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자 겨냥한 심리전
2016.08.31
앵커: 북한에서 일어나는 일이나 북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일들을 분석해보는 ‘북한전망대’입니다. 이 시간엔 ‘탈북자 겨냥한 심리전’에 관해 이야기해 봅니다. 박봉현 기자입니다.
북한이 요즘 특이한 심리전을 펼치고 있습니다. 북한의 폭정을 비난하는 외국 정부나 정치체제를 비방하는 선전 선동은 하루가 멀다 하게 보고 들었지만 이번 심리전은 독특합니다. 탈북자 개인을 목표물로 정해 집중공략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북한의 인터넷 선전 매체인 ‘우리민족끼리’가 이 심리전의 선봉에 섰습니다. ‘우리민족끼리’는 8월25일 ‘록음물’ 코너에서 새 소식이라며 세 건의 음성 기록물을 내보냈습니다. 각각 6분35초, 4분30초, 4분26초로 모두 15분31초 분량입니다. 듣기 좋은 음악이나 배울 게 많은 교양물이라면 결코 길거나 지루하지 않은 분량입니다. 하지만 세 녹음물을 들으려면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내용이 천편일률적이기 때문입니다.
세 녹음물 가운데 가장 긴 것은 탈북자에게 북한의 여동생이 보내는 편지입니다. 가장 짧은 것은 탈북자의 자녀에게 북한에 있는 외삼촌이 보내는 편지이고, 중간 분량의 녹음물은 탈북자에게 북한의 동생이 보내는 편지입니다. 편지 낭독은 발신인이 하지 않고 노련한 전문 아나운서가 했습니다. 발신인의 성별에 따라 남녀 아나운서가 능숙하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편지는 탈북자와 북한에 남은 가족간 혈육의 정을 담았습니다. 여동생이 오빠에게, 남동생이 누나에게, 외삼촌이 조카들에게 가족이 나눈 뜨거운 피의 의미를 되새겼습니다. 새로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탈북자의 마음을 뒤흔들려는 의도가 역력했습니다. 북한에 남은 형제 자매, 특히 어머니가 하루도 빠짐없이 억장이 무너지는 고통 속에 산다며, 가족을 두고 온 탈북자의 아물지 않는 상처를 후벼 팠습니다.
아나운서의 낭독은 정에 호소하는 듯한 말투에서 이내 강력한 어조로 변합니다. 탈북자에게 날카로운 화살을 쏩니다. ‘낳아주고 키워준 조국을 배신했으면 그곳에서 조용히 살 것이지 거짓으로 북한을 모략하는 악질 반역자,’ ‘최고존엄을 모략한 반 민족적 역적 중 상역적,’ ‘인간의 양심을 저버린 너절한 인간 쓰레기’ 등의 근거 없는 원색적인 표현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한 술 더 떠 탈북자에게 위해를 가하겠다는 도발적인 발언도 거침없이 쏟아냈습니다. ‘정신차리지 않고 계속 반공화국 모략질을 하면 남조선으로 가서 쳐 죽이겠다’는 섬뜩한 협박도 편지 내용에 들어있었습니다. 오빠 탈북자에게 보낸 여동생의 편지에는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리지 않느냐’며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저주했습니다. 그러다가 조국의 품으로 돌아오라는 회유성 발언도 잊지 않았습니다.
세 편의 편지 작성에는 국가보위부가 간여했다는 게 북한전문가의 분석입니다. 여러 해 전에 탈북한 사람에게 북한의 가족이 이제서야 편지를 보내는 것도 그렇고, 정에 호소하다가 입에 담기 어려운 악담에 협박까지 퍼부은 것은 분명 북한의 가족이 보위부의 지시에 따랐다는 해석입니다.
지난 7월 영국 주재 북한대사관의 태영호 공사의 남한 망명 등 최근 북한 엘리트의 잇딴 탈북에 충격 받은 북한당국이 한편으론 남한정부를 비판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이처럼 탈북자 가족을 동원해 탈북자를 심란하게 하려는 심산이란 지적도 있습니다. 지금은 일부 탈북자를 표적으로 삼고 있지만, 결국 이 소식이 다른 탈북자들에게도 전해져 탈북자 사회를 동요케 하려는 의도라는 겁니다. 또 추후에 탈북자 표적을 확대할 가능성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일반 주민뿐 아니라 특권을 누려 온 엘리트들도 제 나라를 버리는 데는 분명 그 나라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일 텐데, 북한 정권은 애꿎게 북한의 가족을 끌어들여 탈북자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RFA 자유아시아방송 박봉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