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성하의 서울살이] 북으로 간 미군들의 운명
2023.07.21
사랑하는 북녘동포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18일에 판문점에서 희한한 사건이 하나 벌어졌습니다. 트레비스 킹이라는 이름의 23세 흑인 미군 이등병이 판문점을 견학하는 대열에 있다가 갑자기 북한으로 넘어갔습니다.
북한 사정을 여기 사람들이 잘 알고 있는데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선택을 왜 했을까요. 월북 동기를 추정해 보면 킹은 지난해 10월 서울에서 싸움을 벌이다가 출동한 한국 경찰차를 발로 걷어차 파손시켰습니다. 그 사건으로 올해 법원에서 벌금 500만 원, 즉 약 4000달러 정도 벌금을 선고받았는데, 돈을 내지 않아 외국인 수용시설인 천안교도소에서 48일간 강제노동을 했습니다.
미군은 또 미군대로 명예를 훼손시킨 그를 본국으로 송환해 추가 처벌을 하려 했는데 출국 절차를 밟던 중 인천공항에서 사라졌습니다. 결국 킹은 판문점으로 가서 월북이라는 최악의 선택을 했습니다. 4000달러 정도 벌금이 나온 것이 큰 범죄도 아니고, 미국에 가도 이 정도로 감옥에 가지도 않는데 말입니다. 북한으로 가면 행복할까요? 아마 여기 교도소에서 강제 노동했던 때가 가장 행복한 순간으로 기억될 정도로 고초를 겪지 않을까 싶습니다.
과거에도 북한으로 도망간 미군들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도 이들을 잘 알고 있으니 오늘 그들이 북한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한번 말씀드릴까 합니다.
킹 이전에 마지막으로 북한으로 간 주한미군은 1982년 조셉 화이트 일병이라고 있었는데 북에 간지 3년 만에 청천강에서 수영을 하다 익사했다고 가족에게 전해졌습니다. 주한미군 출신을 청천강에서 수영하게 했겠습니까. 아마 때려죽이든 어쨌든 하고는 수영하다가 죽었다고 했겠죠.
그 이전인 1960년대 초에는 미군이 비무장지대에서 경계를 섰는데, 여러 이유로 4명이 북에 갔습니다.
1962년 5월 미군으로선 최초로 북에 간 래리 앱셔 일병은 대마초를 상습적으로 피운 게 적발된 데다 총기까지 분실하자 처벌을 우려해 북한으로 갔습니다. 두 번째로 건너간 제임스 드레스녹 일병은 무단 외출했다가 중대장에게 꾸중을 받자 홧김에 넘어갔고, 제리 페리시 병장은 개인적인 일로 고민하다가 북에 갔습니다. 마지막에 건너간 찰스 젠킨스 하사는 월남전에 차출돼 가서 죽을까봐 도망갔죠. 맥주 열 캔이나 마시고 비틀거리며 넘어갔는데, 넘어갈 때는 북에 가서 소련대사관에 들어가면 포로로 인정해주어 미국으로 보내줄 것이라고 타산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넘어 간지 하루 만에 후회하게 되죠.
이들은 1979년부터 상영된 20부작 예술영화 ‘이름없는 영웅’들에서 배우로 나옵니다. 저도 북에 있을 때 ‘이름없는 영웅’들에 외국 배우들이 많이 나와서 의아했는데, 이들이 북한으로 도망친 미군 출신들이었습니다.
미8군 소속 방첩장교로 나오는 ‘칼 스미스’가 월남전에 갈까봐 맥주 10캔 마시고 넘어간 찰스 젠킨스이고, 영국 첩보원 ‘루이스’가 래리 앱셔, 인민군 포로들을 괴롭히는 포로수용소장 ‘아서 콕스터드 중령’역이 외출증 위조가 드러나 도망간 드레즈녹입니다.
이들 중 해외로 다시 나온 것은 칼 스미스 역의 찰스 젠킨스 뿐이고 나머지는 다 북한에서 죽었습니다.
이들이 이름없는 영웅들에 배우로 나올 때까지 15년 가까이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을까요.
찰스 젠킨스의 말에 따르면 1972년까지 10년 동안 이들은 단칸방에서 단체 생활을 했는데, 하루에 10시간씩 김일성의 교시를 강제로 학습해야 했고 정기적으로 구타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는 “북한에 들어간 지 하루 만에 내가 엄청난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고 회상하면서 “평양 집에는 난방시설이나 전기가 없어 겨울에는 있는 옷을 다 껴입고 잠을 자야만 했다. 뜨거운 물로 목욕하는 것은 아주 드문 사치였다”고 했습니다.
배급제도가 붕괴돼 집 뜰에서 채소를 재배하고 닭을 길렀지만 허기진 채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했습니다. 인민만 배고픈 것이 아니고 이들도 배가 고팠던 것입니다.
안내인 없이는 집을 나설 수 없었고, 집은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천장에서 도청기가 설치돼 있었다고 합니다.
북한은 이들을 북에 온 지 15년이 지난 이후에 결혼시켰는데, 다 외국에서 납치해 온 여자들이었습니다. 젠킨스는 1978년에 일본에서 납치해 온 소가 히토미라는 21세 여성과 결혼시켰고, 제리 페리시는 레바논에서 납치해 온 시함 시라이테라는 여성과, 콕스터트 중령역을 맡았던 드레즈녹은 루마니아 출신의 도이나 붐베아라는 여성과 결혼했습니다. 드레즈녹의 두 아들은 지금 압록강대학에서 군복을 입고 영어 선생으로 있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젠킨스는 일본 여성과 결혼한 덕분에 다시 북한을 벗어났습니다.
2002년 김정일은 고이즈미 당시 일본 총리와 만나 자기들이 1970~80년대에 일본에서 사람들을 납치해 왔다고 인정했고, 젠킨스의 아내가 된 소가 히토미를 열흘 동안 고향 방문을 하라고 일본에 보내주었습니다. 당연히 히토미는 북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김정일은 일본에 잘 보이려는 미련을 버리지 못해 2년 뒤인 2004년에는 히토미의 남편인 젠킨스도 아내와 만나보라고 인도네시아에 보냈는데 젠킨스도 북한으로 돌아가지 않고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2017년 일본에서 77세에 사망했습니다.
젠킨스는 나중에 “내가 잠시 도피해 있으려고 했던 나라가 실은 거대하고 미친 감옥과 다름없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다. 한번 들어가면 나올 수 없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렇게 생생한 전임자들의 증언도 있는데 트레비스 킹은 왜 북한이라는 지옥으로 갔을까요? 그가 조사가 끝나면 주체사상을 몇 년 외우면서 자신이 버리고 온 자유를 뼈저리게 그리워할 것이란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주성하였습니다.
** 이 칼럼 내용은 저희 자유아시아방송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
에디터 양성원, 웹팀 이경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