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전통과 혈통이 말살돼버린 북한

주성하∙ 탈북자, 동아일보 기자
2012-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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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l_nk_play-305.jpg 설연휴기간에 평양시내에서 아이들이 민속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 남쪽은 토요일부터 음력설 연휴에 들어갑니다. 음력설을 맞을 때마다 같은 민족인데 설을 쇠는 것이 왜 이리도 다를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여기 남쪽은 1월 1일보다는 음력설을 더 중시합니다. 그리고 음력설 연휴가 되면 모두 기차나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고향에 갑니다.

이런 점에선 중국과 비슷합니다. 중국 역시 음력설은 최소한 일주일씩 놀고 이 기간에는 고향을 떠나 있던 사람들이 모두 고향에 갑니다. 중국이 인구가 많다보니 음력설 기간에 기차로 이동하는 연인원이 무려 32억 명이나 된답니다. 중국의 공식 인구가 13억5000만 명 정도, 비공식적으로는 16억 명도 된다니 그렇게 되겠죠. 또 중국은 땅이 넓으니 며칠 씩 걸려 집에 가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에 비해 한국은 서울에서 기차를 타면 저기 부산까지도 불과 2시간20분밖에 걸리지 않습니다. 기차표를 구하지 못하면 식구가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가는데, 모두 차를 몰고 나서다보니 평소라면 열심히 4시간 운전하면 갈 서울 부산 구간이 음력설 전후 제일 막히는 날에는 7~8시간 정도 걸립니다.

다 고향 가니 인구가 1050만 명의 서울 거리는 음력설 때엔 한산합니다. 평소 승용차로 꽉 차있던 도로들이 차가 많지 않은 평양시내 처럼 변합니다.

북에선 한 번도 그런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여기 와서 음력설을 보니까 사람의 뿌리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서울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도 조상의 묘가 있는 선산은 대개 지방에 있으니 음력설이나 추석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아 고향에 내려갑니다.

한국에 처음 와서 호적등본이란 서류를 만드는데 여기에 본적 본관 이런 것을 다 기입해야 합니다. 호적등본이란 북한 보안서 주민등록과에 가면 있는 그런 개인자료인데, 북에선 자기 자료를 본인도 볼 수 없고 단지 용도가 간부승진 이런 것 할 때 성분 등을 뒷조사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하지만 남쪽에선 자기 서류 자기가 얼마든지 다 떼볼 수 있고 용도도 승진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상속받고, 의료보험 받고 이사하고 이럴 때 씁니다.

호적등본에는 본적, 본관 이런 것이 기록돼 있는데, 탈북자들은 그걸 아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본적이라는 게 일반적으로 조상의 묘나 본가가 있는 고향을 의미하고 본관은 자기 성씨가 어디 성씨냐를 표기하는 것입니다.

언젠가 탈북자들이 한국에 입국한 뒤 조사하는 기관에서 나온 자료를 봤는데, 기억에 탈북자들의 절반 이상이 자기 이름 한자로 쓸 줄 모르고 본관을 모르는 사람은 그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합니다.

아마 이 방송 듣는 분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북에선 본관 같은 것을 따지면 봉건잔재라고 타도하겠다고 하니 이제는 새 세대들은 자기가 어느 뿌리인지 모릅니다.

실례로 우리나라에 가장 많은 성씨인 김씨만 봐도, 북에선 김 씨면 “오, 우리 같은 성씨네”하고 통성명하는데, 이 김 씨도 족보 따지면 본관이 무려 28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경주 김씨, 전주 김씨, 강릉 김씨, 평양 김씨 이런 식으로 본관만 280개가 넘고, 거기에 또 새끼치기까지 하는데, 경주 김씨는 또 태사공파니 은열공파니 하는 4~5개 파로 또 나누어집니다.

여기도 현대사회가 되면서 씨족의 의미가 쇠퇴하기는 하지만 최소한 자기 본관 정도는 누구나 압니다. 그런데 북한은 같은 성씨끼리 친척이라고 서로 봐주면 독재가 잘 먹혀들지 않기 때문에 김일성민족 운운하면서 족보 몽땅 불태워버렸죠.

1960년대 족보 찾아내 없애는 광풍이 불 때 어떤 할아버지들은 집안 깊이 족보를 숨겨두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 할아버지들도 다 세상을 떠난 1990년대 중반쯤 북한에 골동품 팔아먹는 바람이 불 때 족보도 돈이 된다고 다 팔아먹었습니다. 이제 북한에선 족보책을 구경하고 죽자고 해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아예 씨가 말라버렸죠.

물론 현대사회에서 아직도 수십 권이나 되는 족보책을 뒤지면서 너는 어느 족보고 어느 항렬이니 하고 따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만 전통을 완전히 팽개쳐 버리고 자기 뿌리를 전혀 모르고 사는 것은 더 말도 안 되는 일이죠. 나중에 통일돼서 남쪽에서 친척을 찾자고 해도 자기 본관도 모르는데 어떻게 찾겠습니까. 뿌리를 모르면 혈연관계조차 잊혀지는 것입니다.

요새 평양 대성산 아래에 무슨 민속공원이라는 거 엄청 크게 조성하고 있고, 김정은도 새해 밝자마자 거기부터 현지 시찰했다고 하는데, 아니 혈통도 잘라버리면서 무슨 민속을 운운한답니까. 자기는 무슨 백두산 혈통이니, 혁명가문이니 하면서 김정은의 증조부, 고조부 넘어 현조부인 김응우까지 족벌과 혁명업적이라는 것을 전 국민이 의무적으로 외우게 하면서 정작 인민들은 자기 친척조차 못 찾게 만들고, 이게 뭐하는 짓입니까.

남쪽은 음력설, 추석 이런 명절을 보내면서 1년에도 최소한 2번은 친척들과 모여 앉아 친목을 나눕니다. 그런데 북한은 다른 지방에 가려고 하면 통행증을 허가받아야지, 가는 데만 며칠 씩 걸리니 휴가를 길게 내야지, 여비도 엄청 들지 하니 도저히 다닐 수가 없습니다.

강계에 저의 삼촌이 살았는데, 제가 애기 때 삼촌이 한번 우리 집에 왔다갔다는 말을 들었을 뿐 제가 탈북할 때까지 삼촌이나 작은어머니 얼굴은 옛날 사진 몇 장이 고작이었습니다. 강계 들었차가 가는 도소재지인 것도 그러니 다른 농촌은 더 말할 것도 없죠. 그게 어디 저만의 사정입니까. 그런 집이 부지기수죠.

하루빨리 북한도 고속열차, 고속도로가 쭉쭉 뚫리고 명절마다 친척이 서로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정상적인 사회가 되길 바라며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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