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의 한국인] 16개 미 정부기관 식당 운영 최정범 씨① ‘좌절없는 삶’
워싱턴-이현기 leeh@rfa.org
2009.10.23
2009.10.23
RFA PHOTO/ 이현기
포스트는 실패를 경험한 최씨가 굳은 신앙과 가족들의 성원 속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었다며 그의 이야기는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상황에서 인간이 더욱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음을 잘 보여주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교포 한인 2세 사업가 최정범 씨가 사업실패를 극복하고 놀라운 재기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 1부 순서입니다.
재미교포로서 한인 2세 최정범 씨는 워싱턴 인근의 16개 정부기관 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이다. 최정범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는 미국에 오기 전 12살 나이로 4형제 중 둘째로 아버지가 사업한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가 암과 투병을 하게 되고 병원에서 더는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깊은 신앙으로 기도원에서 고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잘나가던 사업도 마다하고 더욱 진취적인 삶을 위해 1974년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된다.
1974년 4월 5 아버지가 사업에 어떤 회의를 느끼면서 안정된 곳에서 살고파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됩니다.
최정범 씨의 미국에서의 학창시절을 뒤돌아보자. 그는 뉴욕에 있는 예술고등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음악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음악도로서 큰 희망과 포부를 갖는다.
미국에 맨 처음 와서 영어가 되지 않고 말을 못하니까. 아마 어려서부터 저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게 바이올린이었고 바이올린을 잘 켰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들어가기 어려운 뉴욕에 예술고등학교에 시험에 합격해서 다니게 됐습니다.
그러나 최정범 씨 가정의 이민생활 시작은 어떠했을까? 다른 이민자들이 겪는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국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갖지 않고 한국을 떠나신 것 같습니다. 오셔서 많은 이민자가 하는 조그만 식품가게 부터 시작해서 권총 강도를 당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저희는 아들만 4명인데 짐을 싸서 뉴욕으로 가서 뉴욕에서 얼마 사업기반을 일구시다가 화제로 말미암아 사업체가 다 불에 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1980년에 다시 워싱턴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한인 2세 최정범은 초기 이민 생활에서 혹독한 고통을 맞게 된다. 다니던 학업도 중단하고 가족들을 대표해 가장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를 회고한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 사업이 망하니까.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 와중에 저희 형은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밑에 동생은 저보다 5살 이상 나이 차가 있어 중학생 초등학생이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런 일을 당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힘들어하셨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안을 책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친구가 조그마한 매장을 하나 차려주셔서 볼티모어에서 햄버거 굽는 일을 시작했었지요.
어려운 이민자의 길에 들어선 최정범은 어떻게 자신을 극복해 나갈까? 공부하며 일하는 한인 2세 청년으로 발돋움한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16명의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전공을 바이올린에서 이제는 사업의 연장선인 경영학으로 바뀌게 된다.
대학교에 가서 인터뷰를 했을 때 입학 사정관이 성적은 절대 안되는데 지금까지 학교 역사상에서 추천서를 16장을 가지고 온 학생은 처음이랍니다. 그래서 받아줘서 메릴랜드 대학교 볼티모어 분교를 2년을 다닙니다. 그리고 다시 버펄로에 거튼 대학으로 옮겨 다니게 됩니다. 작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역시 경영학을 공부합니다.
최정범 씨는 대학에 다니면서도 주 7일 부모님을 도왔으며 매주 부모님 사업을 도왔다고 이야기 한다.
거의 주말마다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있을 때 부모님이 잠드시기 전에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학교와는 거의 8시간 거리입니다. 항상 머릿속에는 부모님이 이제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구나. 집에 오셨겠구나 주무시겠구나 하고 저도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최정범 씨는 1989년 한국에 나가 개인 사업을 시작하지만, 한국의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사업이 망하자 죽음까지도 생각하며 좌절을 하게 된다.
저도 뭔가 저 자신을 위한 일을 해봐야겠다 해서 한국으로 갑니다. 1989년-1990년 이때 한국에 들어가서 여행사 공연기획하는 회사를 운영하게 됩니다. 열심히 몇 년 동안 사업을 했는데 1997년 11월에 한국이 경제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때 제가 운영하던 사업도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저도 빈털터리가 돼 참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죽음까지도 생각하며 세상이 아무 소망이 없었다고 하는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최정범에게 기나긴 고통의 나락에서 한 가닥의 빛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사업에 망한 후 미국에 돌아와 희망이란 찾기 어려웠던 때다. 놀고 있었을 때 교회를 통해 스리랑카로 선교여행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스리랑카의 길거리에 쌓여 있는 쓰레기들과 바퀴벌레 파리 사람들 굶주림에 먹지도 못하는 속에서도 잃지 않는 웃음을 보면서 사람 산다는 것이 무얼 가져서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내가 정신적으로 올바르게 생각을 하고 이 세상이 만들어진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면 그 안에 제가 가진 것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겠다 생각을 바꾸어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최 씨는 밑바닥 인생을 시작한다. 하루에 17시간의 일은 다반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는 한국인의 끈기로 10년을 노력한 끝에 오늘의 성공신화를 이루게 된다.
정말 기회였지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원하지 않는 한 매장을 얻게 됩니다. 참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열심으로 일을 하다 보니까. 건물주와 여러분이 저를 좋게 봐줘서 건물주가 다른 건물주를 소개해주고 그리고 연방정부 건물의 구내식당을 운영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문을 타고 가서 다른 연방정부 건물의 구내식당에서 부탁이 들어오고 해서 우리 회사가 커지게 되지요. 10년만에 아무도 저 자신까지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회사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저 혼자의 힘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요. 제가 믿는 신앙 제가 가진 신앙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리고 제 가족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믿어주고 항상 지원해주는 아내와 두 자식 이런 것이 저에게는 제가 잠을 자지 않아도 행복하고 제가 마음속으로 고통을 당하고 힘들어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업 규모를 묻는 말에 최정범씨는 300여 명의 직원에 연간 700만 명에게 음식를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해 준다.
연방정부공무원을 상대로 구내식당을 운영하는데 저희가 연간 약 700만 명에게 아침 점심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300여명 넘습니다. 미국에서 큰 회사는 아니지만, 한국 사람이 하는 회사로서 이 계통에서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 회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정범씨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제가 부모님께 받은 것은 미국에 와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습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무릅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 이것이 제가 부모님께 배운거고 존경하는 겁니다.
최정범씨에게 사업의 목표를 물어봤다. 그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미국에 알리는 마음으로 사업에 임한다고 설명하고 그동안 몇 차례 정부 입찰에서도 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 한국사람끼리 서로 도와주고 한국사람끼리 경쟁하지 않고 맥도날드와 경쟁하자 아니면 저희 업계에 큰 회사들이 있습니다. 저희 같은 일을 하는 회사 중에서 지금 제일 작은 회사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정부입찰을 해서 큰 미국회사와 입찰을 해서 져본 적이 없습니다.
최정범씨가 미국에 정착해 사는 탈북인들에게 주는 충언은 이렇다.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서 사는 이민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두고온 것이 어떠한 것이던 것을 떠나서 지금 새롭게 사는 곳이 어떠한 곳인가를 떠나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땅과 자기 나라를 떠나서 살아야 된다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 속에서 내가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온 힘을 다해서 그 비극을 희망으로 만들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어떠한 소망보다도 나 자신에게 큰 소망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교포 한인 2세 사업가 최정범씨의 사업실패를 극복하고 놀라운 제기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 1부 순서입니다. 제2부에서는 한인 2세로서 사회봉사의 이모저모를 들어봅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교포 한인 2세 사업가 최정범 씨가 사업실패를 극복하고 놀라운 재기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 1부 순서입니다.
재미교포로서 한인 2세 최정범 씨는 워싱턴 인근의 16개 정부기관 식당을 운영하는 젊은 사업가이다. 최정범의 어린 시절은 어떠했을까. 그는 미국에 오기 전 12살 나이로 4형제 중 둘째로 아버지가 사업한 덕분에 유복하게 자랐다 그러나 어머니가 암과 투병을 하게 되고 병원에서 더는 살 수 없다는 진단을 받았지만, 어머니의 깊은 신앙으로 기도원에서 고침을 받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는 잘나가던 사업도 마다하고 더욱 진취적인 삶을 위해 1974년 미국 이민 길에 오르게 된다.
1974년 4월 5 아버지가 사업에 어떤 회의를 느끼면서 안정된 곳에서 살고파 미국에 이민을 오게 됩니다.
최정범 씨의 미국에서의 학창시절을 뒤돌아보자. 그는 뉴욕에 있는 예술고등학교에서 바이올린을 전공하는 음악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음악도로서 큰 희망과 포부를 갖는다.
미국에 맨 처음 와서 영어가 되지 않고 말을 못하니까. 아마 어려서부터 저 자신을 표출할 수 있는 게 바이올린이었고 바이올린을 잘 켰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들어가기 어려운 뉴욕에 예술고등학교에 시험에 합격해서 다니게 됐습니다.
그러나 최정범 씨 가정의 이민생활 시작은 어떠했을까? 다른 이민자들이 겪는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 어려움을 겪게 된다.
미국에 대한 아무런 정보를 갖지 않고 한국을 떠나신 것 같습니다. 오셔서 많은 이민자가 하는 조그만 식품가게 부터 시작해서 권총 강도를 당하는 어려움을 겪습니다. 저희는 아들만 4명인데 짐을 싸서 뉴욕으로 가서 뉴욕에서 얼마 사업기반을 일구시다가 화제로 말미암아 사업체가 다 불에 타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1980년에 다시 워싱턴으로 내려오게 됩니다.
한인 2세 최정범은 초기 이민 생활에서 혹독한 고통을 맞게 된다. 다니던 학업도 중단하고 가족들을 대표해 가장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를 회고한다.
하루 아침에 아버지 사업이 망하니까. 갖고 있던 모든 것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그 와중에 저희 형은 의과대학을 다니고 있었고 밑에 동생은 저보다 5살 이상 나이 차가 있어 중학생 초등학생이고 제가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런 일을 당했었기 때문에 부모님은 그 충격으로 말미암아 힘들어하셨고 그래서 할 수 없이 집안을 책임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 친구가 조그마한 매장을 하나 차려주셔서 볼티모어에서 햄버거 굽는 일을 시작했었지요.
어려운 이민자의 길에 들어선 최정범은 어떻게 자신을 극복해 나갈까? 공부하며 일하는 한인 2세 청년으로 발돋움한다. 그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16명의 고등학교 선생님으로부터 추천서를 받아 전공을 바이올린에서 이제는 사업의 연장선인 경영학으로 바뀌게 된다.
대학교에 가서 인터뷰를 했을 때 입학 사정관이 성적은 절대 안되는데 지금까지 학교 역사상에서 추천서를 16장을 가지고 온 학생은 처음이랍니다. 그래서 받아줘서 메릴랜드 대학교 볼티모어 분교를 2년을 다닙니다. 그리고 다시 버펄로에 거튼 대학으로 옮겨 다니게 됩니다. 작은 학교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습니다. 거기서 역시 경영학을 공부합니다.
최정범 씨는 대학에 다니면서도 주 7일 부모님을 도왔으며 매주 부모님 사업을 도왔다고 이야기 한다.
거의 주말마다 내려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학교에 있을 때 부모님이 잠드시기 전에 자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학교와는 거의 8시간 거리입니다. 항상 머릿속에는 부모님이 이제 가게 문을 닫을 시간이구나. 집에 오셨겠구나 주무시겠구나 하고 저도 잠을 잤던 것 같습니다.
최정범 씨는 1989년 한국에 나가 개인 사업을 시작하지만, 한국의 경제위기로 말미암아 사업이 망하자 죽음까지도 생각하며 좌절을 하게 된다.
저도 뭔가 저 자신을 위한 일을 해봐야겠다 해서 한국으로 갑니다. 1989년-1990년 이때 한국에 들어가서 여행사 공연기획하는 회사를 운영하게 됩니다. 열심히 몇 년 동안 사업을 했는데 1997년 11월에 한국이 경제위기를 겪게 됩니다. 그때 제가 운영하던 사업도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저도 빈털터리가 돼 참 힘들었습니다. 그 당시 죽음까지도 생각하며 세상이 아무 소망이 없었다고 하는 생각을 했었으니까요.
최정범에게 기나긴 고통의 나락에서 한 가닥의 빛을 찾을 수 있을까? 한국에서 사업에 망한 후 미국에 돌아와 희망이란 찾기 어려웠던 때다. 놀고 있었을 때 교회를 통해 스리랑카로 선교여행을 가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스리랑카의 길거리에 쌓여 있는 쓰레기들과 바퀴벌레 파리 사람들 굶주림에 먹지도 못하는 속에서도 잃지 않는 웃음을 보면서 사람 산다는 것이 무얼 가져서만 있는 것이 아니구나 생각하고 내가 정신적으로 올바르게 생각을 하고 이 세상이 만들어진 신의 손길을 느낄 수 있다고 하면 그 안에 제가 가진 것을 보면서 감사할 수 있겠다 생각을 바꾸어 다시 일어섭니다.
그리고는 지금으로부터 10년 전 최 씨는 밑바닥 인생을 시작한다. 하루에 17시간의 일은 다반사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고 했던가 그는 한국인의 끈기로 10년을 노력한 끝에 오늘의 성공신화를 이루게 된다.
정말 기회였지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고 원하지 않는 한 매장을 얻게 됩니다. 참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열심으로 일을 하다 보니까. 건물주와 여러분이 저를 좋게 봐줘서 건물주가 다른 건물주를 소개해주고 그리고 연방정부 건물의 구내식당을 운영하게 되는데 그것이 소문을 타고 가서 다른 연방정부 건물의 구내식당에서 부탁이 들어오고 해서 우리 회사가 커지게 되지요. 10년만에 아무도 저 자신까지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회사 규모가 커지게 됩니다. 저 혼자의 힘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고요. 제가 믿는 신앙 제가 가진 신앙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그리고 제 가족들 그리고 지금까지도 믿어주고 항상 지원해주는 아내와 두 자식 이런 것이 저에게는 제가 잠을 자지 않아도 행복하고 제가 마음속으로 고통을 당하고 힘들어도 행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해주고 제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업 규모를 묻는 말에 최정범씨는 300여 명의 직원에 연간 700만 명에게 음식를 제공하고 있다고 소개해 준다.
연방정부공무원을 상대로 구내식당을 운영하는데 저희가 연간 약 700만 명에게 아침 점심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직원들은 300여명 넘습니다. 미국에서 큰 회사는 아니지만, 한국 사람이 하는 회사로서 이 계통에서는 그래도 열심히 하는 회사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최정범씨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신앙의 유산이 오늘의 자신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제가 부모님께 받은 것은 미국에 와서 자식들을 위해 희생하시는 모습 그리고 신앙인으로서 무릅을 꿇고 기도하시는 모습, 이것이 제가 부모님께 배운거고 존경하는 겁니다.
최정범씨에게 사업의 목표를 물어봤다. 그는 한국인의 자긍심을 미국에 알리는 마음으로 사업에 임한다고 설명하고 그동안 몇 차례 정부 입찰에서도 져본 적이 없다고 말한다.
우리 한국사람끼리 서로 도와주고 한국사람끼리 경쟁하지 않고 맥도날드와 경쟁하자 아니면 저희 업계에 큰 회사들이 있습니다. 저희 같은 일을 하는 회사 중에서 지금 제일 작은 회사 중의 하나입니다. 지난 1년 반 동안 정부입찰을 해서 큰 미국회사와 입찰을 해서 져본 적이 없습니다.
최정범씨가 미국에 정착해 사는 탈북인들에게 주는 충언은 이렇다.
자기가 살던 곳을 떠나서 사는 이민자의 삶이라고 하는 것은 두고온 것이 어떠한 것이던 것을 떠나서 지금 새롭게 사는 곳이 어떠한 곳인가를 떠나서 비극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땅과 자기 나라를 떠나서 살아야 된다는 것은 비극이지만 그 비극 속에서 내가 만들 수 있는 모든 것을 온 힘을 다해서 그 비극을 희망으로 만들수 있다고 한다면 그건 어떠한 소망보다도 나 자신에게 큰 소망이 되지 않겠나 생각합니다.
자유아시아방송의 세계의 한국인 오늘은 재미교포 한인 2세 사업가 최정범씨의 사업실패를 극복하고 놀라운 제기 인생을 살아가는 이야기 1부 순서입니다. 제2부에서는 한인 2세로서 사회봉사의 이모저모를 들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