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순희의 성공시대] ‘풀하우스’를 보고 탈북한 선생님 (2)

서울-김인선 kimi@rfa.org
2023.11.16
[마순희의 성공시대] ‘풀하우스’를 보고 탈북한 선생님 (2) 남북코디네이터 양성교육 모습.
/새조위 웹사이트 캡쳐

안녕하세요? ‘여기는 서울김인선입니다. 탈북민이 생각하는 성공은 어떤 것일까요? 이 시간에는 남한에서 살아가는 탈북민들의성공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드립니다. 탈북민들의 국민 엄마, 상담사 마순희 선생과 함께 하겠습니다. 안녕하세요?

 

마순희: . 안녕하세요.

 

김인선: .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서 김태희 씨에 대한 이야기를 나눠볼게요. 한국 드라마가 태희 씨의 삶을 달라지게 했죠?

 

마순희: 그렇습니다. 음악교사였던 김태희 씨는 2007, 중국에 있는 친척집을 방문하느라 여권 발급을 받고 중국에 들어갔는데요. 그곳에서 한국 드라마를 접하면서 한국을 동경하게 됐습니다. 북한으로 돌아간 후 탈북을 결심했고, 2008 1, 막내딸과 함께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태희 씨는 2008 8, 한국에 정착하자마자 브로커 비용을 갚기 위해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돈부터 벌었습니다. 태희 씨는 7개월 만에 브로커 비용 전부를 갚을 수 있었는데요. 빚을 청산한 후 가장 먼저 시작한 것이 공부였습니다. 교회 목사님의 권유로 신학대학교에 진학하게 되었는데요. 적성에 맞지 않아 2년 정도 다니다가 중단하고 사회복지와 음악치료사 공부를 병행하면서 자격증까지 취득했습니다. 태희 씨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부업도 했는데요. 하지만 2011 8월 뜻하지 않은 교통사고로 원치 않았던 휴식기를 갖게 됐습니다. 입원 기간 진로 고민을 하면서 전문적인 일을 해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됐는데, 몸이 회복되어 바깥 활동을 어느 정도 할 수 있게 됐을 무렵, 남북하나재단에서 2012년에 처음으로 탈북학생들을 위한 코디네이터 선생님들을 공채로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김인선: 당시 탈북학생들과 탈북민 자녀들 중 상당수가 학교 생활 적응에 어려움을 느끼고 있어서 한국 정부에서 대안을 찾은 거죠.

 

마순희: . 그렇습니다. 탈북 학생들을 전담으로 맡아 학업도 도와주고 심리적인 안정을 위해 상담 업무까지 가능한 선생님들을 배치하는 것이었습니다. 모집 공고가 나왔을 때 태희 씨는 회복이 덜 된 상태로 걷기가 조금 불편한 상황이었는데요. 그 와중에도 코디네이터를 모집하는 학교 7곳에 모두 원서를 제출했습니다. 태희 씨는 지원서를 냈던 일곱 학교 모든 곳에서 2차 시험인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처음으로 면접을 한 곳은 경상남도 창원에 있는 초등학교였습니다. 북한에서의 교사 경력과 한국에 와서 받은 사회복지사, 음악치료사 자격증 큰 도움이 됐고 태희 씨는 채용 과정을 거쳐 당당히 합격해서 교원이 되었습니다.

탈북 학생을 전담으로 맡는 코디네이터로, 남북코디네이터라 부르는데요. 이들은 전문 교사가 아니라 탈북 학생들이 공부하는 학교에서 보조 교사로, 상담 업무까지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한국의 정규 학교에 진학한 탈북 학생들의 학업과 학교 생활 적응을 돕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기에 남북코디네이터로 학교에서 근무하는 것은 탈북 여성들, 특히 교사 출신의 탈북민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직업이기도 하죠.

 

김인선: 하지만 남북의 교육문화가 달라서 어려움도 있다고 하는데요. 김태희 씨는 어땠나요?

 

마순희: 태희 씨가 직면한 어려움은 현실적인 문제였습니다. 취직한 학교가 서울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는 경남 창원이었고, 아는 지인 한 명 없는 낯선 곳이었습니다. 출퇴근을 하려면 거처를 마련해야 했는데, 그동안 교통사고로 입원치료를 받다 보니 이렇다 할 일을 할 수 없었던 관계로 수중에는 단돈 22만원, 168달러가 전부였습니다. 찜질방에서 잠을 자고 아침은 굶고, 점심은 학교에서 먹고, 저녁은 빵과 우유로 버텨 나갔습니다. 며칠을 그렇게 지내면서 태희 씨는 막막한 마음에 탈북민들이 찾아간다는 교회로 갔습니다. 이제 막 세워지는 개척교회였는데요. 태희 씨의 사정을 듣고 지내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건물을 짓는 중이라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지만 숙식을 해결할 수 있게 됐다는 것만으로 태희 씨는 감사한 마음이었습니다.

 

김인선: 하지만 오래 머물 수는 없었을 것 같은데, 마땅한 거처는 금방 구할 수 있었나요?

 

마순희: . 숙식비로 나가던 돈을 줄일 수 있게 되면서 학교에서 받는 급여 대부분을 저축할 수 있었으니까요. 태희 씨는 교회에서 청소도 하고 채소도 가꾸면서 돈을 모았고 3개월 후에는 1140달러(150만원) 정도되는 보증금을 내고 월세집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남북코디네이터로 학교에서의 업무도 점점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갔지만, 태희 씨는 현실에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남북코디네이터는 많은 탈북민들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 2-3년 정도의 계약 기간만 일할 수 있었습니다. 이때 잊고 있던 꿈이 생각났습니다. 한국에 입국해서 처음 지내게 되는 탈북민 초기정착 교육기관인 하나원에서 태희 씨는 자신의 이름을 내건 음악학원을 세우는 것을 꿈꿨었는데요. 그 꿈을 실현해야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태희 씨는 남북코디네이터를 시작한 지 2년 만에 사랑하는 학교를 떠났고, 바라던 음악학원을 차렸습니다.

 

김인선: 학원을 차리면 수강하는 학생 수에 따라 수입이 달라지거든요. 그래서 학생 관리는 기본이고, 때로는 학부형들과도 잘 지내야 합니다. 그런데 탈북민들이 어려워하는 게 소통이잖아요. 태희 씨가 잘 해낼 수 있었을까요

 

마순희: . 학교에서 코디네이터로 일하면서 학생들을 관리했고, 상담사 역할까지 했던 것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태희 씨는 음악치료사 자격증까지 갖고 있잖아요? 그 장점을 활용해 열심히 일하다 보니 차츰 수강생이 늘어나고 결국은 안정적인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학원을 차린 지 2년쯤 됐을 때 태희 씨는 엄청난 시련을 맞았는데요. 2015년 메르스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감염 확산 우려로 순식간에 사람들이 사라졌고, 수강생이 줄어드니 수입도 줄었습니다. 태희 씨는 자신만의 방법으로 위기를 넘겼는데요. 학원을 쉬는 시간이면 손풍금(아코디언)을 악기사에서 받아서 홀로 판매에 나섰습니다. 악기를 팔면 수입의 일정 부분은 회사에 주고 태희 씨는 약간의 수수료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손풍금(아코디언)을 팔면서 학원 홍보 활동도 잊지 않았습니다. 고가의 악기를 구입한 사람이라면 그게 아까워서라도 연주를 배울 것이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태희 씨의 생각은 적중했고 메르스 사태가 수습된 이후 다시 수강생들이 학원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태희 씨는 위기 속에서도 희망을 찾았고 기회를 잡기 위한 발판을 만들어 나갔습니다. 하지만 얼마 전 다시 감염병이 돌았잖아요. 전 세계적으로 우리 모두를 힘들게 했던 코로나 비루스 때문에 태희 씨는 코로나 사태로 또다시 시련의 고비를 맞았지만 메르스 때처럼 담담하게 잘 이겨냈습니다. 2013 5월에 개업했으니까 금년까지 만 11년이 되었는데요. 지금까지 학원을 잘 운영해 나가고 있습니다.

태희 씨의 음악학원은 회사에 다니다 나이가 차서 정년퇴직을 하신 분들, 또 정년퇴직을 앞두신 분들을 비롯해서 연세가 비교적 높으신 분들이 즐겨 찾는 학원인데요. 여유롭게 악기를 배우면서 자신들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서 너무 좋아들 한답니다. 태희 씨는 함께 하는 그분들 때문에 더 오랫동안 음악학원을 운영하고 싶다고 하는데요. 소문을 듣고 먼 곳에서까지 찾아오는 수강생들로 김태희음악학원은 지금도 아침 9시부터 저녁 9시까지 손풍금 소리가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김인선: 관건은 건강입니다. 현재 태희 씨의 건강은 어떠신가요

 

마순희: . 식단 관리부터 체력 관리까지 열심히 하다 보니 건강한 편이라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김태희 씨는 통화하면서 앞으로 70까지는 학원을 계속해야 한다며 웃더라고요. 태희 씨는 앞으로 통일이 되면 북한에 정보화 시대에 맞는 현대적인 학교를 세우고 싶다는 큰 꿈을 꾸고 있는데요. 열심히 만학도들을 위한 음악 교육에 한 몸을 바치고 있는 김태희 원장님의 멋진 내일을 응원합니다.

 

김인선: 원했던 꿈을 최종적으로 이루어 낸 태희 씨잖아요. 북한 고향땅에서도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꿈을 다시 실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함께 바라겠습니다. 마순희의 성공시대, 오늘은 여기서 인사드립니다. 함께 해주신 마순희 선생님, 감사합니다.

 

마순희: . 감사합니다.

 

김인선: 여기는 서울. 지금까지 김인선이었습니다.

 

에디터 이예진, 웹팀 김상일

댓글 달기

아래 양식으로 댓글을 작성해 주십시오. Comments are modera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