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부자 실체: 김정일 위원장이 권력을 잡기까지 (2)

주간기획, '김부자 실체' 오늘은 지난 시간에 이어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어떻게 권력을 장악하게 됐는지 그 과정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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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함께하던 갑산파 인사들을 제거한 뒤인 70년대에 들어와 자신의 1인 지배 체제가 실질적으로 구축되자 본격적으로 후계문제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김일성은 소련과 중국이 후계자 문제로 진통을 겪는 과정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후계구도를 확실하게 해둘 필요를 느꼈던 것입니다.

당시 김정일은 당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과장으로 있으면서 영화와 소설을 이용해 김일성 우상화 작업을 구축함으로써 이미 아버지로부터 그 공로를 높이 인정받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김정일에게는 강력한 내부의 경쟁자가 있었습니다. 바로 계모인 김성애와 그가 낳은 평일, 영일, 경진 등 이른바 곁가지들이였습니다. 김정일은 70년부터 74년 당 중앙위원회 5기 8차 회의에서 위원으로 선출돼 후계자 기반을 완전히 닦기까지 약 4년 동안 이들과 치열한 권력 투쟁을 벌이게 됩니다.

69년 1월 당 중앙위원회 4기 4차 회의 직후 김정일의 계모 김성애가 중앙여성동맹위원장에 올랐습니다. 이때부터 김성애는 여맹과 함께 위세를 떨치기 시작합니다. 북한 신문과 텔레비전에서는 김일성과 똑같은 크기의 김성애 사진이 실리고 '김일성의 교시'와 '김성애 여사의 말씀'을 구분하지 못하고 똑같이 '교시'로 처리하기도 했습니다.

김성애의 지위가 이렇게 높아진 것은 김일성의 발언 때문이기도 한데요, 김일성은 '김성애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에 김성애의 지시는 나의 지시와 같다'고 말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처음에는 김성애의 말을 잘 듣지 않던 사람들도 김성애의 말이라면 다 '교시"로 받아들이기 된 것입니다.

김성애는 권력을 잡게 되자 김일성의 본처이자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에 대한 숭배 사업도 중지시킵니다. 대신 김일성의 어머니 '강반석 따라 배우기'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김성애는 이 운동을 펼치면서 김일성 가계에 자신이 정통성이 있음을 내세우려 했습니다.

또한 시어머니를 잘 모시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김일성에게도 점수를 따려 했던 것입니다. 김성애가 이처럼 권력을 잡기 위해 애썼던 것은 모두 자신의 첫 아들 김평일을 후계자로 올려보자는 목표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김성애는 나이 어린 평일이 성년이 될 때까지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유지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탈북자 김철혁씨는 김평일은 아버지 김일성을 빼닮았다는 평을 받으며 후계자 감으로 주목받고 있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김철혁: 김평일은 김정일보다 인격도 지도자적인 자질도 대중에 대한 신뢰도도 높았고 인정을 받고 있었습니다. 성품도 좋았고...

김정일도 김성애의 야망을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김정일은 자신이 후계자가 되기 위해서는 김성애의 위세를 꺾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계모에 대해 섣불리 불만을 표출했다가는 아버지의 불만을 살 수도 있어 신중을 기했습니다. 김정일은 김성애의 활동을 비밀리에 뒷조사하는 등 김성애의 활동을 예의주시했습니다. 그런데 1973년 중순 김정일에게 곁가지를 제거할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김정일의 권력 장악 얘기는 다음 시간에도 계속됩니다.

워싱턴-이수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