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태양’

워싱턴-박봉현 parkb@rfa.org
2016-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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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은 북한의 제7차 노동당 대회와 관련 외신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북한의 제7차 노동당 대회와 관련 외신 기자들이 열띤 취재 경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분석해보는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어두운 태양’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북한 노동신문은 제 7차 당대회 이틀 전인 5월 4일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을 ‘위대한 21세기의 태양’으로 호칭했습니다. 북한에선 줄곧 김씨 일가를 태양에 견주었습니다. 김일성은 ‘민족의 태양’, 김정일은 ‘21세기의 태양’, 김정은은 ‘선군 조선의 태양’으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김정은을 아버지 김정일의 호칭에 ‘위대한’이란 수식어를 더해 ‘위대한 21세기의 태양’이라고 했습니다.

당대회를 띄우려고 일시적으로 사용한 것인지 주야장천 이렇게 부를 것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태양’이란 단어는 지난 60여년 간 김씨 일가의 ‘전매특허’였습니다. 북한에서 신과 같은 반열에 오른 김씨 일가만 대를 이어 쓸 수 있지 다른 사람이 흉내 냈다간 ‘신성’을 모독한 대역죄인이 됩니다. 태양은 하나밖에 없으니 북한에선 당연한 일일 겁니다.

태양은 인간의 숭배 대상이었습니다. 태양신은 고대 이집트에도 있었고, 그리스, 로마 등 유럽은 물론이고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있었습니다. 과학이 발달하고 시대가 변하면서 태양신은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났지만, 고립사회 북한에선 여전히 태양이 김씨 일가의 신격화에 사용됩니다. 바깥 세상과 차단된 북한 주민들이라 그런지 별 가시적인 저항도 받지 않으면서 반복적으로 애용됩니다.

태양이 밝듯이 태양신도 환해야 합니다. 장막으로 가려서야 태양이라 할 수 있겠습니까? 태양은 빛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온기로 사람을 품어야 합니다. 보통 태양이 아니라 ‘위대한 21세기의 태양’이라면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위대한 21세기의 태양’ 김정은은 36년만에 치르는 당대회 첫날 외신기자 100여명을 불러놓고 대회가 열린 평양 4.25문화회관 출입을 불허했습니다.

‘은둔왕국’ 북한을 취재한다는 설렘으로 가득했던 기자들은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대회장 밖에서 서성대며 속을 끓여야 했습니다. 이날 날이 흐리고 비가 와서인지 아니면 자신의 당대회 개회사 내용이 부실해서인지 김정은은 외신기자들에게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위대한 21세기의 태양’은 보여주고 싶은 것만 공개하고 보여주기 싫은 것은 감추는 그런 ‘태양’이라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습니다.

기자들은 대회장 200미터 밖에서 진을 치고 지나가는 학생들에 다가가 당대회가 어찌 되고 있냐고 물었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입을 맞춘 듯 “모른다” 일색이었습니다. 미국의 일간지 워싱턴포스트 기자는 불 난 집 구경하듯 대회장 건물과 행인, 그리고 쩍쩍 금이 간 도로를 카메라에 담을 뿐이었습니다. ‘위대한 21세기의 태양’은 이렇게 손님을 내쳤습니다.

영국 BBC 방송기자는 북한 당국에 억류됐다 추방됐습니다. “현실을 왜곡 날조하여 모략으로 일관된 보도를 했다”는 게 추방 이유였습니다. 이 기자가 김정은을 “뚱뚱하고 예측할 수 없는” 인물이라고 보도한 데 발끈해 즉각 행동에 나섰다는 게 외신의 설명입니다. ‘위대한 21세기의 태양’ 소리를 들으려면 듣기 불편한 말도 웃어넘기는 배포와 너그러움이 있어야 할 텐데, 김정은은 구금과 추방이라는 무력행사로 응수했습니다.

이럴 거였으면 애초에 외신 기자들을 초청하지 말던지, 불러놓고 기자완장에 30유로씩 받고는 취재를 막는 나라가 과연 북한 외에 또 어디에 있을까요? 초대한 외신기자들을 소 닭 보듯 무관심하게 내팽개치다가, 이들에 감시원을 붙여 화장실 갈 때도 따라가도록 한 ‘위대한 21세기의 태양’의 이상한 배려는 기자들을 소름 돋게 했을 겁니다.

북한의 행태는 이미 예견 가능했습니다. 기자들이 내리는 평양 순안공항에 게시된 위압적인 문구를 미국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기자가 사진 찍었습니다. 북한정권이 감추고 싶은 일들을 낱낱이 까발리는 외국의 자유 언론매체들을 원색적인 표현으로 비방하며 이들에 대한 접속을 봉쇄한다는 게시문이었습니다. 북한에서 자유로운 취재를 기대한 것이 허황한 꿈이란 점을 일러주는 ‘위대한 21세기의 태양’의 경고였습니다.

김정은은 조만간 자신의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이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의 지붕을 금박으로 할 예정이라고 보도됐습니다. 김정은이 이를 통해 자신의 권위를 드높이려고 한다는 해석이 나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은 이미 그들이 말하는 ‘태양’이고 김정은은 ‘위대한 21세기의 태양’인데 무엇이 침침하다고 궁전지붕을 번쩍이는 금박으로 하려는지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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