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각 평양생각] 강원도 스키장에서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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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북한군 출신 탈북자 모임인 북한인민해방전선 회원들과 함께 강원도 홍천군 팔봉산에 있는 스키장에 다녀왔습니다. 저는 스키장을 간다는 설레는 맘으로 밤잠도 설쳤습니다. 아침 일찍 버스를 타고 북한인민해방전선 사무실로 갔습니다. 제가 제일 먼저 도착하는 줄로 알았는데 벌써 강원도로 출발한 친구들도 있었고 모임 장소에 저보다도 먼저 와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도 있었습니다. 매우 쌀쌀한 날씨였으나 겨울치고는 맑고 좋은 날씨였습니다.

여러 대의 차들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앞을 다투면서 달렸습니다. 도중에 우리는 휴게소에 들러 진한 커피 한 잔으로 피곤을 잠시 풀기도 했고 아름답고 웅장한 겨울의 풍경을 감상하기도 했습니다. 강원도의 높은 산봉우리마다 흰 눈으로 덮여 있어 서울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라 정말 웅장했습니다.

3시간 정도 달려 목적지인 홍천 팔봉산 스키장에 도착했습니다. 주말이라 어른 아이들 할 것 없이 많은 사람들로 붐볐습니다. 차를 세울 주차장도 모자랄 정도였습니다. 우선 점심은 물 회 비빔밥으로 간단하게 먹었습니다. 생각보다 맛있고 시원했습니다. 미리 예약해 놨기에 우리는 쉽게 스키복장을 입고 스키장으로 들어갔습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저는 무조건 스키를 타리라 당당한 결심을 하고 갔지만 정작 스키복을 입은 다른 친구들을 보니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았습니다. 하여 저는 썰매를 타기로 했습니다.

저처럼 마음이 약한 친구가 있어 어느 정도 민망한 마음은 조금 괜찮아졌습니다. 마음이 약한 우리 셋은 썰매를 타기로 했습니다. 썰매를 대여해가지고 썰매장으로 가는 마음은 조금 서운했지만 그래도 즐거웠습니다. 그런데 안내원은 황당하게 썰매를 들고 기분이 들떠 있는 저에게 나이를 물었습니다. 저는 왜 그러냐고 되물었습니다. 만 55세가 지나면 썰매도 탈 수가 없다고 규정이 돼 있다고 했습니다.

워낙 눈치가 빠른 저는 40대 중반이라고 답했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막상 썰매를 끌고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들으며 사람들 속에 끼워 정상으로 올라갔지만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 쌩쌩 달려 내려오는 사람들을 보니 조금은 걱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 보는 순간 당당해졌습니다. 드디어 순서가 됐습니다.

학교 시절 저는 스케이트 선수였습니다. 순간 떨리는 마음으로 경기장에 나섰던 그 때 그 기분이었습니다. 드디어 구령소리와 함께 내달렸습니다. 다른 생각 없이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 날아갔고 마냥 즐겁고 행복하고 짜릿한 순간이었습니다. 제가 제일 앞장서 달렸습니다. 저는 비록 다른 젊은 친구들처럼 스키는 못 탔지만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이 또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시간은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아쉬웠습니다. 어느덧 5시, 우리는 약속된 시간이 되어 썰매를 끌고 모임 장소로 이동하는 도중 웅장한 모습을 보게 됐습니다. 바로 옆의 산봉우리에서 한쪽에서는 기계로 인공 눈을 쏘고 있고 한쪽으로는 큰 불도젤(불도저)이 45도의 높은 산 정상에서부터 길을 닦으며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조금 아찔한 장면이었지만 정말 웅장하고 화려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우리는 다시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약 30분 정도 달려 경기도 양평군 단월면 부안리에 있는 아파트형 관광숙소인 콘도로 왔습니다.

숙소는 손전화기도 터지지 않는 공기가 좋은 아주 깊은 산골이었습니다. 이미 장작불로 방을 덥혀 놓았습니다. 우리는 방에 들어가자마자 남자 분들은 숯불을 피워 이미 준비해 가지고 간 조개구이와 삼겹살 구이, 양념갈비 구이를 시작했고 여자들은 상추와 과일을 씻고 고추와 마늘을 까고 쌀을 씻어 전기밥솥에 넣었습니다.

식사 후 우리는 노래방 기계를 틀었습니다. 노래도 부르고 춤도 추고 정말 즐거운 밤이었습니다. 저는 새벽 3시가 되어서야 친구 영순이와 함께 자리에 누웠습니다. 장작불로 덥힌 온돌방에 누워 높은 천정을 올려다보니 갑자기 고향 생각이 났습니다. 제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적 일입니다.

눈이 펑펑 내리는 추운 겨울 저는 저녁밥을 지어 식을까, 밥은 가마솥에 넣고 반찬은 부뚜막에 가지런히 올려놓고 세 아이들과 이불속에 누워 옛말을 해가며 늦게 퇴근해 오는 남편을 기다리던 그 시절, 때로는 잠이 들어 있는 아이들을 아빠가 왔다고, 저녁밥을 먹자고 흔들어 깨우던 일 그리고 나 자신도 남편이 퇴근해 집에 들어오는 줄도 모르고 깜박 잠이 들어 있던 그 시절이 생각나 저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와 캄캄한 하늘을 한참 올려다보았습니다.

캄캄한 하늘에는 별이 총총 떠있었습니다. 유난히도 반짝거리는 북두칠성을 보며 내 고향에서는 북두칠성이 저쪽에 있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고향에서는 어느 쪽이었는지 가물가물했습니다. 순간 '고향에서의 추억이 다 잊히지나 않을까, 잊히기 전에 고향에 한번쯤은 가봐야 하겠는데.' 하는 생각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비록 달은 없었지만 둥근 달 속에 사랑하는 부모님의 얼굴이 떠 있는 듯한 환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이렇게 홀로 눈물을 흘리며 고향 생각을 하고 있는데 영순이도 잠이 오지 않는다면서 제 옆으로 와 앉았습니다. 영순이도 고향에는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이미 부모님은 고난의 행군시기에 사망됐고 하나밖에 없는 언니는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 왔다가 북한으로 강제 북송돼 사망됐다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저는 친구와 함께 고향에 대한 향수를 느끼면서 추운 줄도 모르고 깊은 산골 콘도의 마당에서 캄캄한 밤을 보냈습니다. 아침 8시가 되어 사람들은 잠에서 깨어 아침을 먹었습니다. 오후가 되어 우리는 각자 타고 온 자가용 승용차를 타고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강원도 홍천 팔봉산 스키장에서 저는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었습니다.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