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이게 문제지요-31] 김일성, 해방 후 권력 유지 위해 정적 잔인하게 숙청

워싱턴-변창섭, 란코프 pyonc@rfa.org
2012-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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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3월 김일성의 러시아 방문 모습.
1949년 3월 김일성의 러시아 방문 모습.
사진-연합뉴스 제공

변: 북한이 직면한 총체적인 문제점을 차근차근 짚어보는 ‘북한, 이게 문제지요’ 시간입니다. 오늘도 대담엔 북한 전문가로 남한 국민대 교수이신 안드레이 란코프 박삽니다. 안녕하세요. 오늘도 김일성이 북한에 남긴 유산에 관해 살펴보지요. 북한 매체를 보면 언제나 김일성을 온통 미화하고 신격화하는 데 집중돼 있는데요. 김일성의 일생을 들여다볼 때 초기 항일 유격시절이 특히 그런 것 같은데요.

란코프: 제가 보기에도 김일성의 생애 가운데 그나마 꼽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장점은 항일 빨치산 시절과 유격대 시절일 겁니다. 북한의 선전매체는 김일성 생전 시절에 그의 삶을 많이 미화했습니다. 특히 북한 어용언론과 어용학자들은 김일성의 항일 유격대 활동의 의미도 많이 과장하였습니다. 그런 지나친 선전에도 불구하고 1930년대 김일성의 만주 무장 투쟁은 영웅적인 시대로 볼 수 밖에 없습니다. 당시만 해도 김일성은 항일이란 숭고한 이념을 위해서 싸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항일 시절 아주 어려운 시련을 겪었지만 절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변: 그런데 당시 자료를 보면 1930년대 항일 유격대를 이끈 사람으로 김일성이란 이름이 나오는데, 바로 이 김일성은 북한을 지배한 김일성이 아니라는 말도 있는데요. 실제 그런가요?

란코프: 저는 15년, 20년 전에 북한의 1940~50년대 역사에 대해서 연구를 많이 했습니다. 또 러시아에서 김일성처럼 1930~40년대 소련 군대 생활을 했던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 때문에 당시 김일성을 가짜 김일성으로 볼 수 있는 어떤 근거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1937년에 항일 보천보 작전을 했던 김일성은 1994년에 사치스러운 궁전에서 죽은 김일성과 같은 인물입니다.

변: 그렇군요. 그런데 항일 게릴라 시절 이처럼 순수한 이념을 가진 김일성이 북한을 통치하면서 왜 그처럼 잔인하고, 부패했을까요?

란코프: 간단하게 말하면 그가 장악한 절대적인 정권 때문에 그렇습니다. 저는 조선이 해방된 1945년과 이듬해에 김일성을 사귀던 러시아 군인들을 자주 만났습니다. 특히 플로토니카스 대령하고 메클레오 중령이란 사람과 자주 만났습니다. 북한 사람들은 그분들이 이름을 잘 모르겠지만 해방 직후 그 소련 군인들은 김일성 보다 북조선에서 힘이 훨씬 많았습니다. 당시 김일성은 소련군대 대위로써 소련 군대 명령을 따라 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1945년 김일성을 지도한 그들의 이야기를 감안할 때 당시만 해도 김일성은 정권에 대한 야심이 별로 없었습니다. 플로토니카스 대령의 말에 의하면 김일성은 1946년에 북한 인민 위원회 위원장이 될 것을 알고 기분이 많이 나빠졌습니다. 왜냐하면 김일성은 당시 군대 생활을 좋아했지만 정치 생활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변: 이때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정치적인 야심이 별로 없었다는 거네요.

란코프: 그래요. 야심이 없었습니다. 김일성은 그대로 독립국가가 된 조선에서 국민으로 살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김일성은 이내 정치 생활에 빠져들었습니다. 이것은 그의 선택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알 수 없지만 그의 선택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소련군대의 압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불행히도 그가 빠진 정치세계는 스탈린주의 공산당 정치입니다. 이 정치의 기본 원칙은 “내가 너를 죽이지 않으면 너는 나를 죽일 것이다” 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북한 정치뿐 만 아니라 사회주의 국가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있었습니다. 소련에서 레닌 시대 소련 공산당 지도부의 구성을 보면 스탈린 시대 외국 간첩의 딱지를 붙이고 학살된 사람들은 절반 정도 입니다. 북한도 별 차이가 없습니다.

변: 정적을 상당히 잔혹하게 숙청하던 시대인데요. 북한의 경우 김일성에 의해 숙청된 최고 간부들이 많았지요? 이를테면 박헌영이나 리승엽같은 국내파 공산주의자는 물론이고 소련파의 허가이를 꼽을 수 있는데요.

란코프: 물론 그렇습니다. 예를 들면 1949년 노동당 지도부를 봅시다. 이것은 남조선 노동당과 북조선노동당과 합당한 직후 생긴 통일 노동당 최초의 정치 지도부입니다. 당시 정치위원들은 10명이었습니다. 나중에 그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10명 가운데 자연사 한 사람은 2명 밖에 없습니다. 그 중 한 명은 김일성이고, 또 한 명은 1949년 당시에도 나이가 제일 많던 허헌입니다. 하지만 박헌영, 허가이, 박일우, 박정애, 이승엽 등 6명이 숙청을 당했습니다. 또 2명은 한국전 때 전사하였습니다. 10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숙청됐습니다.

변: 김일성이 이처럼 지도부에 있던 사람들을 숙청한 까닭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했기 때문인가요?

란코프: 1940~50년대까지만 해도 김일성은 북한에서 절대적인 통치자로 인정을 받지 못했습니다. 아마 50년 중엽까지도 그랬습니다. 한국전쟁 직후까지도 노동당 지도부에서 김일성 보다 인기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1940년대 말이나 1950년대 초 김일성에게 도전 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로 허가이입니다. 소련 공산당 출신입니다. 그는 소련 공산당에서 중급 간부가 되었습니다. 1945년에 소련정부에 의해서 북한으로 파견되었습니다. 당시 그의 과제는 북한 정치인들을 감시하기도 하고 도와주기도 해야 했습니다.

둘째로 박헌영입니다. 40년대까지 조선 공사주의 운동, 사회주의 운동에서 김일성보다 더 많이 알려졌던 사람입니다. 북한 교과서는 이 사실을 절대 언급할 수 없지만, 45년에 조선공산당 최고 지도자가 된 사람은 김일성 보다 박헌영이었습니다. 하지만 1945년 이후 박헌영은 소련에서 지지를 얻지 못해서 그의 정치 역할이 많이 약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대 초까지 박헌영은 김일성을 능가하는 능력과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셋째는 김두봉입니다. 그는 현대 한국 언어학 창시자 중 한 명입니다. 탁월한 지식인입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체류했으니 중국과 아주 가까운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압니까? 53년 여름 허가이는 숨진 채 발견되었습니다. 북한 매체는 공식적으로 자살이라 주장했지만 당시 소련 간부들이나 외교관 대부분은 암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박헌영은 1955년에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미국간첩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김두봉은 57년까지 최고 인민회의 위원장으로 지냈지만 58년에 제거됐습니다. 물론 비판대상이 되었습니다. 결국 1940년대 말 김일성과 힘이 비슷하고 그에게 도전할 수 있었던 정치인들은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하였습니다.

변: 네, 말씀 감사합니다. ‘북한, 이게 문제지요’ 오늘 순서에서는 해방 후 북한에서 김일성이 지도자로 등장한 배경, 그리고 그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적들을 잔인하게 숙청한 사실에 관해 란코프 교수로부터 들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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