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모는 작아도 행복한 남한의 김장

김춘애∙ 탈북 방송인
2014-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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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암 현대삼호중공업 사원아파트 기숙사 식당에서 사랑의 김장 나눔 행사를 열고 있다.
전남 영암 현대삼호중공업 사원아파트 기숙사 식당에서 사랑의 김장 나눔 행사를 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요즘 날씨는 갑자기 한파가 찾아오는가 하면 또다시 포근한 날씨로 바뀌는 등 조금 변덕스러운 날씨를 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계절은 계절입니다. 이곳 한국은 지금 한창 김장철입니다. 북한에서는 함북도 같으면 10월 말이면 김장을 하고 평양은 11월 초이면 이미 김장을 마치거든요. 김장은 말 그대로 옛날부터 겨울 양식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요즘 남한의 여성들은 입버릇처럼 김장 30포기 했다하면 ‘아이고 많이 했네’ 라고 보통 얘기들 합니다. 저희 딸들도 시댁과 합쳐 김장을 하다 보니 30포기 했다고 합니다. 지난 주말에 딸은 시어머니와 함께 김장을 했다고 하면서 피곤하다는 얘기를 입버릇처럼 말합니다. 저 역시 올해 김장은 10포기만 했거든요. 북한에서 해마다 했던 김장의 양에 비하면 몇 백분의 1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저 역시 김장 10포기를 했다고 친구들에게 자랑을 늘어놓았답니다.

친구들은 그것도 김장이라고 했느냐 면서 크게 웃어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어쨌든 김장은 김장이거든요. 북한식대로 양념에 멸치 액젓이나 새우젓은 넣지 않고 생동태를 큼직하게 썰어 넣고 배추 속을 넣었으며 무 2개로 깍두기를 했는데, 깍두기 역시 북한식으로 조개젓을 넣고 했습니다. 알맞게 썬 깍두기 한 개를 입에 넣은 손자 녀석은 역시 할머니 냄새가 난다고 해 우리는 웃었습니다.

저는 김치 냉장고 문을 닫으며 잠시 지나간 고향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북에서는 해마다 겨울 김장을 거의 한 톤씩이나 했거든요.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많은 김장을 어떻게 혼자 했었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지만 배추를 다듬는 일만도 이틀이나 걸렸습니다. 배추를 절이는 시간도 보통 3일이 걸려야 했고 배추를 양념에 버무려 독에 넣고 독을 묻는 작업까지 한주일이 걸렸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김장을 하고는 보통 자리에 누워 앓지 않은 주부들이 없습니다. 세 아이를 둔 저로서는 차마 누워 앓을 시간 여유조차 없었습니다. 저는 김장을 마치고는 문수원을 찾아가 진한 땀을 내곤 했었던 기억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처럼 북에서는 김장이 겨울 양식이지만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던 시기에는 김장 배추마저 제대로 공급해 주지 않았습니다. 해마다 한 톤씩 하던 김장감을 확 줄여 300Kg만을 하다 보니 이미 12월이 되면 김장독이 바닥 나 버리곤 했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한해 겨울반찬감 때문에 걱정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추운 겨울에 땔감도 제대로 공급되지 않은데다가 식량 공급도 끊기고 김치마저도 모자라 추위와 배고픔에 떨던 그 시절을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아프고 짠해 옵니다. 이런 예전의 가슴 아픈 기억을 더듬고 있는데 손녀가 뽀르르 달려오더니 “할머니, 김치 냉장고 10년 이상 사용하면 화재사고가 난다고 테레비죤에 나왔거든요?” 하고 할미에게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어느덧 다 자란 손녀 딸애가 너무도 대견해 양념 묻은 손으로 힘껏 껴안아 주었습니다.

며느리는 가족들과 함께 김장을 한번 해 보는 것이 소원이었다고 말합니다. 저는 김장 뒤처리를 며느리에게 맡기고 저녁 준비를 했습니다. 금방 버무린 김치를 옥수수 국수에 버무려 저녁 식탁에 올려놓았습니다. 여기에 술이 빠지면 안 되겠죠? 제가 담근 복분자 와인을 내놓자 아들이 ‘역시 우리 엄마 음식 솜씨는 일러 줘야 한다니까’ 하면서 즐거워하는 모습에 제 마음은 뿌듯하기만 했습니다. 조금 아쉽기는 하지만 아마 저도 인제는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저는 올해 겨울 김장을 하면서 또 한번 간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김장 배추뿐만 아니라 빨간 고추와 그 많은 젓갈을 구입해 고향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올해도 겨울 김장감이 너무도 부족해 마음을 졸였을 내 고향 주민들을 생각 하면 마음이 아픕니다.

저녁 식사 후 저는 며느리와 손녀와 나란히 사우나 찜질방을 찾았습니다. 한증탕에서 진한 땀을 푹 낸 뒤 저는 며느리에게 잔등을 맡겼습니다. 순간 제 마음은 뭔가 울컥 했습니다. 내가 아직 북한에 있다면 지금쯤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행복한 오늘의 제 삶이 얼마나 소중하고 귀중한가를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서울에서 김춘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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