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세상] 102세 노모 극진히 모시는 72세 김갑순씨
워싱턴-이원희 leew@rfa.org
2008.05.15
2008.05.15
자식으로서 할 도리를 했는데 과분한 상을 받아서
한편으로는 기쁘고 한편으로는 송구스럽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들로서 또 남편으로서 몸이 건강치 못한 부인 몫까지 알뜰하게 챙기고 있는 올해 72살의 김갑순 씨는 할 일을 했는데 상까지 받았다며 겸손해 합니다.
김 갑순 씨의 어머니는 올해 102살입니다. 102살의 나이지만 식사도 잘하고 부추기면 산보도 할 정도로 아주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고 김 갑순 씨 부인은 척추 수술을 받아서 거동은 불편하지만 이렇게 옆에 있어주어서 무엇보다 고맙고 행복하다고 김 갑순 씨는 말 합니다.
제 식구가 장애 2급 판정을 받아서 제가 식사 빨래 등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못하는데 당연히 해야 되고 재미로 하니까 ...(웃음)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북 도청 사회복지과 배 준형 계장은 영주 시 풍기 읍에 사는 김 갑순 씨는 효성은 주변에 이미 알려져 있고 병든 부인까지 돌보며 틈틈이 시간을 내서 봉사활동까지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면서 김 갑순 씨를 어버이 날 장한 어버이 부분 대상으로 추천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어르신이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서 밖에 나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를 업어가지고 집에 들어가시고 계단이 있어서... 집안 살림을 다하시고 정원도 가꾸고 보기만 해도 놀라워요. 다른 사회봉사 활동도 많이 하세요 영주 시 선거관리 위원회 활동, 경찰서 방법위원활동도 하셨고...
김갑순 씨의 고향은 북한입니다. 평안남도 개천군입니다. 8살 초등학교 때 고향을 떠나왔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고향산천이 다 떠오르고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며 어린 시절 추억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말 합니다.
개천군 중남 면 청곡리라는 곳으로 일자로 앞에는 개천이 흐르고 남포선 철길이 있었고 우리 연안 김가 집성촌 이었어요. 아버님이 일제시대 때 구장도 보시고 군청에서 일을 보시고 하셔서 많은 추억이 있고 생각이 많이 납니다. 집 뒤에는 배나무들이 있었고 가방 걸쳐 메고 누님들하고 학교에 가던 생각도 나고... 학교까지 한 10리 되었습니다.
김 갑순 씨는 해방되던 해 1945년 온 가족이 북한을 떠나 증조할아버지께서 먼저자리를 잡았던 인삼과 사과로 유명한 경상북도 풍기가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김갑순 씨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전쟁후의 생활이 제일 힘겨웠던 시기였다고 회고합니다.
6.25후 피란 갔다 와서 그 당시 참생활이 어려웠어요. 식사도 하루에 두 끼밖에 못하고 나무하러다니고 ... 저뿐만 아니고 그 당시 우리세대, 어르신 자식들 다 어렵게 살았습니다.
감갑순 씨가 북한을 떠나 터전을 잡은 경상북도 풍기는 인삼, 사과, 직물 세 가지가 유명한 곳입니다. 김갑순 씨는 6.26전쟁 뒤 풍기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직물 공장을 시작 하게 됐습니다. 지금 같은 기계공업이 아닌 수공업 이었지만 열심히 일하다 보니 가족들의 생계를 이끌 수 있었고 2남 2녀 자녀들을 다 공부시켜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기들의 몫을 다하고 있다며 뿌듯해 합니다.
이제 성장한 자녀들이 도시로 외국으로 흩어져 살다보니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와 건강치 못한 어머니 그리고 가정의 모든 짐을 떠안고 있는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다면서 김갑순 씨는 오히려 흐믓해 합니다.
딸은 애들 가르치고, 맏사위는 경찰 간부로 있습니다. 아들하고 딸 들은 자주 내려옵니다. 그리고 막내는 가족들이 상해 회사로 나간 지 2년이 되어서 1년에 한번 씩 들어옵니다. 제 생일날 들어왔다 갔습니다.
김갑순 씨는 평생 가정을 꾸려가면서 귀중하게 생각 한 것은 가족들의 화목 이었다며 직물공장으로 큰돈을 벌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내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화목하게 지내온 것이 가장 큰 재산 이라고 강조 합니다.
평범한 가정의 보통 아버지들이 모두 갖는 소박한 소망입니다. 김 갑순 씨는 자신의 소망은 다 이루어진 것 같다고 생각 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아 있는 외갓집 시구들이 자리 잡고 있다며 안쓰러워합니다. 김갑순씨 아버지가 일본시대 때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숙청을 시작할 무렵 김갑순씨 가족은 남쪽으로 숙청을 피해 내려왔지만 북에 있는 외갓집 식구들은 60년이 넘도록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면서 김갑순 할아버지는 안타까워합니다.
외가 집은 평북 운산이라는 곳 금광이 많은 곳.... 북한이 아주 폐쇄된 국가라 좀 개방도 하고 지금 보면 우리 대한민국하고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한국과 대화도 하고 북한의 백성들을 위정자들이 생각을 좀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통일은 아니더라고 서신왕래라도 하면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102세 되신 어머니가 한평생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시던 친정 가족들을 못 보고 돌아가신다면 얼마나 한이 되겠느냐며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도 자식의 몫인데 어머님 생전에 외가 쪽의 생사만 이라도 알려 드리고 싶다고 말 합니다.
김 갑순 씨는 어머니가 그때 까지만 이라도 살아 계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싶은 노래가 있다며 노래 한곡을 신청했습니다.
노래: 모정의 세월
동지섣달 긴긴밤이 짧기만 한 것이 (노래) 아 모정의 세월 듣고 싶습니다.
아름다운세상, 노모를 극진히 모시고 사는 올해 나이 72살의 효성이 깊은 아들 김 갑순 씨의 얘기를 전해드렸습니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아들로서 또 남편으로서 몸이 건강치 못한 부인 몫까지 알뜰하게 챙기고 있는 올해 72살의 김갑순 씨는 할 일을 했는데 상까지 받았다며 겸손해 합니다.
김 갑순 씨의 어머니는 올해 102살입니다. 102살의 나이지만 식사도 잘하고 부추기면 산보도 할 정도로 아주 건강하게 생활을 하고 있고 김 갑순 씨 부인은 척추 수술을 받아서 거동은 불편하지만 이렇게 옆에 있어주어서 무엇보다 고맙고 행복하다고 김 갑순 씨는 말 합니다.
제 식구가 장애 2급 판정을 받아서 제가 식사 빨래 등 청소를 하고 있습니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못하는데 당연히 해야 되고 재미로 하니까 ...(웃음) 기쁜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경북 도청 사회복지과 배 준형 계장은 영주 시 풍기 읍에 사는 김 갑순 씨는 효성은 주변에 이미 알려져 있고 병든 부인까지 돌보며 틈틈이 시간을 내서 봉사활동까지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면서 김 갑순 씨를 어버이 날 장한 어버이 부분 대상으로 추천을 하게 된 이유를 설명합니다.
이 어르신이 할머니를 휠체어에 태워서 밖에 나오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할머니를 업어가지고 집에 들어가시고 계단이 있어서... 집안 살림을 다하시고 정원도 가꾸고 보기만 해도 놀라워요. 다른 사회봉사 활동도 많이 하세요 영주 시 선거관리 위원회 활동, 경찰서 방법위원활동도 하셨고...
김갑순 씨의 고향은 북한입니다. 평안남도 개천군입니다. 8살 초등학교 때 고향을 떠나왔지만 지금도 눈을 감으면 고향산천이 다 떠오르고 나이가 들수록 고향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며 어린 시절 추억이 그대로 담겨 있다고 말 합니다.
개천군 중남 면 청곡리라는 곳으로 일자로 앞에는 개천이 흐르고 남포선 철길이 있었고 우리 연안 김가 집성촌 이었어요. 아버님이 일제시대 때 구장도 보시고 군청에서 일을 보시고 하셔서 많은 추억이 있고 생각이 많이 납니다. 집 뒤에는 배나무들이 있었고 가방 걸쳐 메고 누님들하고 학교에 가던 생각도 나고... 학교까지 한 10리 되었습니다.
김 갑순 씨는 해방되던 해 1945년 온 가족이 북한을 떠나 증조할아버지께서 먼저자리를 잡았던 인삼과 사과로 유명한 경상북도 풍기가 제2의 고향이 되었습니다. 김갑순 씨는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6.25 전쟁을 겪으면서 전쟁후의 생활이 제일 힘겨웠던 시기였다고 회고합니다.
6.25후 피란 갔다 와서 그 당시 참생활이 어려웠어요. 식사도 하루에 두 끼밖에 못하고 나무하러다니고 ... 저뿐만 아니고 그 당시 우리세대, 어르신 자식들 다 어렵게 살았습니다.
감갑순 씨가 북한을 떠나 터전을 잡은 경상북도 풍기는 인삼, 사과, 직물 세 가지가 유명한 곳입니다. 김갑순 씨는 6.26전쟁 뒤 풍기에서 학교를 졸업하고 군대 갔다 와서 직물 공장을 시작 하게 됐습니다. 지금 같은 기계공업이 아닌 수공업 이었지만 열심히 일하다 보니 가족들의 생계를 이끌 수 있었고 2남 2녀 자녀들을 다 공부시켜 지금은 어엿한 사회인으로 자기들의 몫을 다하고 있다며 뿌듯해 합니다.
이제 성장한 자녀들이 도시로 외국으로 흩어져 살다보니 자주 만날 수는 없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연세 많으신 할머니와 건강치 못한 어머니 그리고 가정의 모든 짐을 떠안고 있는 아버지를 위로하고 있다면서 김갑순 씨는 오히려 흐믓해 합니다.
딸은 애들 가르치고, 맏사위는 경찰 간부로 있습니다. 아들하고 딸 들은 자주 내려옵니다. 그리고 막내는 가족들이 상해 회사로 나간 지 2년이 되어서 1년에 한번 씩 들어옵니다. 제 생일날 들어왔다 갔습니다.
김갑순 씨는 평생 가정을 꾸려가면서 귀중하게 생각 한 것은 가족들의 화목 이었다며 직물공장으로 큰돈을 벌지 못했지만 그래도 가족들이 내일에 대한 꿈을 가지고 화목하게 지내온 것이 가장 큰 재산 이라고 강조 합니다.
평범한 가정의 보통 아버지들이 모두 갖는 소박한 소망입니다. 김 갑순 씨는 자신의 소망은 다 이루어진 것 같다고 생각 하지만 늘 마음 한 구석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아 있는 외갓집 시구들이 자리 잡고 있다며 안쓰러워합니다. 김갑순씨 아버지가 일본시대 때 공무원이었기 때문에 해방이 되자 북한에서숙청을 시작할 무렵 김갑순씨 가족은 남쪽으로 숙청을 피해 내려왔지만 북에 있는 외갓집 식구들은 60년이 넘도록 생사조차 알 길이 없다면서 김갑순 할아버지는 안타까워합니다.
외가 집은 평북 운산이라는 곳 금광이 많은 곳.... 북한이 아주 폐쇄된 국가라 좀 개방도 하고 지금 보면 우리 대한민국하고 문을 닫으려고 하는데 한국과 대화도 하고 북한의 백성들을 위정자들이 생각을 좀 해 주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통일은 아니더라고 서신왕래라도 하면 좋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102세 되신 어머니가 한평생을 그리워하고 보고 싶어 하시던 친정 가족들을 못 보고 돌아가신다면 얼마나 한이 되겠느냐며 어머니의 한을 풀어드리는 것도 자식의 몫인데 어머님 생전에 외가 쪽의 생사만 이라도 알려 드리고 싶다고 말 합니다.
김 갑순 씨는 어머니가 그때 까지만 이라도 살아 계셨으면 하는 마음으로 드리고 싶은 노래가 있다며 노래 한곡을 신청했습니다.
노래: 모정의 세월
동지섣달 긴긴밤이 짧기만 한 것이 (노래) 아 모정의 세월 듣고 싶습니다.
아름다운세상, 노모를 극진히 모시고 사는 올해 나이 72살의 효성이 깊은 아들 김 갑순 씨의 얘기를 전해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