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영웅적 패배와 월미도의 영웅들

주성하∙ 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0.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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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paganda_gallery-305.jpg 지난 1월 13일 북한 평양 국제문화회관에서 신년 공동사설 관철을 위한 선전화 전람회가 열리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지난번에 월드컵 응원에 대한 이야기를 했었지요. 북조선팀이 16일 브라질에 아쉽게 2대1로 패하긴 했지만 정말 잘 싸웠습니다. 솔직히 브라질과 해서 이길 나라가 몇이나 되겠습니까. 브라질과 축구해서 패했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오히려 세계축구연맹 국제순위가 105위에 불과한 북조선이 1위인 브라질에 전반전에 꼴을 하나도 내주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브라질을 상대로 꼴까지 넣었다는 사실에 세계가 놀랐습니다. 솔직히 세상 사람들은 북조선이 네댓 꼴 먹고 져도 전혀 놀랍지 않은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여기 남쪽 사람들도 북조선이 참 잘했다고 뿌듯해하고 있습니다.

패배도 어떤 패배인가에 따라 위대한 패배가 될 수도 있고, 승리도 어떤 승리인가에 따라 추악한 승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보면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들이 10만 명이 넘는 페르시아 병사들과 맞서 싸우다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그런 식의 이야기들이 추앙받는 영웅적 패배의 사례가 될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이런 식의 장렬한 패배는 역사에 길이 남아 신화로 전해지면서 후세들에게 애국심과 용기를 심어주죠.

이렇다보니 선전선동이 강한 나라는 형편없는 참패를 용감한 패배로 둔갑시켜 활용해먹으려는 유혹을 받을 수밖에 없는데, 실제로 북에는 이런 사례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지금도 그런 허위 사례들을 진실처럼 배우고 있습니다.

다음 주면 6.25전쟁 발발 60주년입니다. 북에선 6.25 전쟁을 북침으로 배웠지만 사실은 남침이었습니다. 이렇게 이야기해봐야 많은 분들은 “설마 그렇겠나”고 하거나 “그거 어떻게 알아”하면서 잘 믿지 않으실 겁니다. 그래서 더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만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언젠가는 여러분들도 직접 눈으로 보고 깨닫는 날이 올 것이라고 믿습니다.

오늘은 위대한 패배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 김에 6.25전쟁에서 북조선이 가장 위대한 패배로 선전하고 있는 월미도 전투에 대해 잠깐 이야기해볼까 합니다.

월미도 전투를 이대운 해안포병 중대가 5만 대군의 상륙을 3일 동안 막은 전투였다고 배우셨죠. 북에선 1983년에 영화 월미도를 만들고 “월미도 영웅 전사들을 따라 배우자” “월미도 영옥이를 따라 배우자” 하는 식의 구호들을 잔뜩 만들고 이들을 따라 배우는 모임도 정말 많이 진행했습니다.

덕분에 제 머리에도 월미도 영웅 전사들의 표상이 깊이깊이 박혔습니다. 전화선을 몸으로 잇고 죽는 영옥이, 적함에 기뢰를 밀고 가 자폭하는 윤석이, 두 눈을 잃고도 포탄을 장전하는 민국 아바이, 개활지에서 2인 1조로 포를 쏘는 결사대원들, 포탄이 떨어지자 수류탄을 들고 육탄 공격에 나선 용사들.

영화는 물론 책에서도 이들이 적함 14척을 격침 격파하고 수천 명의 적을 죽였다고 나옵니다. 그런데 이건 참으로 황당무계한 거짓말이었습니다. 물론 사기를 올리기 위해 그냥 전사한 것도 영웅적으로 전사했다고 과장을 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렇게 터무니없이 지어내진 않습니다.

저는 월미도를 몇 번 가봤는데, 처음에 갔을 때는 여기가 그렇게 영웅적인 전투가 벌어진 곳인가 하고 숙연한 마음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너무나 허황된 사실을 진실로 믿도록 교육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월미도에 인민군 포병 중대와 보병 중대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고 상륙병력이 5만 명이 넘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월미도 해안포 중대가 적의 상륙을 3일간 저지시킨 것이 아니라, 원래 상륙이 15일로 계획돼 있었습니다. 상륙작전은 개시 수십 분 만에 끝났고 인민군대는 120명이 죽고 190명이 생포됐습니다.

월미도 포병중대는 포탄 몇 발도 쏴보지 못했고, 적을 딱 1명 죽이고 완전 괴멸됐습니다. 이 정도면 꼼짝 못하고 앉아서 일방적인 참패를 당한 것인데 애초에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니 당연한 결과죠.

여기 와보니 월미도에 상륙하면서 찍은 기록영화 필름이나 사진들이 다 있더군요. 내 머리 속에 영웅으로 자리 잡고 있던 월미도 용사들이 포로로 잡혀서 옷을 홀딱 벗긴 채 공포에 잔뜩 질린 얼굴로 줄맞춰 앉아있는 사진을 보니 지난 기간 월미도를 ‘영웅의 섬’이라고 생각하고 살아온 제 자신이 한심스럽게 느껴지더군요.

지금 월미도는 섬이 아니고 육지인데 이곳엔 유원지가 건설돼 많은 사람들이 60년 전의 참혹한 전쟁을 다 잊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다시 월드컵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번 월드컵에서 어떤 성과를 내는가에 따라 북조선팀 축구선수들이 영웅이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저는 성과에 상관없이 저 축구선수들은 대접해주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지윤남 선수가 세계 최강의 방어수와 문지기로 꼽히는 브라질 선수들을 헤집고 꼴을 넣는 순간 저는 저도 모르게 일어나 환호했습니다. 조작돼서 국내용 선전에만 이용되는 월미도 영웅들에 비해 볼 때 저들은 전 세계 앞에서 자신의 역할을 얼마나 잘 해냈습니까. 비록 패배를 했어도 전 세계가 찬사를 보내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남북 모두를 감동시키고 사기를 북돋아준 북조선 축구 선수들, 앞으로도 계속 영웅적 투혼을 발휘해 월드컵 역사에 남을 업적을 세워주길 바랍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 기자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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