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엄마, 하늘나라에서는…

북한 주민들이 평양의 혁명열사릉을 방문하고 있다.
북한 주민들이 평양의 혁명열사릉을 방문하고 있다. (/REU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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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박소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박소연 : 요즘은 북한 주민들도 추석날 산에 꽃다발을 들고 간다고요? 세상에… 그 사람들 다 한국 드라마 봤네. (웃음) 우리 때는 산에서 사진을 찍을 생각도 전혀 못 했어요. 물론 녹음기를 가지고 간 사람들은 있었어요. 근데 그걸 보고 어르신들은 혀를 차죠. '뭐가 즐겁다고 저렇게 궁둥이를 흔들고 야단이다'. 젊은 저로서는 괜찮다고 생각했어요. 참 그리고 남한은 추석날 도로가 막히잖아요.

박소연 : 반대로 북한은 산이 막힙니다!

박소연 : 맞죠, 북한 추석날엔 산길이 막히고 그 앞 도로가 인파로 막힙니다. 그날만큼은 애들 손을 놓으면 안 돼요. 잘못하다가는 인파 속에서 잃어버릴 수 있거든요.

박소연 : 지금도 기억나는데 산소에서 절할 때 보면 바로 위쪽에서 다른 사람들이 절하는 모습이 다 보이잖아요. 아래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조상 묘에 절을 하는 건지, 위에 엉덩이를 보이는 사람한테 절을 하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묘지가 다닥다닥 붙어있어요. 남한에서는 그런 걸 아직 한 번도 못 봤네요.

박소연 : 저는 가끔 그런 모습이 그리워요. 산에 올라갈 때 여자들은 많은 음식을 준비해서 대야에 담아서 이고 지고 올라가느라 정말 힘들거든요. 남자들은 배낭에다가 겨우 물, 술, 낫 이런 것만 넣고 가죠.

박소연 : 그것도 이젠 옛날 일이 됐어요. 지금은 남자들이 다 들고 가요. 그리고 요즘은 옛날처럼 추석 음식을 대야에 담아 무겁게 이고 가지 않습니다. 대신 음식을 박스에 담아서 잘 움직이지 않도록 하고 또 플라스틱으로 된 가벼운 그릇을 가져가 옮겨 담기 때문에 예전과는 달리 많이 가벼워졌어요. 그리고 음식이 든 박스는 남자들에게 다 매고 가게 하죠.

박소연 : 저희 때는 여자들이 전부 이고 갔는데... 무게가 한 30kg 정도 됐을걸요? 그런데도 저는 그걸 남편이 들어야 된다는 생각을 한 번도 못 했어요. 머리에 따바리(똬리)를 얹어 이고, 혹여라도 깰까 봐 양쪽으로 꼭 붙들고 걸었어요. 남편은 배낭을 메고 아이들 손목 잡고 가는 게 전형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추석 때 북한의 가정 모습이었어요. 어떻게 보면, 추석은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한 명절이지 싶어요. 산에는 고사리, 콩나물 등 나물 냄새가 퍼지면서 너무 즐거웠어요. 그 와중에 옆집 상은 또 얼마만큼 잘 차렸나 목을 쭉 빼서 곁눈질로 보고, 다음번에는 나도 저걸 차려야겠다고 다짐도 해보고... (웃음)

박소연 : 산에 올라가면 엄마들이 다른 가족이 차린 상과 우리 집 상을 비교해 보곤 했어요.

박소연 : 이상하게 사람들은 조상에게 잘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냐하면 미신을 믿었으니까요. 제를 다 지내고 나면 개별적으로 묘 옆에 쭈그리고 앉아서, '아버지 돈 좀 잘 벌게 좀 도와주세요'그러죠. 그리고 가끔 보면 혼자 조용히 올라와서 제를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나중에 알게 됐는데, 그분들은 살아있는 사람에게 제를 지내는 거예요. 바로 탈북민 가족이었어요. 그분들은 남한에 간 가족을 주민등록상 사망이나 행방불명이라고 신고해요. 이유도 그럴듯하게 만들어서 안전부에 신고합니다. 북한에서는 시신을 못 찾는 사고들이 잦기 때문에 사실 확인이 어려워요. 그런 경우에는 딸이 평상시 입던 옷이나 사용하던 물건들을 묻고 무덤을 만들어 제사를 지내요. 만약 추석에 묘지에 가지 않으면 동네 스파이들한테 의심을 사기 때문에 일부러 산에서 우는 연기를 하죠. 북한에 남은 가족들이 남한에 간 가족들 때문에 피해를 보지 말아야 하니까 그렇게 거짓 무덤을 만들어 제를 지내는 겁니다. 이분들은 산에서 음식을 먹지 않고 제사를 지내는 척 대충 시늉만 하고 가는 거예요.

박소연 : 저도 북한 사람인데 처음 듣는 신기한 내용이네요.

박소연 : 우리 때 얘기죠… 우리가 북한 추석 얘기를 하다 보니까 남북의 추석이 너무 다른 것 같이 생각할 수 있는데 또 같은 점도 있습니다. 우선 남한도 추석에는 송편을 먹어요.

박소연 : 북한도 추석에는 명절 음식으로 송편을 만들죠. 또 추석에 꼭 먹어야 하는 음식이라고 하면, 지짐이 있죠. 그 밖에도 차례상에 꼭 올려야 하는 음식들도 있고 올리면 안 되는 음식도 있고요.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나물이나 생선, 과일 등 다양한 음식을 올리지만, 송편은 속에 콩이 들어있어 상에 올리지 않습니다. 돼지고기도 통째로 삶아서 올리는데 속까지 푹 익혀서 올리고요.

박소연 : 눈에 선합니다. (웃음) 생선도 대가리까지 온전하게 다 있어야 해요. 생선을 쪄서 상에 올릴 때는 수령님 동상 옮기는 것처럼 조심했어요.

박소연 : 남한도 차례상을 차릴 때 홀수로 올리나요?

박소연 : 남한도 그렇게 하고 있어요. 북한에서는 고인이 생전에 좋아했던 음식들을 작은 컵에다가 담아서 묘 끝을 파고 거기다 묻어요. 그러면서 '아버지, 많이 잡수세요' 하죠. 남한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술을 따라 묘 주변에 뿌리더라고요. 북한에서는 묘지 앞에 나무 꼬챙이를 꽂고 거기다 불붙인 담배를 얹어 놓기도 해요.

박소연 : 벌초를 다 하고 상을 차릴 때 고인이 살아 있을 때 담배를 좋아하셨으면 피우시라고 담배도 놓아드리고, 술을 좋아하셨으면 술도 부어드리고 그러더라고요.

박소연 : 그런데 남한은 산에서 라이터를 못 켜요. 산이나 납골당에는 담배를 피울 수 있는 장소가 따로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데서나 담배를 피우면 안 되더라고요.

박소연 : 북한은 산불이 날 만한 나무들도 없잖아요. (웃음) 그래서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정해진 법이 없어서 그러기도 한 것 같아요.

박소연 : 그리고 남한에는 추석 쯤에는 꼭 등장하는 기사가 있죠. 남한은 글쎄, 추석 같은 명절이 지나면 이혼율이 갑자기 급증한다고 합니다.

박소연 : 저도 봤어요. 추석 같은 명절 때가 되면 며느리들의 탄식이 들려온다고 하더라고요. 그럴 만한 게 남한에는 제사를 꼭 해야 하느냐는 의견도 있고, 제사가 너무 형식적이다, 굳이 며느리가 해야 할 일이냐며 점차 안 하는 가정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네요.

박소연 : 그러게요. 정답은 딱히 없는 거 같아요. 며느리가 조상을 잘 모시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닌 거 같고, 그렇다고 꼭 며느리가 다 감당해야 하나? 그것도 생각해 보면 남자들도 함께하면 좋잖아요.

박소연 : 예전에 나이 드신 분들은 며느리가 반드시 제사 음식을 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에 반해 요즘 며느리들은 내 조상도 아닌데 내가 꼭 이 일을 해야 하느냐며 반발한다고 하더라고요.

박소연 : 남편의 아버지나 어머니까지는 할 순 있겠는데 증조나 고조까지 해야 하느냐는 의견은 공감이 가요. 얼굴 한번 본 적 없잖아요.

박소연 :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무조건 참석하라는 봉건적인 풍습을 강요해서는 안 되고 본인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원해서 참석하면 좋고, 않는다고 해도 강요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아직 며느리가 아니라 잘 모르겠지만요... 사실 우리가 부모님을 찾아갈 수 있는 제일 큰 명절이 추석이랑 설날이잖아요. 예전에 남한에서는 부모님을 찾아갈 때 시댁부터 항상 먼저 갔다고 해요. 그러다가 여자들이 반기를 든 거죠. 왜 항상 시댁에만 먼저 가냐. 앞으로는 설날에 시댁을 먼저 갔으면, 추석 때는 친정에 먼저 가야 한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합의를 보는 젊은 세대들이 많다고 하더라고요. 이 방법도 나쁘지 않은 거 같아요.

박소연 : 너무 좋은데요? 제가 남한에 와서 제일 많이 들었던 질문이 '북한 며느리들은 추석이 되면 시댁에 가서 싸우지 않냐?' 였습니다. '물론 남자들이 술 먹고 아내에게 서운하게 하면 난리 나죠. 근데 그걸 싸움이라고 안 하거든요. 왜냐하면 추석이니까 이해를 해줘요. 그리고 음식을 만드는 게 북한 여성들에게는 행복한 노동이라고 설명했어요. 워낙 없는 살림에 음식 풍족하게 하면 행복한 거죠. 그러나 남한에서는 추석 음식을 만드는 일이 싸우는 큰 이유로 꼽힌다고 합니다.

박소연 : 솔직히 북한 며느리들도 힘들긴 하지만 힘들다는 얘기를 못 할 뿐이죠. 왜냐하면, 내 부모님이든 남편의 부모님이든 조상을 잘 모셔야 일이 잘된다는 인식이 크고 또 힘들어도 그때는 뭐라고 말도 못 하고 무조건 음식을 준비했던 것 같아요. 그나마 아이들에게 심부름시키는 게 도움이 되잖아요. 그때는 아이들도 투정을 못 부려요. 그저 시키는 대로 하고 남편들도 마찬가지예요.

박소연 : 해연 씨가 말하는 건 지금의 북한 추석 풍경이잖아요. 저희 때는 추석을 준비하는 과정이 너무 행복했어요. 집에다가 콩나물을 놓고, 생선을 사서 소금을 뿌려 김치움에 보관하는 일들이 너무 행복했고 저뿐만이 아니라 주변 이웃들도 다 그랬어요. 그리고 추석날 부모님 묘에 형제들이 음식을 해서 모이는데 펼쳐 놓으면 대 잔칫상이 차려져요. 마지막에 남는 음식이 있으면 제일 못사는 형제에게 음식을 다 줘요. 그 모든 것은 맏며느리가 지휘하거든요. 그리고 추석에 꽃제비 아이들이 옆에 와서 먹을 걸 달라고 하면 안 쫓아버리잖아요?

박소연 : 산에서 음식 나누는 건 지금도 같지만 요즘은 꽃제비가 없어요.

박소연 : 우리 때는 꽃제비들이 새벽부터 묘지가 있는 산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어요. 척 보면 알죠. 그래도 애들이 너무 무례하게는 안 해요. 아이들도 추석날만큼은 자기들에게 선의를 베푼다는 걸 알거든요. 저는 그냥 사과 하나 쥐여 줘서 보내고 싶은데, 남편은 봉지에다가 지짐까지 담아서 아이들에게 줬어요. 음식을 받아 든 아이들이 인사하는데 애들 머리가 땅에 닿아요. 그걸 보면 마음이 아프면서도 내가 오늘 착한 일을 했다는 생각에 뿌듯하기도 했어요.

박소연 : 그날은 아이들에게도 배불리 먹을 수 있는 날이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추석은 우리 민족의 명절이라 남북이 비슷한 점이 많아요. 다만 남쪽은 어른들은 옛날 방식을 고유하고 젊은 사람들은 요즘에 맞춰야 한다고 세대 차이가 나는 것이죠. 그런데 북한에서도 그런 세대 차이는 있거든요.

박소연 : 세대 별생각 차이는 결코 없어질 수가 없어요. 살아온 시대와 환경이 달랐기 때문에 세대 차이로 충돌하고 또 그러면서 발전도 하는 것이죠. 그래도 추석 명절은 풍요롭고 모든 걸 나누는 때라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이 풍요로운 추석 명절에 가장 생각나는 사람에게 해연 씨는 어떤 인사를 하고 싶어요?

박소연 : 얼마 전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누군가를 위해서 사셨으니까 하늘나라에서는 자신을 위해서도 좀 누리면서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박소연 : 해연 씨가 얘기하면서 눈이 빨개졌는데 저도 2년 전에 남동생이 죽었어요. 군대 가는 걸 보고 탈북했는데 지금 살아있으면 38살이 되었겠네요. 간암에 걸렸었는데, 제 동생이 저 세상에서만큼은 좀 아프지 말았으면 좋겠네요. 잘 지내라고 말해주고 싶어요. 갑자기 방송 마무리가 좀 슬프게 됐는데, 어떡하겠어요. 삶이란 것이 기쁨과 슬픔이 항상 교차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도 잠시 후에 해연 씨는 또 웃으면서 일상을 시작할 거예요. 저도 마찬가지고요. 이 방송을 듣고 계시는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도 이제는 10월이 지났으니까 허리를 펴시고 잠시 좀 쉬셨으면 좋겠다는 진심 어린 바람을 전하면서 오늘 방송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저희가 준비한 방송은 여기까지입니다. 함께해 주신 해연 씨도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이 방송을 귀 기울이며 들어주신 우리 청취자 여러분들께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진행에 박소연,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에디터 양성원, 웹팀 김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