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공산주의 체제와 고려인들:중앙아시아 강제이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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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지난 주에 이어 계속해서 소련 공산주의 체제하의 고려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소수민족의 하나였던 고려사람들은 공산당에 대한 지지율이 높았고 또 국가로부터는 특별 대우, 특히 대학교육 등의 지원을 많이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1937년에는 이들이 하루 아침에 멀고 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를 당하게 됩니다. 그 배경이 궁금합니다.

란코프 교수: 엄밀히 말해 하루 아침에 생긴 일이라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사실상 1930년대 중엽 들어와 소련국가는 민족주의에 대한 태도를 점차 보이지 않게 바꾸기 시작했습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이 세상에 민족주의만큼 힘이 많은 사상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 자신이 속한 민족이 우수하고 우월한 것을 믿고 싶어합니다. 1930년대 들어와 소련정부는 원래 희망했던 세계혁명이 확산되지 못한 것을 인정하고, 소련이라는 국가를 강화할 필요가 생긴 것을 깨달았습니다. 당연히 당시에 소련에서 제일 많은 다수민족은 러시아민족입니다. 그 때문에 소련 지도자들은 본인들이 러시아 사람이 아니었을 때도 러시아 민족주의를 민중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스딸린은 그루지야 민족 출신입니다. 하지만 그는 사실상 러시아인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의 통치자로 등장했기 때문에, 러시아 민족주의를 많이 강조했습니다. 그는 어떤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불신감과 적대감이 많이 있었고, 또다른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불신감이 별로 없었습니다.

전: 소수민족을 우대했었다는 소련 당국이 어째서 일부 소수민족에 대해서는 불신과 적대감을 갖고 있었을까요?

란코프: 기본적으로 해외에서 자신들의 또 다른 출신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은 소련 당국의 불신대상이 될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또한 제2차 대전 때 파쇼독일과 협력한 소수민족은 차별과 불신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예를 들면 1930년대 소련에서 뽈스까 출신자들이 많이 살았습니다. 그 사람들 거의 대부분은 혁명 이전부터 살아 왔습니다. 하지만 1917년혁명 이후 러시아 식민지였던 뽈스카는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때문에 소련 국적을 가지고 있는 뽈스카 사람이면, 뽈스카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까 아니면 소련에 대한 충성심이 있을까 확실히 알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습니다. 당연히 뽈스카 소수민족뿐만 아니라 핀란드. 도이췰란트 소수민족 등에 대해서도 모두 다 비슷한 태도였습니다.

전: 당시 고려사람들의 경우는 출신국인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지배를 받고 있었는데 어째서 소련 정부가 고려사람들을 불신했는지 이해가 안됩니다. 고려사람들이 일제를 반대하고 싫어하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시에 소련 당국자들은 고려사람들이 소련과 일본이 싸우기 시작한다면, 누구를 지지할 지에 대해서 의심이 많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 진짜 미친 소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 스딸린뿐만 아니라 많은 소련 고급 간부들은 일본제국의 식민지 출신으로서 일본과 관계가 많은 조선사람들이 국경근처에 살면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에 연해주를 비롯한 소련 원동에서 약 17만명 정도의 고려사람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1937년 여름에 스딸린을 비롯한 소련지도부는 그들을 모두 다 갑자기 강제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기로 결정했습니다.

전: 강제이주는 어떻게 진행되었나요?

란코프: 제일 먼저, 강제이주에 대한 결정은 1937년 7월에 결정된 것이지만, 9월 말부터 집행되기 시작했습니다. 기본 이유는 농사를 잘 했던 고려사람들이 곡물을 수확하고, 식량을 국가에 바친 다음에 그들을 이동시킬 생각이었기 때입니다. 기본 목표는 1938년 초까지 일본이나 중국과 가까운 지역에서 조선인 교포가 한 명도 없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강제이주 대상자는 17만명이었습니다.

전: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고려사람이지만 러시아인을 배우자로 둔 사람들과 그들의 자녀들도 마찬가지로 강제이주 대상이었나요?

란코프: 그렇습니다. 기본적으로 세대주, 즉 남편의 민족에 따라 결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1930년대 말까지 고려사람들은 다른 민족 사람들과 결혼을 거의 안 했습니다. 이민족과의 결혼이 대폭 많아지기 시작한 때는 그들이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다음입니다.

전: 그 많은 고려사람들을 그 먼 중앙아시아쪽으로 강제 이주시키는데 트럭으로 수송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은데요, 기차를 이용했겠지요?

란코프: 당연히 기차를 타고 갔습니다. 당시에 출발한 기차는 150편입니다. 목적지는 전부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이나 우즈베키스탄입니다. 그들은 1937년 12월에서 다음해 1월 사이에 도착했습니다. 당연히 중앙아시아에서 주택은 제대로 준비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전염병, 독감, 페렴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너무 많았습니다. 기근은 없었는데, 식량부족은 심했습니다. 그러나 제일 심한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당연히 노인과 어린이들입니다. 당시에 만 3살이 되지 않은 어린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 죽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살인적인 강제이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전: 당시에 소련에서는 고려인 출신 지식인들과 공산당 간부들이 많았다고 하셨는데요. 그 사람들이 강제 이주된 뒤에 어떻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1937년은 소련역사에서 가장 끔찍한 숙청과 테러 시대입니다. 1930년대 말 정치범으로 처형된 사람들은 70만 명 정도입니다. 당시에 간부나 군관, 교수나 기자이면 누구든지 매우 위험했습니다. 하지만 고려사람 출신이면 보다 더 위험했습니다. 당시에 고려사람 출신 공산당 간부나 군관 중 4분의3 정도가 처형되거나 옥사했습니다.

전: 그 말씀을 들으니 고려사람 허가이가 생각납니다. 소련공산당 중급 간부였고 한반도가 일제식민통치에서 해방 된 뒤에 소련군 민정부 요원으로 북한에 들어가 조선노동당 부 위원장과 부총리까지 지냈던 소련파 거물 아닙니까?

란코프: 허가이의 경우는 재미있는 사례입니다. 북한당국이 지금 인정하기도 싫어하지만, 허가이는 1940년대 말 당시에 북조선을 만든 2-3명 가운데 1명입니다. 허가이는 바로 강제이주 직전에 소련 당국에 의해 숙청될 예정이었습니다. 허가이 위에 있었던 사람들은 모두 다 체포되거나 처형되었습니다. 하지만 강제이주는 허가이를 구조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강제이동 때문에 허가이는 체포되지도, 처형되지도 않고 멀고먼 중앙아시아로 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허가이는 몇 년 동안 하급 사무원으로 아주 조용하게 살았습니다.

전: 강제 이주 후 고려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다음 시간이 고대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