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시대 정치사상사업의 등장

김주원· 탈북자
2019-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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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남 문덕군 선거자들과의 상봉 모임에서 군중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내는 김일성 주석 화보 자료.
평남 문덕군 선거자들과의 상봉 모임에서 군중들의 환호에 답례를 보내는 김일성 주석 화보 자료.
/연합뉴스

북녘 동포 여러분, 김씨 일가의 현대판왕족독재체제, 노동당의 일당독재체제가 3대에 걸쳐 이어올 수 있었던 것은 주민들에 대한 주입식 선전선동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오늘은 김일성시대에 시작된 정치사상사업의 반동성에 대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에서 출간한 [조선말대사전]에는 선전선동에 대해 “선전은 일정한 사상과 이론, 정책 등을 대중에게 논리적이며 체계적으로 해설해줌으로써 인민대중이 그것을 이론적으로 파악하고 인식하게 하는 것 또는 그러한 사상사업의 한 형식이며 선동은 혁명과업을 잘 수행하도록 대중에게 호소하여 그들의 혁명적 기세를 돋구어주며 당정책 관철에로 직접 불러일으키는 것 또는 그러한 정치사상사업의 한 형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북한에서 말하는 정치사상사업이라는 용어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한 국가가 어떤 하나의 사상으로만 국가활동을 해야 한다고 헌법으로 명시하는 나라도 북한이 유일합니다. 북한의 사회주의 헌법 제3조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사람중심의 세계관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혁명사상인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자기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명시하고 제10조에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로농동맹에 기초한 전체인민의 정치사상적 통일에 의거한다”고 규정한 것만 봐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북한 사회과학출판사에서 출간한 [당사업경험]에는 “수령님께서 주시는 교시를 당원들과 근로자들에게 전달·침투시키는 것을 선전사업의 첫 공정으로 삼았고 우리당은 수령님께서 새로운 교시를 하면 그 내용에 따라 해당한 대상들에게 지체없이 그것을 전달·침투시키는 것을 제도화하였으며 수령님의 교시를 한번 전달·침투하는데 그치지 않고 당원들과 근로자들이 교시의 진수와 전반사상을 완전히 파악할 때까지 그것을 깊이 연구·체득하도록 하였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해방 후 북한당국은 정치사상사업을 진행함에 있어서 소련공산당의 방식을 모방하였습니다. 북한에서 1945년 일제로부터 나라가 해방된 것을 김일성이 항일투쟁을 하여 이룩한 것이라고 배워주고 있지만 갓 해방되어 1960년대까지는 소련군을 해방군이라고 불렀고 조국해방이 소련군에 의해 달성되었다고 가르쳤습니다.

해방 후 김일성을 ‘수령님’이 아니라 ‘수상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것은 구소련에서 스탈린을 로어(러시아어)로 ‘갈라바(голова)’라고 부른 것에 기인합니다. 갈라바는 우리말로 머리를 뜻하며 어떤 그룹이나 공동체의 두목 혹은 영수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결국 소련의 갈라바나 북한에서 한자로 머리 수(首)자와 서로 상(相)자를 써서 김일성을 수상이라고 한 것은 같은 존칭어에 해당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북한을 점령한 북조선주둔 소련군 제25군 사령관 이반 미하일로비치 치스차코프는 소련당국의 지시로 명령서를 하달하였는데 그 내용을 보면 소련군은 해방군이 아니라 북한 점령군이었으며 당시 북한은 소련의 괴뢰정부였음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명령서 4조에는 “당과 민주주의적 단체들은 자기의 강령과 규약을 가지고 와서 반드시 지방자치기관과 소련군 경무사령관에 등록하여야 하며 동시에 자기의 지도기관의 인원명부를 제출해야 한다”고 명시하였습니다. 이것은 해방 후 북한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가 아니라 소련 같은 프로레타리아독재가 실현된 공산국가로 되게 하려는 스탈린의 구상이 반영된 것입니다.

해방 전 1941년부터 5년 동안 소련군 극동사령부 소속의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 대위로 복무했던 김일성은 스탈린에 의해 북한의 국가지도자인 수상으로 되면서 자기의 정치적 은인인 소련에 대해 감사함을 표시해야 했습니다. 김일성은 스탈린을 ‘위대한 스탈린 대원수’로 부르도록 하였고 그를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로 극구 찬양하도록 하였으며 소련을 조선민족의 해방자, 원조자로, 소련군을 혁명전우라고 추켜세웠습니다. 평양의 모란봉에 세워진 해방탑 비문에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강점으로부터 조선인민을 해방하고 자유와 독립의 길을 열어준 위대한 소련군대에 영광이 있으라!”라는 내용으로 씌어져 있습니다.

국가건설을 소련의 지원과 원조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북조선 임시정권은 정치사상사업을 통해 주민들을 사상개조하기 위해 소련식 선전선동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소련에서 레닌과 스탈린을 우상화하고 공산독재를 실현하면서 만들어진 일당독재와 당국가체제가 북한에 그대로 도입되었습니다. 해방 후에 북한에는 북조선 공산당과 조선민주당, 조선신민당, 천도교청우당, 기독민주당 등 여러 당들이 존재하였습니다. 공산당 내부에도 김일성과 소련군 88저격여단에서 소련군으로 복무하였던 빨치산파와 남노당파, 소련공산당파와 중국공산당파, 갑산파라고 불리는 국내파가 존재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를 실현하기 위해 1950년 6.25전쟁시기에는 박헌영을 우두머리로 하는 남노당파를 제거하였고 이 후에 소련파와 연안파라고 불리던 중국공산당파를 숙청하였으며 1967년 박금철 부수상을 우두머리로 하는 국내파를 숙청하였습니다. 공산당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조선노동당이 창당되고 다른 당들은 제거되거나 노동당의 지도하에 놓인 외곽단체로 전락되었습니다.

북한의 정치사상사업에서 ‘혁명전통교양’과 ‘당적 사상체계확립’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도서 ‘항일빨치산참가자들의 회상기’가 출간되어 북한주민들은 물론 모든 초급중학교와 고급중학교, 대학생들의 필수 정독도서로 지정되어 김일성에 대한 우상화가 극에 달했습니다. 당시 ‘전설적인 영웅 김일성장군’이라는 표현은 김일성을 신적인 존재로 만드는 초석이 되었습니다. 혁명전적지와 사적지 발굴사업이 진행되었고 조직적인 참관과 답사행군이 강요되었으며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라는 구호가 제시되었습니다.

김일성에게 가장 큰 고민은 해방자인 소련이 국가건설에 개입하여 북한의 정치,경제, 문화에 너무도 깊이 관여한 것과 6.25전쟁에서 36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면서까지 북한을 도와준 중국의 북한정치개입이었습니다.

1956년 4월에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 당대회에 참석한 소련공산당 대표 브레즈네프는 축하연설에서 “각 당 조직과 사회단체들은 위로부터 하부조직까지의 레닌식 집체적 영도원칙을 완전히 수립하여 개인숭배에 관련된 오류를 범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내용을 언급하였습니다. 3차 당대회가 있은 지 4개월이 되던 1956년 8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상업상인 윤공흠은 김일성의 경제발전추진노선인 ‘중공업 우선정책과 농업협동화노선’을 개인독단으로 비판하면서 당 내에서 개인숭배를 배격해야 한다고 역설하였습니다.

당 대회에서 김일성의 개인숭배를 배격하였던 상업상 윤공흠과 직업총동맹위원장 서휘, 내각부수상들인 최창익과 박창옥은 출당되었습니다. 중국파였던 최창익은 중국정부의 개입으로 사형에서 무기형으로 감형되었다가 옥사했고 소련파였던 박창옥은 소련으로 망명하였습니다. 당시 중국공산당 제8차대회에 조선노동당 축하단 대표로 중국에 갔던 최용건에게 중국 주석 모택동이 “당신들은 최창익, 박창옥 부수상과 여러 명의 중앙위원을 제명처분했다. 윤공흠, 서휘, 리필규, 김강이 중국으로 도피해왔고 소련대사 리상조와 교통부장도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며 김일성의 8월 종파사건을 비난하였습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의 개입이 앞으로 자기의 권력유지에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주체라는 용어를 정치사상사업에 적극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외부세계를 차단하고 주체라는 굴레를 씌운 북한의 정치사상사업은 3대 세습을 위한 현대판 김씨 왕족 독재의 도구로 전락되었습니다. 다음시간에는 정치사상사업에서 북한당국이 중시하였던 문화예술의 정치화에 대해 얘기하기로 하고 오늘은 여기에서 마칩니다. 지금까지 탈북민 김주원이었습니다.

 

** 이 칼럼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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