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녘 동포 여러분, 김일성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는 상당 부분을 날조로 엮어 놓은 가짜 역사 도서이며 북한주민 세뇌용 자서전입니다. 오늘은 김일성이 ‘세기와 더불어’ 회고록 2권, 4장 1절에서 기록한 손정도 목사에 대한 내용의 진실과 거짓에 대해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회고록에서 김일성은 “감옥을 나와 내가 맨 처음으로 찾아간 곳은 우마항에 있는 손정도 목사의 집이었다. 일곱 달 동안 꾸준히 옥바라지를 해 온 손정도 일가 사람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고 떠나는 것이 도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손정도 목사를 비롯하여 고원암, 오인하, 황백하와 같은 독립운동가들의 후원으로 감옥에서 제때 석방되지 않았더라면 나는 일본제국주의자들에게 붙잡혀 10년쯤 옥중생활을 더 하였을 것이다. 내가 손 목사를 생명의 은인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김일성이 생명의 은인이라고 한 손정도 목사는 과연 어떤 사람일까요?
1881년 7월 26일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독실한 유학자이고 부농인 부친 손형준과 해주 오씨 가문의 모친 오신도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난 손정도 목사는 김일성의 부친인 김형직(1894~1926)보다 12살 위인 평양숭실학교 선배였습니다.
손정도 목사는 21살 되던 1902년에 과거 시험에 응시하기 위해 고향 강서를 떠나 평양으로 가다가 날이 저물어 조씨 성을 가진 목사의 저택에서 묵게 되었습니다. 그날 밤 조 목사의 전도로 청년 손정도는 신학문, 서구문화, 기독교에 대한 소개를 받고 유교 신자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과거를 보는 것을 포기하고 상투를 자른 뒤 고향 강서로 돌아온 손정도 목사는 유교 가정인 조상들이 대대로 집안에 모셔 온 신주를 매장하고 사당을 부숴버렸습니다. 오죽했으면 집안 어른들이 이런 행동을 패륜으로 낙인하면서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고 합니다.
집안을 도주한 손정도 목사는 조 목사를 찾아갔고 그를 통해 평양에서 미국 선교사 존 무어(John Z. Moore, 1874-1936)를 소개받았습니다.
당시 한국 이름 문요한으로 불리던 존 무어 선교사는 손정도 목사를 자기 비서 겸 한국어 선생으로 채용하였고 숭실학교를 다니도록 입학을 주선해 주었습니다. 김형직과 손정도 목사의 인연은 결국 숭실중학교 선후배 사이가 되면서 시작됐던 것입니다.
27살 되던 1908년에 평양숭실중학교를 졸업한 손정도 목사는 목회자의 길을 결심하고 협성 신학교에 입학해 신학을 전문으로 공부했으며 1910년에 만주에 선교사로 파견돼 활동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하기 위해 중국어 연수를 받으려고 베이징에 갔다가 안창호, 이승만, 김구, 양기탁, 전덕기, 이동녕 등 반일 독립애국자들이 설립한 신민회 핵심 인원이 된 손정도 목사는 그때부터 독립 애국 활동을 활발히 벌였습니다.
1910년 한일합방을 전해 들은 손정도 목사는 종교인의 본분과 함께 독립 애국의 신념을 갖고 해외 독립운동가들과의 연대 활동을 벌렸습니다. 1912년 흑룡강성 하얼빈에서 교회를 개척한 손정도 목사는 강연과 설교, 모 금활동 등으로 비용을 마련하여 2층짜리 예배당을 헌당하기도 하였습니다.
일본은 손정도 목사를 조선총독부 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의 암살모의에 가담했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체포했고 전라남도 진도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1914년 유배지에서 풀려난 손정도 목사는 1914년 6월 정동교회에서 열린 미 감리회 연합회에서 동대문 교회 목사로 파송을 받음으로써 감리교 성직자가 되었습니다.
동대문 교회 담임목사로 목회하는 동안 손정도 목사의 설교와 간증, 믿음의 실천이 소문 나면서 그는 유명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새 교인들이 점차 늘어나게 되었고 1916년, 동대문 교회는 국내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했습니다. 손정도 목사는 또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등 독립운동을 준비하기 위한 자금 조달책 역할과 임시정부 수립 준비에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손정도 목사는 1920년 1월 김립, 김철, 김구, 윤현진, 김순애 등과 함께 무장 독립운동단체인 의용단을 조직하였습니다. 그다음 해인 1921년 3월에는 이원익, 김병조, 김인전, 조상섭, 송병조, 장덕로 등과 함께 대한 야소교(개신교)진정회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국내외 각지의 교회에 조선 독립을 원조해줄 것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발송했습니다.
그리고 손정도 목사는 1922년 2월에는 대한적십자사 총재로 선임되었습니다. 상해에서 상해 한인교회 상의회 위원, 인성학교 교장직을 맡기도 했고 안창호 선생의 설득으로 흥사단에 입단하였습니다.
손정도 목사가 숭실중학교 후배인 김형직을 다시 만나게 된 그때부터 김일성과 손정도 목사 일가 사이의 인연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1926년 김형직이 죽고, 1927년 이후 청년 김성주가 중국 공산당을 따라다니며 독립자금을 마련한다는 구실을 내대고 중국인 지주집들을 마구 들이치고 다니면서 그때부터 손정도 목사와 김성주의 인연은 끝났습니다.
손정도 목사는 교회 성도들과 만주에 살고 있는 조선 동포들을 설득하여 독립운동자금을 마련하였다면 김성주는 비적 같은 활동을 하면서 김일성이라는 이름까지 가명으로 사용하면서 폭력적인 활동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해방 후 1940년대에 다른 독립운동가들과는 달리, 일제의 토벌을 피해 5년 동안 소련으로 도주하였던 김일성은 손정도 목사와 그의 일가족을 자신의 우상화 선전을 위해 써먹기 시작했습니다. 손정도 목사를 띄우려 했던 것은 그의 독립애국활동 업적과 당시의 지위가 높았기에 이를 김형직과 김씨 일가의 위대성으로 포장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손정도 목사를 “한 생을 목사의 간판을 걸고 항일 성업에 고스란히 바쳐온 지조가 굳고 양심적인 독립운동가였으며 이름난 애국지사였다”고 평가하였고 차남인 손원태와 일가족을 평양에 초대하여 철봉리 특각을 선물로 선사하면서 우상화 선전에 적극 이용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들은 손정도 목사의 차남인 손원태 선생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만 장남인 손원일에 대해서는 알지 못할 것이라 봅니다.
김일성의 회고록에서도 언급하지 않았던 손정도 목사의 장남 손원일은 대한민국의 해군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대한민국 해군 창설의 선구자였고 김일성이 일으킨 6.25전쟁 시기에 한국 해군을 이끌고 북한의 남침을 막았던 전쟁영웅이었습니다. 그리고 전후에는 한국 국방부 장관으로 재직하면서 한국의 국군의 날, 현충일 제정, 한국 국방대학교 창설 등 군 현대화에 전력을 다했습니다.
김일성은 회고록에서 길림에서 손정도 목사의 신세를 많이 졌다며 손정도의 둘째 아들 손원태와 딸인 손인실 남매와 길림시 교회의 북산에 올라 자주 놀곤 하였다고 했지만 정작 손인실은 김성주에 대해 전혀 기억하지 못하였습니다.
손인실의 딸 문성자는 김성주에 대해 어머니에게 물어봤더니 “그런 사람을 본 적이 전혀 없다고 하더라, 김성주는 전혀 기억도 나지 않고 돋보이지 않은 학생이 분명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수백 수천의 그리스도 성도 중의 한 사람에 불과했던 김일성이 손정도 목사 집안과의 인연을 부풀려 선전선동의 대상물로 이용한 북한 역사 왜곡의 끝은 정말 알면 알수록 허무하기 짝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