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남한은 TV를 통해 북한 매체에서 소개하는 주민들의 문화생활 소식을 잠깐잠깐 소개해주는데요, 얼마 전에는 휴가를 즐기는 북한 주민들의 일상을 보게 됐어요. 부부들이 새까만 솥을 매고 바다에 가서 돌을 척척 쌓고 불을 때서 어죽을 만들어 먹는 장면에서 북한 방송원이 '휴가를 즐기는 우리 인민들' 하면서 부들부들 떠는 말투로 방송하더라고요. 방송원의 말투는 듣기 싫었지만…(웃음) 화면 속에 어죽을 쑤는 주민들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했어요.
이해연 : 저도 어죽 끓여 먹던 추억이 새록새록 하네요. 날을 잡아서 온 가족들이 강가에서 가마를 걸어놓고 어죽을 쒀 먹거나 물고기를 잡아서 구워 먹었어요. 강이 바로 옆에 있으니 압록강이 바로 수영장이죠. (웃음) 수영도 하고, 고기도 잡았어요. 남한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는 곳이 따로 있고, 수질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곳에서는 낚시를 못하게 단속하더라고요. 북한은 강에 나가서 표백제 같은 약을 물에 풀어서 물고기가 죽으면 아래쪽에서 소쿠리에다 쓸어 담아요. 그렇게 잡은 물고기로 바로 어죽을 끓여 먹고 구워서도 먹고 했던 게 큰 재미였습니다. 선배님 이번에 계곡 다녀왔다고 했는데 그거랑 좀 비슷하죠?
박소연 : 그렇죠. 해연 씨하고 얘기하다 보니 공감대가 있네요. 남편들이 200미터 정도 올라가 물을 소독할 때 쓰는 가루 표백제를 뿌리면 물고기들이 기절해요. 아래에서 기다리면 하얀 배를 드러내고 떠내려오는 물고기들이 보입니다. 그럼 아내들이 반두로 한 번 잡고, 밑에서는 아이들이 또 한 번 잡는 거죠. 물고기잡이가 끝나면 남자들은 술상을 펴고 술을 마시고, 아내들은 준비해 온 솥에 어죽을 끓었어요. 연기가 나고 장작이 타면서 생긴 재가 어죽 가마에 들어가서 사발에 어죽을 담으면 그 시꺼먼 재가 막 들어가 있는데도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직도 그 맛이 잊혀 지지 않습니다.
이해연 : 물고기를 잡는 과정도 힘들고 수영도 하고, 몸도 지치다 보니 또 배가 고팠고 그때 딱 먹으니까 더 맛있었던 것 같아요.
박소연 : 그렇죠! 그리고 이번 휴가지에서 새로운 경험을 했는데요. 계곡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옆자리의 할아버지가 트로트 음악을 크게 틀어 놨어요. 북한에서는 우리, 어죽을 먹으면서 록음기로 음악을 틀어놓잖아요? 그때는 어떤 노래가 나와도 다 좋더니 남한에서는…
이해연 : 맞아요. 그럴 때는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쳐다봐도 상관없었어요. 남한에서는 음악을 크게 켜놓고 떠들썩하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 하잖아요? 근데 북한에서는 노래를 틀고 시끄러우면 오히려 사람들이 부러워하면서 더 모이는 것 같아요.
박소연 : 그럼요! 흥이 났죠. 그런데 이번에는 그게 그렇게 듣기 싫은데 꺼달라는 얘기를 못 하겠더라고요. 북한에서는 싫다, 좋다 바로 표현했는데…
이해연 : 그걸 개인들끼리는 표현을 정확하게 하죠. 대신 국가에 대해서는 표현을 못 했던 거죠. (웃음) 남한은 정반대인 것 같아요. 국가에 대해서 불만이 있으면 바로 다 얘기를 하죠. 인터넷에 글을 올리기도 하고, 시위도 하지만 개인 간에는 불편하면서도 참아요. 나도 사정이 있으면 그쪽도 사정이 있기 때문에. 그쪽도 자유가 있고요. 그런데 저는 어떤 면에서는 남한의 이런 문화가 좋습니다. 왜냐면, 북한은 국가에 대해서 반항을 못 하기 때문에 개인들끼리 싸우는 거잖아요. 솔직히 개인들끼리는 싸워봤자 남는 것도 없고 별 의미가 없는데요.
박소연 : 국가에 대한 원망을 개인 간에 감정싸움으로 푸는 면이 분명히 있죠. 그리고 이번에 휴가를 다녀오면서 또 다른 변화를 경험했어요. 남한 정착 초기에는 걷기를 죽기만큼 싫어했어요. 북한에서 그 무거운 배낭을 메고 너무 걸어 다녀서 남한에 와서는 진짜 많이 걸어 다니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번 휴가지는 밤이 정말 조용했는데요, 거기를 힘든 줄 모르고 새벽 4시까지 걸었습니다.
이해연 : 그렇게 오랫동안이요?
박소연 : 한 3시간 정도? 걸으면서 등에 무거운 배낭이 없으니까 거뜬했습니다. (웃음) 새벽 네 시까지 감자 배낭 메고 걸으라고 하면 행복하겠냐고요! 아무 목적 없이 그냥 걸었던 게 이번 휴가지에서 제일 좋았던 것 같아요.
이해연 : 저도 어렸을 때 산길로 다니는 것이 일상이었어요. 그때는 산에 올라가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지금은 이유가 달라져서 걷는 것이 별로 힘들지 않습니다. 같은 일을 해도 일하러 가느냐 아니면 휴식하러 가느냐가 다른 것 같아요. 최근에는 산이 너무 좋고 산에 들어갔을 때 들리는 그 새소리, 맑은 공기가 정말 좋아요. 여유를 느끼게 하는 시간이죠.
박소연 : 새벽 4시까지 걷고 잠깐 눈을 붙이다가 7시에 깼어요. 계곡물에 세수하러 나갔는데 물이 흐르는 소리가 너무 좋았어요. 돌 위에 앉아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한참을 앉아 있는데 일행이 아침 먹자고 데리러 왔더라고요. 시간을 보니, 제가 글쎄 한 시간 넘게 물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앉아있었어요. 남한에서는 이런 '멍때린다'고 하죠. 북한에서는 멍 때리면 굶어 죽어요. 부실한 사람이나 생활력이 없는 사람을 북한에서는 멍하다고 표했잖아요.
이해연 : 남한에서는 멍때리기가 필수입니다.
박소연 : 그런가봐요. 물 흐르는 걸 멍하니 바라보는데 머릿속에 아무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계곡 끝에 안개가 연하게 드리워져 있는데 핸드폰을 꺼내 들 생각이 나지 않았어요. 그때 문득 70세가 넘은 연예인이 티비에서 했던 얘기가 생각났어요. 그분이 말하기를 젊었을 때는 길가에 핀 꽃을 보면 꺾어서 꽃병에 담아 혼자 보았는데, 지금은 꽃을 보면 그냥 바라보다가 간대요. 지나가는 사람들도 함께 봐야지… 이런 생각이 든다고요. 저도 예전 같으면 멋있는 장면이라고 전화기 열어 사진을 찍었을 텐데 이렇게 지켜보는 것으로 바뀐 거죠. 감성에 젖어 제 얘기만 줄줄 했는데 해연 씨는 이번 휴가지에 가서, 어떻게 멍 좀 때렸습니까? (웃음)
이해연 : 저도 멍때렸죠. (웃음) 바다는 저녁이 좋더라고요. 낮에는 해도 비치고, 사람들도 수영하느라 북적대서 그럴 틈이 없었는데 저녁에는 누군가가 틀어놓은 잔잔한 노래를 들으면서 바다를 보고 가만히 앉아있는 게 너무 좋더라고요. 일단은 그 순간 아무 생각이 안 드는 것 같아요. 그냥 파도 소리에만 집중하게 되고 물이 나갔다 들어왔다 하는 걸 보니 마음이 편안해지고…
박소연 : 해연 씨도 잘 쉬다 오셨네요. 남한 사람들은 휴가를 가는 목적 중 하나가 '멍을 때리러 간다' 랍니다.
이해연 : 이해가 됩니다. 일상에서는 바쁘게 머리를 써야 하잖아요? 기계도 가끔 쉬어 줘야 하는데 하물며 사람이야 말할 나위 없죠. 그렇게 가끔은 쉬어가는 시간이 있어야 또 일상 안을 더 열심히, 잘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박소연 : 해연 씨는 남한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많은 휴가를 경험해 보진 못했잖아요? 그런데 남한 사람들이 오히려 휴가를 안 가기도 해요. 반면에 탈북민들은 휴가를 빼놓지 않고 꼭 가요. 휴가지에서 먹을 음식도 꼼꼼하게 준비하고 출발하고요. (웃음) 아는 탈북민은 여름 휴가지에서 먹을 농마 국수를 열려서 아이스박스에 담아서 가셨어요. 혼자도 아니고 여럿이 뭉쳐서 휴가를 가는데 한 번은 같이 가자고 전화가 왔어요. 저는 성향이 내성적이라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가는 그 자체가 스트레스라 거절했습니다.
이해연 : 저도 여러 사람이 같이 다니는 건 싫습니다. 북한은 원래 여럿이 함께 갔잖아요.
박소연 : 우리는 항상 무리 속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게 당연했죠. 그리고 탈북민들은 북한에서 마음껏 놀지 못한 한이 있어요.
이해연 : 북한에 있을 때는 무리로 놀러 다니는 게 재미있었잖아요. 그래서 혼자 여행을 다닌다는 인식도 없고, 혹여 혼자 다니면 궁상 맞는다고 생각했어요. 이 부분은 남한에 와서는 확실히 많이 바뀐 것 같은데요. 내 취향을 확실하게 알게 되면서부터 저도 여러 사람과 함께 여행 가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박소연 : 완전히 공감해요. 남한에 와서야 나를 알게 되죠. 그리고 그 취향에 맞는 삶을 사려고 노력하게 됩니다.
이해연 : 북한에 있을 때는 취향에 대해 생각을 해본 적이 없잖아요? 설사 있어도 집단으로 움직이는 사회라 어쩔 수 없이 따라가고 맞춰가다 보니 내 취향을 생각하며 살아야 한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나 자신, 내 취향이 이런 걸 알게 되고 또 중요해졌고요.
박소연 : 맞아요. 이번 휴가는 8명의 남북 친구들이 함께 출발했어요. 그런데 2박 3일 동안 일행이 점점 늘면서 올 때는 거의 20명 정도가 된 거예요. 중간, 중간에 친구들이 합류하면서 사람이 늘었는데 그때부터 스트레스가 쌓이는 시작 했어요. 사람들이 북적이면 반갑고 재밌기도 하지만 저는 휴가를 간 건데…
이해연 : 선배님은 쉬고 싶어서 휴가를 갔는데 사회생활을 하고 오셨군요. (웃음)
북한 주민들에게 살면서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으면 ‘단 하루라도 배부르게 먹고, 실컷 놀고, 편안하게 쉬고 싶다’고 말할 겁니다. 생각해보면 이게 바로 남한식 ‘휴가’ 인데요. 생각해 보면 ‘휴가’라는 건 단순히 ‘놀러간다’, ‘쉬러간다’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한국에서 휴가를 즐긴다는 건 경제적인 수준이 어느 정도 선에 도달했다는 의미가 되니 국가 경제적 의미도 있고요, 특히 북한의 경우처럼 이동이 제한되면 휴가를 즐기기 어려우니 ‘자유’의 척도가 되기도 하죠. 단순히 놀러가는 것 이상의 ‘휴가’ 이야기, 이건 다음 시간에 이어갈게요.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이해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녹음, 제작, 에디팅: 이현주,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