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FA 초대석] 아웅산 테러범 강민철과 같이 수감됐던 버마 반정부 지도자 윈틴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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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인물을 만나보는 RFA 초대석, 진행에 전수일 입니다.

북조선의 테러공작원 강민철과 20년 간 같은 교화소에 수감됐던 버마 반정부 지도자 윈틴 (WIN TIN)씨.

강민철은1983년 10월 9일 버마를 방문한 한국 전두환 대통령 일행이 아웅산 국립묘지를 참배하는 날 폭탄테러를 감행한 뒤 버마 당국에 체포돼 수감됐고 당시 버마의 유명 언론인이었던 윈틴 씨는 군정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민족동맹(NLD)을 창설 활동하다 정치범 혐의로 강민철과 같은 교화소에 수감됐습니다. 윈틴 씨는 교화소에서 알게 된 강민철의 수감생활과 동료 수감자로서의 그의 인간적인 면모에 대해 최근 저희 방송과의 회견에서 소상히 밝혔습니다. 8순을 넘은 윈틴 씨는 2008년 석방 돼 현재 아웅산 수치여사가 이끄는 야당 민주주의민족동맹의 상임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전수일: 윈틴 씨는 아웅산테러폭파사건 6년 후인 1989년에 강민철이 수감된 ‘인세인 (Insein)’ 감옥, 즉 교화소에 수감됐고 강민철이2008년 5월 사망한 뒤에 출소하셨는데요 20년 간 같은 감옥에 있었습니다. 그 간 강민철이 아웅산 테러를 자신과 공범자들이 자행했다는 사실을 윈틴 씨에게 개인적으로 고백한 적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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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옥 생활 당시의 윈틴 씨 (사진-RFA 버마 서비스)

Win Tin: Yes. He told me he did it along with other persons...

네. 그렇습니다. 강민철은 자신이 다른 동료와 함께 아웅산 테러폭파를 했다고 말했습니다.

전: 강민철이 테러의 목적이 무엇이었는지 말한 적이 있습니까?

Win Tin: He told me this. At that time, he was an army officer, and he was recruited by somebody there, and then he was trained very hard, and then he was told to go to Burma and sent to Burma…

강민철은 당시 인민군 장교였고 북조선 인민군 상부에 차출돼 고된 훈련을 받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버마 파견 명령이 내려져 버마로 오게 됐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그는 자신의 임무가 무엇인지 잘 알았습니다. 다만 그 같은 명령의 배경이나 이유에 대해서는 말 한 적이 없습니다.

전: 강민철은 테러폭파후 버마 수사관들에게 체포되기 전에 수류탄으로 자폭하려다 팔을 잃었고 또 복부에 상처를 입어 병원에 입원했었다고 하던데요, 강민철이 윈틴 씨에게 그 상처를 보여 준 적이 있습니까?

Win Tin: Yes. He showed not only to me but also other people whoever have chances to talk with him. He was so much excited and he was always rather keen to show his scars and his cut-off hand.

네. 나 한테만 보여준 게 아니고 다른 수감자들에게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보여줬습니다. 자신의 상처와 절단된 팔을 동료 수감자들에게 보여주길 꺼리지 않았고 그때마다 흥분되곤 했습니다.

전: 잘려진 팔이 오른 쪽이었습니까 왼쪽이었습니까?

Win Tin: Right.

오른쪽이었습니다.

전: 강민철이 자신의 테러행위를 후회한 적이 있습니까?

Win Tin: No, not quite really. Because you see that was an order and he has to do it, but he was sorry that he was left in another country without recognition from his own government…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강민철은 상부의 명령으로 폭파 임무를 받아 수행했을 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만 그는 자신이 임무를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조국 북조선으로부터 외면당해 이국 땅에 팽개쳐 져 고향과 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하는 신세를 한탄하곤 했습니다.

전: 2007년 4월 한국의 연합뉴스는 버마의 영자신문인IRRAWADDY (버마와 동남아 지역 뉴스 전문) 기사를 인용해 ‘강 씨와 함께 생활한 한 정치범에 따르면 강 씨가 남북한 어디에도 가기 싫어한다’고 전했습니다. 그 정치범은 윈틴씨를 지칭한 것입니다만 최근에 윈틴 씨는 저희 방송에 강 씨가 북한에는 가기 싫어했고 남한에 가고 싶어했다고 말했다고 전했습니다. 어떤 것이 맞는 말입니까?

Win Tin: Well, of course he told these kind of things too. At that time he told me he was very much disappointed because he was not accepted by his own country. On the other hands, he cannot go to South Korea,

그 기사의 내용도 맞습니다. 그 당시 그는 그렇게 말했었습니다. 그때 강민철은 자기 나라가 자신을 받아 주지 않는 데 대해 매우 실망했습니다. 그렇다고 남한으로 갈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남북한이 아닌 제3국으로 가고 싶어한 때도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감옥에서 버마 말을 배워 잘 구사했기 때문에 만일 출옥하면 버마 사회에서 취직하거나 일을 할 수 있겠다 싶어, 버마에서 살고 싶은 생각도 했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 갈 것인가에 대한 최종 정착지나 행선지 보다는 무엇보다도 감옥을 일단 벗어나고 싶다는 말을 많이 했습니다. 그냥 출소만 한다면 자신은 행복할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전: 북조선에 대해서 자신의 심정이 어떤지 얘기한 적이 있습니까?

Win Tin: Well it’s a difficult question. He said he would like to go back to N. Korea, not the South. 6:53: win tin: He can never explain that question. But his country never accepted him…

본인은 당초 남한이 아닌 북조선 고향에 돌아가 가족을 만나고 거기에서 뼈를 묻고 싶다고 말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의 조국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강 씨는 왜 자신이 조국에 돌아갈 수 없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다면서 분개하고 화를 내곤 했습니다. 자신은 조국의 명령에 따라 버마까지 와서 테러임무를 수행해 사람들까지 죽였는데 자신이 정작 고국에 돌아가고 싶다고 할 때는 받아주질 않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강 씨는 버마 주재 한국 공관 관리들이 이따금 감옥소를 찾아와 자신을 면회하는 걸 반가와 했습니다. 그는 당시 내게 한국말로 된 잡지와 간행물을 주곤 했습니다. 나는 그런 간행물을 받는 게 여간 기쁜 게 아니었습니다. 내 감방에서는 읽을 거리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비록 한국어로 된 잡지와 간행물을 읽지는 못해도 사진이 많아 볼 거리가 많았습니다. 특히 눈 덮인 산과 들의 사진이 참 좋았던 것을 아직 기억합니다. 그 잡지와 간행물은 남한에서 온 것이었고 그것은 버마 주재 한국 공관 관리들이 자신을 면회할 때 한국 음식과 함께 준 것이라고 내게 알려 줬습니다. 강 씨는 한국 관리들과 면회하면서 조선말을 할 수 있다는 것과 또 그들에게 받은 한국어로 된 책을 읽을 수 있어서 좋아했습니다. 언젠가 강씨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감옥에 있을 때 썼다는 책도 내게 주었습니다. 영어로 번역된 책이었는데 그 책은 아직도 내 서재에 있습니다. 그 책에서 김대중씨는 자신이 가톨릭 신자라는 사실과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 많은 얘기를 쓴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전: 강민철이 영어를 할 줄 알았습니까?

Win Tin: Yes. He could understand a bit. He seems to be not very fluent, but he can read something…

네. 약간은 이해 했습니다. 능숙한 건 아니었지만 얼마간 읽을 줄은 알았습니다. 2008년에는 영어신문을 갖고 있는 걸 봤는데 읽고 이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전: 영어는 어디서 배웠을까요?

Win Tin: I don’t know. Maybe in the prison he taught himself. One thing to add: he’s a very curious man…

저도 모르죠. 아마도 감옥소에 있으면서 독학을 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한 가지 강 씨에 대해 덧붙이고 싶은 것은 아주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2000년인가 2001년에 처음 그를 만나 봤을 때가 생각납니다. 나는 그때 감옥의 특별 구역에 수감돼 있었습니다. 거기서는 가끔 감방 밖으로 나갈 수도 있었고 감옥내 뜰에서 걸을 수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걷기가 힘들어 감방 바깥의 층계에 앉아 있었습니다. 같은 특별구역의 다른 감방에 있던 그가 나를 찾아와서는 말을 걸었습니다. 버마 역사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습니다. 아웅산 장군과 버마 왕들에 대한 질문도 했습니다. 버마에 대해 굉장히 호기심이 많았고 궁금해 하는 것도 많았습니다.

전: 그렇다면 강민철은 윈틴 선생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았다는 말입니까?

Win Tin: Yes, yes. I think that he got the message (news about me) from other people. Because I was well-known in the prison…

네. 그렇습니다. 아마 버마인 동료 수감자들에게 들은 모양입니다. 내가 당시 잘 알려진 언론인이고 정치인이라는 사실을 강 씨에게 말 해 준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내가 몇 호실 감방에 수감돼 있는지도 알려 줬나 봅니다. 당시에는 강 씨도 감옥 내에서 그런대로 자유스럽게 움직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가 감방 밖에 나와 앉아 있을 때면 나를 보러 오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여러 가지를 묻곤 했습니다.

전: 물론 질문은 버마어로 했겠네요. 윈틴 선생께서 조선어, 한국어를 모르시니까요.

Win tin: No, no. Burmese of course, he can talk Burmese quite well.

물론입니다. 강 씨는 버마어를 아주 잘 했습니다.

전: 그럼 버마어도 감옥 내 간수나 동료들한테 배웠겠네요.

Win Tin: Yes. One thing you should know is Burmese wardens are not kind to us, Burmese prisoners. But they are always curious about foreign prisoners. They are quite kind to foreigners...

그렇습니다. 교화소 내 간수와 관리들은 버마인 수감자들에게는 불친절했지만 외국인 수감자들에게는 늘 호기심을 갖고 매우 친절하게 대했습니다.

거기다가 버마어를 한 두 마디만 할 줄 알면 그게 신기해서 그런 외국인 수감자들에게는 버마어를 더 가르쳐 주곤 했지요. 강철민은 버마어를 아주 잘 했습니다. 내가 강 씨가 있던 특별구역으로 옮겨져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 정도로 잘 했습니다. 그 이전에 교화소 당국은 내가 외국인 수감자와 말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버마 말을 몇 년 배웠는지는 몰라도 강씨는 제대로 잘 배운 게 틀림없었습니다.

전: 강씨가 북조선 가족에 대한 얘기는 하지 않았습니까?

Win Tin: Not much. He never told me about his brother or sister, but he told me about his mother…

별로 많이 하지는 않았습니다. 형제 자매에 대한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고 다만 어머니에 대해서는 얘기했습니다. 자신이 어릴 때부터 어머니가 고향에서 남새를 재배해 자기는 남새를 좋아한다고 말했습니다. 북한에서 자랄 때 어렵고 힘든 상황 같은 것은 언급하지 않고 오직 어머니에 대한 얘기만 했습니다.

전: 버마 감옥에서 사망했을 때 나이가 53세였다고 하니1983년 테러 당시 강 씨의 나이는 28살이었을 텐데요, 강 씨가 결혼했는지 아니면 미혼인지 등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습니까?

Win Tin: No. He never told me.

아니요. 그런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전: 버마 인세인 교화소 당국이 에이피 통신에 밝힌 바에 따르면 강 씨는 2008년 5월 18일 간질환으로 숨졌다고 합니다. 자신이 아프다는 걸 윈틴 씨에게 말 한 적 있습니까?

Win Tin: Well, yes, he told me that he was ill and at that time there were 8 rooms in our block. I was in number 1 and he was in room number 8...

네. 자신이 아프다고 당시 말했습니다. 당시 그 특별구역 안에는 감방이 8개 있었는데 나는 1호실 감방에 있었고 강 씨는 8호실 감방에 수감돼 있었습니다. 당시 구역 내 수감자는 우리 둘 뿐이었죠. 2008년 초반쯤이었을 겁니다. 그가 내게 몸이 안 좋다고 말했습니다. 무슨 장기에 문제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안돼 그가 병원으로 옮겨졌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해 4월 초쯤으로 기억됩니다. 얼마 안되어서 다시 감방으로 돌아와 나를 찾아 왔는데 매우 창백했습니다. 그는 병원이 너무 더럽고 지저분해서 거기서 주는 음식은 먹기가 싫었다면서 스스로 퇴원을 자청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감방에 돌아와서는 특별 구역 내 부엌에서 자신이 밥을 지어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예전에도 감옥에서 밥을 직접 지어 먹곤 했습니다. 국도 끓이고. 야채와 달걀과 미역 같은 것을 넣어 끓인 국이었죠. 제 기억으로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2주도 안 돼 돌아온 것 같습니다. 하지만 돌아 온지 며칠 안되어 다시 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게 강씨와는 마지막 결별이었습니다. 다시 병원으로 돌아 갈 때 그를 보지도 못했고 잘 가라는 말도 또 쾌유를 빈다는 말도 할 기회가 없었습니다.

전: 병원은 감옥 안이었습니까 밖이었습니까?

Win Tin: 우리 수감자들은 그걸 알 수 없습니다. 교화소 안에 여러 구역이 있는데 구역 자체가 높은 담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다른 구역에 어떤 것이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전: 강 씨가 밥을 짓고 남새와 달걀 같은 걸로 직접 국을 끓였다고 했는데요, 그런 재료는 교화소에서 지급한 것입니까?

Win Tin: Yes, from the prison. Normally we Burmese prisoners get already cooked rice every morning about 10 o’clock. But he said he refused to accept the cooked rice because…

그렇습니다. 버마인 일반인 수감자들은 매일 아침 10시쯤에 교화소에서 쪄 준 밥을 먹습니다. 하지만 강 씨는 그 밥이 맛이 없고 불결하다면서 먹기를 거부했습니다. 강 씨는 입쌀밥 만을 먹겠다고 주장했습니다.

전: 그래서 교화소에서 그럴 허락했습니까?

Win Tin: Yes. They allowed him not only white rice but also some meat. Not vegetables though…

그렇습니다. 강 씨에게 흰쌀만 준 게 아니라 고기도 약간 줬습니다. 하지만 남새는 지급하지 않았습니다. 교화소는 외부에서 남새가 반입되는 걸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는지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남새를 먹고 싶으면 교화소 내 구역 뜰에 있는 남새 밭에서 뜯어 먹을 수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남새는 토마토나 양배추 같은 채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보잘것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냥 풀 같은 이파리나 뜯어다가 삶아 먹는 것이었죠. 여하튼 교화소 당국은 강민철에게만은 구역 내 식당 부엌에 들어가 쌀과 그밖의 부식으로 직접 음식을 지어 먹을 수 있도록 허락했습니다. 일반 버마인 수감자들에게는 개인적으로 밥을 지어 먹는 일이 절대로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전: 그렇다면 일종의 특별대우였다고 할 수 있겠네요.

Win Tin: I can’t say like that exactly. Of course no one is allowed to cook themselves in the prison, but…

특별대우라고까지 말 할 수는 없을 겁니다. 그냥 강 씨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 뒀다는 게 더 맞는 말 같습니다. 강민철씨는 동료 수감자들과는 잘 지냈지만 교화소 간수나 관리들에게는 반항적인 데가 있었습니다. 화가 나면 소리치고 대들었습니다. 그래서 간수들은 강 씨의 성질을 건드리지 않는 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냥 강 씨가 혼자 밥을 지어먹도록 놓아 두었던 것이라고 봅니다.

전: 버마 말에도 능숙했지만 버마 노래를 부를 줄 알았다고 들었습니다. 어떤 노래들을 불렀습니까?

Win Tin: I don’t know really. I am an old man and I am not interested in songs, but…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늙기도 했고 노래에는 흥미가 없어서겠지만 내가 듣기에는 아마도 버마 정식 가요 같은 곡이라기 보다는 간수들이나 동료들한테 배운 가락을 흥얼거리는 것이었다고 생각됩니다.

전: 아까 한국 잡지나 외국 신문을 읽을 수 있었다는 말을 하셨는데 감옥 내에서 책을 읽거나 라지오를 듣거나 텔레비존을 보거나 할 수 있었습니까?

Win Tin: No. Not up to 2008 until we got cyclone Nargis…

아닙니다. 2008년 버마를 강타한 나기스 태풍이 있기 전까지는 허용이 안됐습니다. 당시 나기스 태풍으로 감옥 내 건물들이 무너지고 나무가 부러지고 해서 교화소가 뒤죽박죽 됐습니다. 그래서 수감자들이 태풍 피해를 틈타서 동요할 까봐 당국이 피해 복구를 하는 동안 우리 수감자들의 동요를 막고 신경을 다른데 쓰도록 하기 위해 그때부터 책을 허용하고 텔레비존도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30분정도 보게 했습니다.

전: 하루에 식사는 세끼를 먹었습니까?

Win tin: No, no. Only two. In the morning and in the evening. In the morning at 10 o’clock…

아닙니다. 하루에 두 번 급식했습니다. 아침 열 시에 그리고 저녁 다섯 시 반에 식사가 지급됐습니다.

전: 식사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쌀밥입니까?

Win Tin: Only rice. In the morning you have some rice and sometimes we get some beans, dry beans…

버마 쌀밥뿐이었습니다. 어떤 때는 마른 콩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녁때는 밥과 함께 가로 세로5센티 정도 길이의 소고기 두 점과 시레기국이 나왔습니다.

전: 식사량은 수감자들에게 충분했습니까?

Win Tin: No. Not at all, not at all.

아닙니다. 결코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전: 그럼 수감자 대부분이 늘 배고파 했겠네요?

Win Tin: Yes. Of course, for us who could have interviews (visits) with our family, we could have some eatables (something to eat), biscuits and so on…

물론입니다. 그나마 가족이 있는 수감자들의 경우는 가족이 면회 올 때 가져오는 외부 음식을 반입해 먹을 수 있어서 괜찮았습니다. 하지만 강민철 씨처럼 가족이 없거나, 가족이 있다 하더라도 너무 가난해서 음식을 가져 올 수 없는 그런 수감자들은 늘 배가 고팠습니다.

전: 윈틴씨 가족은 얼마나 자주 면회를 왔습니까?

Win tin: Every two weeks.

2주에 한 번 왔습니다.

전: 윈틴 씨는 면회 온 가족에게 받은 음식을 강 씨와 함께 나눈 적이 있습니까?

Win Tin; Yes I did. I did. But he never ate with other people. He ate himself, and… 네. 있습니다. 하지만 강 씨는 자기 스스로 밥을 지어 먹었고 다른 버마인 수감자들과 동석해 식사를 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주는 음식도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 버마 음식은 생선을 재료로 만든 게 대부분인데 강 씨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버마 빵도 주어 봤지만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는 강 씨에게 주로 바나나를 주곤 했습니다. 교화소에서는 바나나가 건강에 좋다면서 우리 수감자들에게 2주에 바나나10개를 지급했습니다. 내가 지급받는 몫 중에 대여섯 개를 강씨에게 주곤 했습니다. 그리고 내 가족에게 부탁해 반입 받는 미역도 주곤 했습니다.

전: 강민철에게 김치도 주신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Win Tin: Yeh, yeh. By the time of 2000 or so, in Burma there are a lot of big grocery stores opened, where you can buy a lot of foreign foods…

그렇습니다. 2000년경 버마에서 대형 식품점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서는 외국 식품도 많이 취급했습니다. 주로 한국 인도네시아 타이 중국 같은 곳에서 온 식품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가족에게 그 식품점에 가서 한국 김치를 사오라고 부탁했습니다. 강 씨가 당연히 자기 나라 음식인 김치를 좋아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근데 강씨는 그 김치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강 씨 말로는 포장 판매되는 그 김치가 신선하지 않고 위생적이지 않다고 했습니다. 나는 강민철 씨가 죽기 전까지 8-9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습니다. 50대 초반에 사망했으니 처음 그를 만났을 때 그는 40대 초반이었을 겁니다. 40대에서 50대가 되는 그 기간에 강 씨는 자신의 건강을 잘 챙겼습니다. 그래서 아침에 교화소 내 산책시간에는 뛰기도 하고 태권도로 몸을 풀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먹는 음식에도 신경을 많이 썼습니다.

전: 강 씨의 교화소 하루 일과가 어떠했을 지 궁금합니다. 수감자들이 하루 기상에서 취침까지 어떻게 하루를 보냈는지 소개해 주시죠.

Win Tin: most of us are in the solitary confinement cell, and we have a different…

수감자 대부분이 각기 다른 독방에 수감돼 있었기 때문에 강씨 개인의 감옥 내 하루 일과를 정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내 경우에 대비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우선 우리가 수감됐던 교화소 인세인은 랑군에서 14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는데 수감자는 많지 않았습니다. 2000년도에 이르러 많은 정치범들이 여러 다른 감옥소로 옮겨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특별구역에는 주로 연로하거나 유명 인사 정치범들이 수감돼 있었습니다. 우리 구역에는 감방이 10개 있었는데 각 감방에 한 명씩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특별구역에 수감된 정치범 수감자는 모두 10명밖에 안됐습니다. 아침 5시에 기상하면 간수들이 인원점검을 했습니다. 그 뒤 멀건 죽으로 간식이 나오고 그걸 먹고 나면 감방 내에서 걷기도 하고 쉬다가 10시가 되면 아침식사로 밥과 콩국이 나왔습니다. 아침 먹은 뒤에는 주로 침상에 누워 쉽니다. 점심 식사는 없습니다. 계속해서 감방 안에서 걷기를 했습니다. 내 경우 빨간 벽돌을 갈아 가루를 내어 물에 이긴 다음 햇볕에 쪼여 분필을 만들었습니다. 그걸로 벽에다 시도 쓰고 글을 적고 하면서 오후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오후 5시경에 저녁식사가 나오면 그걸 먹고 또 감방 안을 걷습니다. 얼마 뒤에 교도소 간수가 와서 인원 점검을 하고 8시쯤에는 승려(중)가 와서 교화 설법을 합니다. 그걸 듣고 9시 반이나 10시쯤에 취침합니다. 감방 내 전기 불은 스위치가 없고 항상 켜져 있습니다. 그래서 잘 때에도 불이 켜져 있습니다. 아침과 저녁 때 30분씩 감방 밖으로 나와 감옥 뜰을 걷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수감자 세 사람이 한 조가 되어 매 조가 30분 간격으로 교대해 밖에 나가 걸었습니다. 강 씨도 감옥 내 산책을 허용 받았는데 아마 그의 건강을 생각해서 당국이 그런 조치를 취한 것 같습니다.

전: 강민철의 테러행위로 한국인과 버마인 21명이 숨지고 46명 정도가 다쳤습니다. 윈틴씨 개인적으로는 만일 강 씨가 아직 살아 있다고 한다면 그가 사면을 받아 그가 원하는 나라로 보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Win Tin: The problem of Burmese government at that time is I think of course they don’t like to have prisoners a long time. Because you see, for instance, Burma, although in time of this military rule junta, we never hang or we never execute prisoners…I don’t mind for him to be released…

당시 버마는 군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감자를 장기 복역시키거나 사형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버마 정치범일지라도 통상 10년이나 20년 정도 징역형을 살게 하고는 석방했습니다. 만일 당시 버마와 관계가 좋은 서방세계 국가가 있어서 강 씨를 받아준다고 했었다면 아마 그는 이미 서방세계로 보내졌을 것입니다. 나 개인적으로도 강 씨가 석방되는 데 개의치 않았을 겁니다. 비록 그가 테러행위로 인명을 살상한 죄를 지었지만 나는 한 인간을 감옥에서 죽도록 살게 하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내가 그를 알고 지냈을 때 강민철 씨는 이미 20년 이상 교화소 생활을 했습니다. 자유 없이 영어의 삶을 그만큼 했으면 죄과를 갚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또 강 씨는 정치범이든 강력범이든 동료 수감자들과 가리지 않고 잘 지냈습니다. 먹을 게 충분하지도 못하고 그렇게 오랫동안 수감돼 있었지만 정신적으로 침체되지 않고 평상심을 유지하면서 지내는 강 씨의 모습에 늘 감탄했습니다. 역경의 처지에서도 인간성을 잃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 사람에게 계속 원한이나 증오심을 가지겠습니까?

RFA 초대석, 이 시간에는 북조선의 테러공작원 강민철과 20년간 같은 교화소에 수감됐던 버마 반정부 지도자 윈틴 (WIN TIN)씨로부터 강민철의 수감생활에 대해 들어 봤습니다. 저는 전수일입니다.