과 김종렬이 수갑을 찬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 후 김광열은 모진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이종락과 함께 감옥에서 변절했고 감옥에서 나온 뒤 울화병이 터져 자살했습니다.

조선혁명군을 창설했던 이종락이 변절하고 군사부장 김광열도 죽자 김일성은 받았던 총 20자루를 돌려주지 않고 무송이나 안도쪽으로 가서 일제를 반대하여 싸우는 무장대오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북한에서 항일유격대를 창건하는 김일성이라는 내용의 미술작품을 청취자 여러분들은 혁명역사 수업시간에 교과서에서 봤을 것입니다. 당시 나란히 서서 유격대 창건을 선포하는 김일성을 그린 그림에는 앞줄에 15명, 뒤에 2줄이 더 있어 약 50여 명인 것으로 보여지지만 당시 김일성과 함께 움직이던 인원은 20명에 불과했습니다. 김일성이 회고록에서 100여 명의 공산주의 청년들로 새로운 반일인민유격대를 창건했다는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는 것은 이제 비밀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당시 김일성은 무장부대를 새로 창건할 생각도 하지 않았고 양세봉 독립군부대나 다른 반일부대에 들어가는 것이 소원이었고 사실 그렇게 소속부대로 활동하기 위해 노력하였다는 것이 역사적인 기록으로 남아 있는 진실인 것입니다.

북한에서 김일성의 회고록에 나오는 용남파출소 무기 탈출과 ‘동지들, 이 총을 받아주’ 등에서 나오는 내용으로 영화도 만들었는데 이것도 사실과 다릅니다. 김성주 즉 김일성은 당시 조선혁명군 군사부장 김광열에서 받은 총을 돌려주지 않아 그 총을 찾으러 독립군에서 한 개 소대 역량을 파견하였습니다.

독립군 부대에서는 총을 찾기 위해 한 개 소대를 파견했다는 소식을 들은 김일성은 친구인 장울화를 시켜 중국 경찰들에게 이들을 밀고합니다. 장울화는 김성주의 부탁대로 중국 경찰에 이들이 ‘공산당이 사주하는 조선혁명군’이라고 말했고 경찰은 이들이 묵던 여관을 덮쳐 이들을 모두 체포합니다.

그러나 당시 체포된 소대의 소대장인 고동뢰는 중국말을 잘하는 조선족을 내세워 ‘공산당 소속이 아닌 조선혁명당 소속의 반일부대’라는 사실을 입증하며 유치장에서 풀려날 수 있었습니다. 고동뢰는 또 중국 경찰에게 압수한 무기를 총탄은 빼고 총만이라도 돌려달라고 사정했고 경찰은 저들이 정해 준 여관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가는 조건으로 총을 돌려주었습니다.

고동뢰는 중국 경찰의 요구대로 소대원 9명과 함께 무송현 소남문 거리의 한 중국 여관에서 머물렀는데 대원들이 무기를 가지고 도망치고도 저들을 중국경찰에 밀고한 김성주에 대한 분노로 소대장 고동뢰에게 ‘이런 수모를 받아 본적이 없다. 끝까지 가사 결판을 보자’고 말했다고 합니다.

소대장 고동뢰는 참지 못하고 벌떡 뛰어 일어나 앞장서서 여관에서 나오다가 어디선가 날아오는 총에 맞아 쓰러졌고 조선혁명당에서는 김성주를 붙잡으려고 100여 명의 독립군 대원들을 파견했던 사실이 그 중 한 명이었던 김청회에 의해 밝혀졌습니다.

누군가 피로써 얻은 무기를 가로 채 자신의 공로로 포장하고 잘못된 것을 바로잡으려는 반일애국자를 피살한 김일성의 행위는 진정한 독립활동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역사를 왜곡하여 위대한 반일무장투쟁의 선각자들의 업적을 자신이 한 것처럼 하려 하지만 절대로 진실은 속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김정은은 알아야 할 것입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칼럼내용은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