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체제하의 망명자들(3)

워싱턴-전수일 chuns@rfa.org
2019-05-07
이메일
댓글
Share
인쇄
1967년 망명한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리우나’가 소련을 탈출해 미국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1967년 망명한 스탈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리우나’가 소련을 탈출해 미국의 케네디 공항에 도착하고 있다.
AP PHOTO

OPENING: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보는 ‘공산주의 역사이야기’ 진행에 전수일입니다.

전수일: 지난 시간에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 소련에서 탈출한 망명자들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유명한 사람들의 사례를 들어 주셨는데요, 1940년대 초에는 망명자 중에 잘 알려진 인물이 별로 없다가 1945년 이후, 그러니까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생겨났다고 하셨습니다.

란코프: 네 그렇습니다. 1944-45년 이후에 유명한 망명자들이 다시 생겼습니다. 40년대 중반에 미국 등 서방국가에서 활동했던 소련공작원, 즉 보위원들 몇 명이 망명했습니다. 그들 중에 아마 제일 유명한 사람은 소련군대 정찰국 중급간부인 ‘구젠코’입니다. 구젠코는 당시에 캐나다뿐만 아니라 미국에서 비밀 첩보활동을 하는 소련 공작원뿐만 아니라 그들과 협력한 미국 공무원, 학자 등의 명단을 미국과 같은 망명국 당국에 알려 주었습니다. 이것은 소련 특무기관에 큰 타격이 되었습니다. 같은 무렵에 4-5명 정도의 소련 고급공작원들이 망명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자신이 알았던 국가비밀을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에 알려 주었습니다. 30년대 말 소련 공작원이나 외교관들은 소련 외무성이나 특무기관과 관계를 차단했다고 해도, 외국정부에 국가비밀을 알려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여전히 혁명가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은 스딸린이 혁명의 배신자이자 수정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40년대 중반 이후 망명한 특무기관 사람들은 다른 태도를 보였습니다.

전: 소련 공작원들의 태도가 그렇게 바뀌게 된 배경이 궁금합니다.

란코프: 소련의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1930년대 말 도망친 공작원과 외교관들은 혁명 1세대입니다. 그들은 공산주의와 세계혁명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대숙청 당시에 거의 다 죽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1930년대 말 소련숙청은 혁명가들의 개싸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서로 미친듯이 죽이고 죽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대체한 사람들은 공산주의 혁명을 별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애국심이 있었는데, 소련으로 알려진 러시아 국가를 보호할 마음이 있었지만, 40년대 말 들어와 스딸린 체제에 대해 의심이 많이 생겼습니다. 특히 해외에 있었을 때 그들은 서방국가들의 민주주의에 대해 희망이 많이 생겼습니다. 그 사람들은 미국과 협력하는 것을 배신행위라기보다는 러시아를 구조하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혁명1세대만큼 혁명 원칙을 굳게 믿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전: 그럼 그들은 자신들이 망명한 서방 국가로부터 보상을 많이 받았나요?

란코프: 보상이 있어도 많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보호를 잘 받는 것입니다. 보호를 잘 받았습니다. 흥미롭게도 1940년대나 50년대 도망친 소련 공작원이나 외교관 대부분은 자신이 죽을 때까지 어디에 사는지, 무엇을 하는지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1990년대나 2000년대 초 늙은 나이로 죽었을 때에야 그들의 진짜 이름이 나오는 무덤이 생겼습니다. 그들은 40-50년동안 가짜 이름으로 숨어살았고, 많은 경우에 남아프리카와 같은 멀고먼 나라에 망명가서 살았습니다.

전: 미국이나 영국 등의 서방국가가 아니고 왜 아프리카 남쪽 나라였을 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한가지 예를 들어보죠. 1950년대 반소련 무장투쟁을 지도했던 사람들을 암살하기 위해서 파견된 공작원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공했지만 귀국하지 않고, 독일경찰을 찾아서 자수했습니다. 결국은 2000년대 초까지 가짜 이름으로 남아프리카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1950년대 말 들어와 외교관이나 공작원들보다 배우나 체육인들이 더 많이 망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전: 배우나 체육인들은 소련에서 좋은 대우를 받지 않았나요?

란코프: 그들은 좋은 대우를 받았지만, 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은 잘 사는 서방 나라들에서 배우나 체육인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예술인들이 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유입니다. 그들은 경제적 측면에서 살기가 좀 어렵다고 해도 자유롭게 사는 삶을 더 선호했던 것입니다. 읽고 싶은 책을 읽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면서,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하고자 하는 삶을 보다 더 희망했습니다.

전: 대표적인 망명 예술인과 체육인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란코프: 당시에 60-70년대 서방으로 도망간 소련음악가, 무용가, 체육인, 작가들의 명단이 너무 깁니다. 그들의 명단을 읽는다면, 우리 방송 시간 내내 읽어도 다 읽을 수 없습니다. 아마 당시에 소련에서 제일 유명한 무용가, 영화감독, 예술가들 가운데 10분의 1 정도가 고국을 등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에 소련을 떠난 사람들은 조금 알려진 사람들이 아니라 매우 유명한 인물들입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공훈배우 정도가 아니라 매우 유명한 공훈배우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당시에 소련에서 제일 유명한 발레 무용가였던 ‘바르쉬니코프’가 있습니다. 서양장기 체스 에서 세계적 선수였던 ‘코르취노이’도 있습니다. 스케이트선수로 유명한 ‘벨로우소바’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이들 모두가 소련에서 도망쳤습니다. 진짜 많았습니다. 이것은 북한식으로 말하면 정성옥 육상선수가 남조선으로 넘어간 것과 비슷합니다.

전: 이런 유명인사들의 망명에 대해 소련 당국은 어떤 대책을 폈나요?

란코프: 그들은 예술가들이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했지만, 아주 큰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70년대 들어와 도망친 예술가들의 가족이나 친족, 친구들에게 별 일이 생기지 않았고, 그들과 편지교류까지 가능했습니다.

전: 그렇군요. 외교관들이나 공작원들의 망명 사례도 적지 않았을 텐데요.

란코프: 당연히 있습니다. 70-80년대에도 외교관들이나 특무기관 공작원들의 망명사건이 종종 생겼습니다. 제일 중요한 사례는 1968년에 스딸린의 딸 ‘스베틀라나 알리우나’는 인도에 있었을 때 미국대사관을 방문해서 망명신청을 했습니다. 얼마전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그는 그때부터 소련을 방문한 적이 없지는 않지만, 죽을 때까지 주로 해외에서 살았습니다. 그나마 스딸린의 딸이니까, 소련방문까지 가능했습니다. 중급 외교관, 공작원들도 많이 도망쳤습니다. 특히 1980년대 말 들어와 소련국가가 흔들리기 시작했을 때에는 망명자 숫자가 더 많아졌습니다.

전: 당시 망명한 구소련 인사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지금 러시아 정부는 이들을 어떻게 생각하는 지 궁금합니다.

란코프: 물론 오래된 일이니까, 상당수는 이미 죽었습니다. 예술가나 음악가와 같은 사람들은 지금 망명하지 않은 사람들과 별 차이가 없고, 러시아에서 인정을 많이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외교관이나 특무기관 공작원들은 상황이 조금 다릅니다. 지금도 러시아에서 대다수는 그들이 나라의 배신자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부 사람들은 다른 평가를 하기도 하지만, 그들은 숫자가 매우 작습니다.

전: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국민대학교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오늘 순서 여기서 마칩니다.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원본 사이트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