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하절

워싱턴-박봉현 parkb@rfa.org
2016-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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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법인 물망초가 입수해 공개한 북한의 2016년 달력.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생일(1월 8일)이 여전히 평일로 표기되어 있다.
사단법인 물망초가 입수해 공개한 북한의 2016년 달력. 김정은 북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생일(1월 8일)이 여전히 평일로 표기되어 있다.
사진-연합뉴스 제공

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분석해보는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은하절’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종교 창시자들의 탄생 이야기가 하늘에서 반짝이는 별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처럼 북한 최고지도자의 우상화 작업에도 별은 뗄래야 뗄 수 없는 요소입니다. 북한은 김일성 주석의 생일인 4월 15일을 이른바 태양절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태어난 2월 26일은 광명성절로 이름 지어 국가 명절로 지정했습니다. 밝게 빛나는 별의 뜻인 광명성은 실제 별이 아니라 장거리 로켓 탑재 위성 광명성에서 빌려온 이름이지만 아무튼 우상화엔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음 직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끔찍하게 우러러보는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이 선대의 기발한 우상화 수법을 외면할 리 없습니다. 내년 1월 8일 김정은의 생일을 국가명절로 선포하고 은하절로 명명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고 합니다. 김정일의 광명성절과 마찬가지로 장거리 로켓 은하에서 착안한 듯합니다.

김정은은 할아버지의 주석 직함이나 아버지의 국방위원장 직함을 갖지 않았습니다. 선대에 대한 예의에서 그랬다고 합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시신이 나란히 누워 있는 금수산태양궁전에 가면 90도로 머리를 숙여 조의를 표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생일을 기념할 때도 할아버지의 태양과 아버지의 광명성보다 작은 별을 고를 법한데 이번엔 그렇게 하지 않을 모양입니다. 은하절로 공식 선포된다면 말입니다.

은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별을 품습니다. 지구와 태양을 포함한 우리은하에는 최소 2천 억 개의 별이 있습니다. 태양도 은하에서는 먼지에 불과합니다. 태양은 은하 앞에서 명함을 내밀지도 오금을 펴지도 못하는 존재입니다. 은하절의 의미를 반복적으로 되새기다 보면 자연스레 태양절과 광명성절의 상대적 미약함이 부각되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깔보는 행세가 될 수 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반열에 오르고 싶은 욕망에 무리수를 두었다’는 구설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가득 찬 달이란 의미의 만월절이 선대에 대한 예의를 갖춘 표현이란 견해도 있습니다. 하지만 김정은과 그 측근들에겐 어차피 우상화가 목적인데 예의 따질 필요가 있겠습니까?

물론 은하절 대신 김정은 집권 후 집중 개발중인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의 북한식 명칭인 ‘북극성1호’를 본 따 ‘북극성절’로 할 것이란 전문가 견해가 있고, 남한정부도 은하절을 공식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어찌 됐든, 권력을 완전 장악한 자신감의 발로이거나 우상화를 서둘러야만 하는 정정불안의 표출이거나 김정은 체제의 기이함을 입증하기엔 적절한 사례라는 지적입니다.

은하절이 예정대로 지정되면 시기적으로도 파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권력자 생존 시엔 이런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태양절은 김일성 사망 후 3년 탈상을 마친 1997년에, 광명성절은 김정일 사망 이듬해인 2012년에 지정됐습니다. 아직 30대 초반의 김정은의 생일을 은하절이라고 한다면 아마 저 세상에 있는 김일성과 김정일도 ‘도대체 뭐가 급해 저리 할까’하고 놀람 반 걱정 반 하지 않을까요?

은하절 선포는 민생을 어렵게 한다는 점에서도 무리수란 게 전문가의 진단입니다. 위험한 줄 모르고 불로 뛰어드는 나방처럼, 무모한 우상화에로의 진격이라는 겁니다. 태양절과 광명성절이 춘궁기에 몰려있는데 은하절까지 추가되면 생일 준비에 동원되는 주민들의 고충만 더해지는 까닭입니다. 강제노역 동원뿐 아니라 행사 비용도 문제입니다. 당국은 예산이 부족하다는 핑계로 주민들의 주머니에서 갹출하도록 하는 게 다반사인 사실을 주민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

게다가 혹한의 1월 은하절 행사준비에 내몰리게 될 주민의 얼굴엔 주름만 패일 것이란 게 대북 소식통의 말입니다. 말이 명절이지 실제 상당수 주민에겐 소득 없는 일거리만 잔뜩 안겨주는 불청객으로 여겨진다고 합니다. 아무리 고립된 독재국가라고 하지만, 주민의 고혈을 무자비하게 짜내면 정권에도 적지 않은 부담으로 돌아갈 것이란 겁니다.

김정은의 후계자가 생기면 또 무슨 기발한 이름을 붙여 우상화할 것이고 대대로 권력을 이어갈 생각을 할 터이니, 지도자의 생일이 같을 경우 기존의 생일 전이나 후로 날을 정해야 하는 촌극이 벌어질 겁니다. 김씨 세습이 왕조시대처럼 순탄하게 이어간다면 훗날 북한 달력은 온통 무슨 절, 무슨 절로 도배될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북한 주민들도 이구동성으로 ‘그건 아니다’라고 하지 않을런지요?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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