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권 세력의 민족주의 정신 (2)

워싱턴-한덕인 hand@rfa.org
2020.05.19
mao_Khrushchyov-620.jpg 1958년 모택동 중국 주석과 후르쇼프 소련 총비서.
Photo courtesy of Wikipedia

앵커: 공산주의 역사 이야기, 기대와 좌절. '공산주의'의 사전적 의미는 '사유재산제도를 부정하고 공유재산제도를 실현해 빈부의 격차를 없애는 사상'을 말합니다.

특히 오늘날 공산주의는 하나의 정치세력으로서 활동하는 현대 공산주의, 즉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리키고 있는데요. 공산주의의 종주국인 소련이 무너지고, 동유럽의 공산국가들마저 몰락하면서 현재 남아있는 공산국가들의 현실과 미래도 암울합니다.

매주 이 시간에는 러시아 출신 안드레이 란코프 (Andrei Lankov) 국민대 교수와 함께 공산주의 역사를 되돌아보고 그 미래도 조명해봅니다. 진행에 한덕인 기자입니다.

기자: 교수님, 지난번엔 소련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고, 원래는 심하게 비난하던 민족주의와 애국주의를 열심히 다루기 시작했던 점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농민출신 모택동이 권력을 잡은 중국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란코프 교수: 이것은 아주 재미있는 질문입니다. 왜냐하면 러시아 공산주의운동은 원래 서방 공산주의운동에 속했고, 처음부터 애국주의도 민족주의도 매우 반동적인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100-150년 전에 러시아이든 영국이든 독일이든 공산당에 입당한 사람이라면 자신의 나라의 해방이나 위대성과 같은 단어를 열심히 싫어했습니다. 그의 기본목적은 세계 노동자의 해방입니다. 영국노동자나 독일노동자의 해방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이 세계해방이라고 생각했고, 자기 나라는 바로 인류해방으로 가는 아름다운 길을 가로막는 반동세력으로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중국과 식민지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 국가들에서 상황이 사뭇 달랐습니다.

기자: 어떻게 달랐을까요?

란코프 교수: 우리 청취자 여러분이 잘 아시는 바와 같이 1990년대초 김일성은 본인이 공산주의자인 동시에 민족주의자라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정확한 자기 평가입니다. 김일성, 모택동, 등소평, 베트남의 호지명 등 동아시아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다 공산주의자겸 민족주의자였습니다. 그들은 1920-30년대 공산주의사상에 관심이 생겼을 때, 인류 해방을 위한 사상보다는 그들 국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으로 생각했습니다.

기자: 하지만 당시에 식민지 조선이나 중국에서 민족주의자들이 있었는데, 그들도 민족해방과 국가의 위기를 극복할 생각이 있지 않았나요?

란코프 교수: 물론 그렇습니다. 하지만 모택동과 김일성과 같은 공산주의자들은 소련식 국가사회주의가 바로 이 목적으로 빨리 갈 수 있는 지름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원래 공산주의는 제국주의와 아무 상관이 없을 줄 알았습니다. 그래도 그들에게 기본목적은 아무것보다 자기 나라를 강성대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세계혁명을 무시하지 않았지만, 보다 덜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경향은 처음부터 분명히 있었습니다. 특히 다른 아시아 나라들보다 규모와 힘이 큰 중국공산당은 그랬습니다.

기자: 그런데 교수님, 원래 애국주의를 많이 공격했던 소련공산당도 1930년대 들어와 태도를 바꾸었지 않습니까? 그들은 소련사람들이 애국주의를 가져야 하며 또 외국사람들도 소련공산당을 세계혁명의 선봉자로 보고 열심히 지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요. 동아시아 공산주의자들에게 소련공산당은 어떻게 보였을까요?

란코프 교수: 물론 1950년대까지 중국이든 베트남이든 북조선이든 관영언론은 열심히 소련을 찬양했습니다. 하지만 모택동을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자들은 사실상 처음부터 소련에 대해 착각이 없었습니다. 한편으로 그들은 소련에서 지원을 받기 위해서 찬양하기도 하고, 소련에 공개적으로 도전할 수조차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제국주의를 비난하는 소련이 1917년 이전에 제정 러시아가 누렸던 특권을 포기할 생각조차 없다는 것을 잘 보았습니다. 소련은 남만주철도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고, 외몽골지역에서 친소련 공산당 정권을 설치했습니다. 1940년대말 소련은 만주를 자신의 영향권으로 만들 생각도 있었고, 특히 옛날에 제정러시아가 가지고 있던 랴오닝성의 해군 기지를 다시 내놓으라는 요구도 했습니다. 소련의 지원을 필요로 했던 모택동은 소련의 요구 일부를 수용했습니다. 당연히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소련에 대해 불만이 많았습니다.

기자: 당시는 스탈린 시대인데요. 모택동과 주은래(저우언라이)는 스탈린 대원수와 소련공산당을 열심히 찬양하지 않았습니까?

란코프 교수: 물론 그랬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냥 말뿐입니다. 당시에 소련 자료 대부분, 그리고 중국 자료 일부가 공개되어있는데, 이것을 보면 원래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고 그를 공산주의위업의 지도자보다는 그냥 러시아 국가이익을 추진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자:: 스탈린은 모택동의 이러한 속마음을 알았을까요?

란코프 교수: 당연히 알았습니다. 스탈린은 미국 대표단 앞에서 모택동과 중국공산당 지도부가 사이비 공산주의자라고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중국인들이 마가린 공산주의자라고 했습니다. 마가린은 가짜 버터입니다.

기자: 소련과 중국 사이에는 1950년대말 본격적인 충돌이 시작됐는데요.

란코프 교수: 우리가 중소 분쟁 이야기를 얼마전에 다룬 적이 있는데요. 다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양측이 사상을 운운했지만 기본 대립은 국가이익이었습니다.

기자: 소련과 중국 모두 사실상 처음부터 상대방을 믿지 않았는데요. 그런데 왜 양측은 1950년대말까지 충돌을 피할 수 있었나요?

란코프 교수: 양측은 서로를 아직 필요로 했습니다. 다른 편으로 보면 모택동의 개인 태도도 이유입니다. 그는 스탈린을 제국주의자라고 생각했지만 어느정도 존경했습니다. 하지만 후임자 흐루쇼프를 많이 무시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1950년대 중국의 경제와 사회발전 속도가 괜찮아서, 모택동은 중국이 소련에 도전할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착각이었습니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모택동은 소련을 공격할 때 소련이 잘못된 사상 때문에 잘못된 정책을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로 수정주의입니다. 흥미롭게도 소련도 비슷한 태도입니다. 소련은 중국의 사상이 공산주의이론을 왜곡한 모택동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하고, 패권주의 즉 중국 중심 제국주의라고 비난하기도 했습니다. 양측은 국가이익 때문에 싸웠지만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는 대신에, 사상을 공격 도구로 이용했습니다. 이것은 맑스주의의 영향인데, 어느정도 역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산주의국가들은 1920-30년대 국제주의 원칙을 조용히 포기했고, 자신의 국가 이익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지만 이 사실을 끝까지 인정할 수 없었습니다.

기자: 어쨌건 중국도 소련도 겉으로는 계속 자기 나라가 전세계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싸운다고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을 믿는 사람들이 있었을까요?

란코프 교수: 흥미롭게도 사람들은 어느정도 행동보다 말을 믿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 때문에 이들 나라의 주장을 믿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특히 1950년대 말 들어와 소련공산당에 실망한 서방 좌파들은 중국에 대해 희망과 착각이 놀라울만큼 많았습니다. 그들은 중국공산당이 전세계 노동자의 해방을 위해 열심히 투쟁하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물론 여전히 소련이 이러한 투쟁을 하고 있고, 중국을 수정주의나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외국 사람 대부분은 1970년대 들어와 소련과 중국의 대립이 사상보다 그냥 국가이익 대립이라는 점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기자: 네 란코프 교수님, 오늘 말씀 감사드립니다.

러시아 출신의 안드레이 란코프 한국 국민대 교수와 함께 알아본 공산주의 역사, 오늘 순서 여기까지입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한덕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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