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10년 차이] 북한 학생들이 공부를 포기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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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함경북도 무산 출신으로 올해 남한 정착 10년 차인 박소연입니다”

“양강도 혜산 출신으로 이제 막 한국에 정착한 이해연입니다”

10년 차이로 남한에 입국한 탈북민 선후배가 전해드리는 남한정착 이야기.

<우리는 10년 차이>

이해연 : 남한에서는 제일 높은 점수를 받았어도 주변에서 막 대단하다고 잘했다고 칭찬하지는 않더라고요. 남한은 점수를 말하지 않고 그냥 A 정도라든지 다행히 F 학점은 안 나왔다는 식으로 얘기하는데요, 북한에서는 제일 높은 점수를 받으면 반응이 다르잖아요. 공부 잘하는 아들이라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박소연 : 점수도 꼭 붙이죠. 저 집 딸이 10점 최우등 또는 9점 최우등 했단다 그러죠. 대부분 너도나도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이다 보니 공부에 대해서 별로 대수로이 생각 안 하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반면 북한에는 상대적으로 공부를 못하는 아이들이 많아요. 저희 학급 인원이 40~50명인데 평균 절반 이상이 5~6점이 보통이었어요. 우등 성적을 맞으면 단결의 중심에 섰다는 긍지가 있었는데…

이해연 : 맞아요. 저 역시 공부하면서 적당히 중간 정도의 점수를 받자는 생각으로 했던 것 같아요. 꼭 우등에 목숨 걸지 않았습니다.

박소연 : 특히 그런 분위기는 남한의 문화 때문인 것 같은데요, 학생의 학점은 학교 차원 또는 선생님들이 공개하는 건 사생활 침해의 문제로 보는 것 같고 부모들도 실례가 된다고 물어보지도 않아요. 근데 북한은 교실에서 선생님이 다 공개하니까 비밀이 없습니다.

이해연 : 최우등학생들 다 일으켜 세우고 박수쳐 주면서 학생들을 성적으로 구분하잖아요.

박소연 : 그것만 하나요? 낙제점 받은 학생은 뒷자리로 옮겨 앉으라고 하죠. 이것이 바로 북한식 스파르타 교육이죠. 결과만 놓고 따지는 공산사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해연 : 정말 학생들 자존심, 자존감을 떨어뜨리는 방식입니다.

박소연 : 그래도 해연 씨는 남한에서 첫 학기 성적을 잘 맞은 것 같아요. 저는 10년 전 대학 첫 학기에 B+를 맞았어요. 평균은 했으니 용기를 가져도 되겠다고 생각했고 마지막 학기 점수는 A+ 을 받았습니다. (웃음) 그걸 사진 찍어 놓고 아들이 공부를 안 하겠다고 할 때마다 그 사진을 들이대면서 '봐라, 엄마도 이렇게 받았는데 너는 왜 공부를 안 하냐'며 훈육했죠. 아들은 물론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웃음)

이해연 : 결국 본인의 만족이 중요한 것 같습니다. 남이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것보다는 내가 높은 점수를 받은 것에 '그래도 내가 열심히 한 보람이 있구나'라고 생각하면서 자기만족을 느끼고 그것이 동기부여가 돼서 더 열심히 하는 것 아닐까요? 저는 너무 부담을 갖고 하는 것보다 그냥 그 순간순간을 잘 하자는 마음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너무 채찍질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아 능률이 더 안 오르더라고요. 그래서 매 순간, 하루하루 열심히 하고 있고 이것은 시험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생활에서 적용되는 것 같습니다.

박소연 : 지금 해연 씨 얘기를 들으면서 북한에서 그렇게 싫어했던 생활총화를 여기 와서 또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웃음) 그래도 남한에 와서 하는 생활총화는 분위기가 달라서 참 좋네요.

이해연 : 북한처럼 보여주기식 또는 남의 인정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내가 만족했는가 이게 기준이잖아요. 이런 속에서 저의 판단 기준도 많이 변한 것 같습니다.

박소연 : 남한은 결과보다 그것을 얻어내기 위해서 노력했던 과정도 중요하다는 얘기를 많이 합니다. 반면 북한에서는 농담으로 '공산주의자는 오직 결과를 놓고 따진다'라는 얘기를 많이 하거든요. 결과에 목을 매는 이유는 사회적인 분위기도 그렇고 집안에서도 똑같아요. 너무 윽박지르면서 무조건 잘해라 하는 것이 아니라 잘할 수 있도록 교육환경을 조성해 주는 게 더 맞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이해연 : 아드님이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어떻게 하셨어요?

박소연 : 솔직히 처음 남한에 왔을 때 엄마들의 치맛바람을 정말 경멸했어요. 애들이 자유롭게 살면 되는데 엄마들이 왜 저러느냐고 혀를 차며 욕했죠. 그런데 내 아이가 중학교에 들어가니 다른 아이들과 비교하면서 학원이란 학원은 다 넣게 됐습니다. 뒤처질 수 없었거든요. 하지만 아이가 못 받아들였고 '엄마가 어떻게 벌어서 학원비를 대는데 어떻게 네가 이럴 수 있냐'며 화를 냈죠. 지금 생각해 보면 후회가 되는데 그때는 주변에서 좋은 대학 보내려고 엄마들이 열심히 공부를 시키는데 나만 안 그러면 우리 아이만 뒤떨어져 지는 것 같아서 걱정됐습니다.

이해연 : 그런 행동들이 남한이라 가능한 것 같아요. 북한에는 경제적으로 돈이 좀 있는 집안에서는 가정교사를 불러서 공부를 시킬 환경이 되는 경우도 있지만, 돈이 없는 집안에서는 자녀가 공부를 아무리 잘해도 경제적인 뒷받침이 안 되기 때문에 못 시키는 경우도 있거든요. 그런 경우는 네가 알아서 하라고 내버려둘 수 밖에 없죠.

박소연 : 제가 학교 다닐 때는 '고난의 행군' 전입니다. 그때는 사회적으로 공부 분위기가 똑같았어요. 그 후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노동자 자식은 공부를 할 의미가 없었고, 간부 자식들은 국어 소조(동아리)니 수학 소조니 해서 특별하게 관리하며 공부시켰죠. 당시 북한에서는 토대가 나쁘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좋은 대학은커녕 전문학교 정도 밖에 못 가고, 토대가 좋은 집의 자녀들만 대학 가는 게 가능했습니다. 그러니까 부모들도 공부고 뭐고 다 때려 치고 나가 돈이나 벌라고 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90년대 중반부터 그런 분위기가 생겨나기 시작했죠.

이해연 : 간부들 자식들과 노동자 자식으로 나뉘어 진 것이죠. 부모가 노동자이거나 가족 중에 누가 행방불명됐다면 굳이 공부를 시키려고 노력을 안 해요. 행방불명자들은 탈북민으로 낙인 찍으니까요. 그냥 글 읽고 산수만 잘 배우라고 하죠. 그러나 토대가 좋고 돈 있는 집안의 학생들은 특히 아빠가 간부라면 그 자녀도 간부가 될 수 있으니 공부를 시키는 것이고요.

박소연 : 1990년대 후반에는 집마다 아이를 한두 명을 낳을 때예요. 과거에 비해 생활은 어려워졌는데 그에 비해 자식들에 대한 부모의 교육에 대한 관심은 두 세배로 커진 거예요. 옛날에는 보통 자녀를 네다섯 명을 낳았기 때문에 그중에 한두 명만 공부를 잘해도 그러려니 했거든요. 그런데 자식이 한두 명이 되니까 부모들이 신경을 더 쓰게 된 거죠. 제가 제1고등학교를 다녔는데 저희 학교 학생들은 대체로 중앙대학을 많이 갔어요. 그런데 그 친구들이 상업대학이나 이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시장에서 장사를 했어요. 저는 그걸 보면서 공부가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해연 : 그렇죠. 장사 머리는 대학을 안 간 사람들이 노하우가 더 많아서 장사를 잘했거든요. 예전에는 부모들이 무조건 공부 잘해야 한다고 다그쳤고 저희 부모님도 장난 아니었어요. 시험 못 보면 집에서 벌주고 회초리로 다리도 맞고 그랬거든요. 근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바뀌었어요. 공부해서 대학을 졸업해 봤자 장마당에서 야채 파는 건 똑같은 입장이라, 그럴 바엔 차라리 그 시간에 장사를 배우라고 자녀들에게 권하는 집들이 점점 많아진 것 같아요.

박소연 : 남한에는 북한 소식을 시시각각으로 전하는 신문사와 방송국들이 있어요. 거기에서 소개된 기사를 우연히 봤는데, 올해 북한에서 대학에 붙었는데 학생들이 안 와서 교육청 일꾼들이 집집마다 찾아 가서 설득한다는 기사였어요. 군에 있는 아이들이 도에 있는 대학에 다니려면 기숙사에 머물러야 하는데 기숙사 시설이 너무 열악하고, 비용까지 전부 다 자부담해야 하다 보니 대학에 붙었는데도 안 간다는 거예요. 학생 수가 줄어드니까 학교 당국이 직접 가서 설득해야 한다는 거예요. 그 기사를 보고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변했는가 하고 의아했는데 생각해 보니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해연 : 사실 제가 북한에서 전문학교를 나왔잖아요. 제가 다닐 때도 점점 학생 숫자가 줄어서 학교 측에서 학과를 없애야 하나 고민을 했다는 상황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대학을 가서 돈을 들이면 그렇게 한 만큼 뭔가 얻을 게 있나요? 공부를 한 것을 써먹어야 되는데 써먹을 수가 있는 환경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분들이 아이들을 공부시키는 걸 많이 포기하는 것 같아요.요즘은 그래서 학교를 나가는 것보다는 영어, 중국어를 돈을 주고 따로 교육 시키고 학교는 대강 다닙니다. 왜냐면 그 학교에서 배워주는 과목이 우리가 생각해도 이거는 배워야 하나 그런 과목들이 좀 있잖아요.

박소연 : 혁명역사 같은 거? 그거야 그 땅에 살려니 어쩔 수 없이 배우는 것이고… (웃음)

[ 클로징 ] '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 너무나 익숙한 북한 구호입니다 . 주민들의 해외 이동이 철저히 금지된 북한에서 과연 이 구호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남한에는 북한 해외 유학생으로 공부하다 남한으로 들어 온 탈북 청년들이 많습니다 . 그들은 북한이라는 좁은 우물을 벗어나 세상 밖으로 나와 드디어 세계를 볼 수 있었다는데요 . 학구열과 배움에 충만한 그들이 하는 공통적인 말이 있습니다 .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북한을 떠나기로 결심했다는데요 , 그 얘기는 다음 시간에 이어 가겠습니다 .

지금까지 탈북 선후배가 나누는 남한 정착 이야기 < 우리는 10 년 차이 > 진행에 박소연 , 이해연 , 제작에 서울 지국이었습니다 . 함께 해주신 청취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

에디터 이현주

웹편집 한덕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